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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28)화 (129/141)

<128화>

“전하, 우선적으로 사살해야 할 대상은 모두 척결하였습니다.”

폭력적인 침묵이 지속되던 순간, 아자르가 나타나 무릎을 꿇으며 고했다.

“……그래?”

어차피 죽여야 할 놈, 분풀이를 해봤자 어디에 쓰겠나.

얕은 고민에 잠긴 리아트는 곧 사내의 머리를 짓누르던 발을 거두며 미련 없는 태도로 일어섰다.

“이놈은 자백서에 수결시킨 다음에 죽여.”

“명을 받드나이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명을 남긴 리아트는 모든 감정이 사라진 차가운 낯으로 앞을 응시하며 과거의 미망이 역겹도록 뿌리내린 아이나르 왕부를 떠났다.

* * *

그림자의 성역으로 향하는 길목은 오직 허락받은 존재만이 발을 들일 수 있다.

어둠의 주인이 영원에 가까운 세월이 흐를 동안 기다리는 이와, 죽음이 바로 그 허락받은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방문객은, 늘 그랬듯.

[에시메드. 오랜만에 나를 찾아와 주었구나.]

죽음이었다.

모든 빛이 매몰된 암흑을 바라보며, 거대하게 드러누운 뱀의 몸통에 기대어 있던 아르카네가 파리한 입매를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곱게 물결치며 흘러내리는 의장 속 창백하고 마른 팔을 들어 부드럽게 손짓하며.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우를 불렀다.

[이리 가까이 오렴. 내 먼저 너를 보러 갈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잘 되었다. 그간 평안하였느냐?]

[……형님.]

평안이라.

에시메드는 사납게 휘몰아치는 의문을 그러안은 채 아르카네를 향해 다가갔다.

내 앞에서는 이렇듯 언제나 다정한 분이시거늘.

[……서리가 묻어 있구나.]

에시메드를 유심히 바라보던 아르카네가 불현듯 가라앉은 어조로 읊조렸다.

[내게 오지 않았던 시간 동안 프린셔와 함께 있었던 것이냐?]

[아, 이건…….]

형님께서는 내가 다른 정령왕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신다.

형님을 향해 별다른 적의를 내비치지 않았던 프린셔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

에시메드는 살짝 당황하며 무어라 변명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으나, 아르카네는 침묵한 채 손을 뻗어 에시메드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서리 조각을 털어 냈다.

[그래. 이 정도쯤은 풀어 놓아야…… 떠나지 않을 테니.]

언제나 곁에 있음에도,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차가운 흔적만을 남긴 채 홀연히 떠나 버릴 것만 같다.

아르카네는 들릴 듯 말 듯 고요히 속삭이며 분을 삭였다.

[형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의 말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에시메드가 설핏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다른 이의 이야기는 그만하자.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에 무슨 갈등을 빚겠느냐. 자, 이리 와 내 곁에 앉으렴.]

아르카네는 언제 낯빛을 굳혔냐는 듯 밝게 웃으며 에시메드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형님. 저는 오늘 형님과 담소를 나누기 위해 걸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에시메드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선 채.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감정의 편린도 없이, 그저 순수한 신뢰만을 담고 그를 바라보던 푸른 안광에 망설임의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형님을 숭배하는 일족, 니샤의 왕족이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습니다.]

[니샤?]

선득한 불안이 엄습했다.

아르카네는 보이지 않게 손을 그러쥐며 물음을 던졌다.

[그들이 왜. 무슨 말을 지껄였기에 네 안색이 그토록 어두운 것이지?]

[……형님께서 그들에게 권능을 내리시며 부여하신 조건에 대해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수많은 생명을 바치라 명하셨다고요.]

[그래서?]

되돌아오는 목소리가 너무나 냉담하여, 에시메드는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짓눌린 채 어렵사리 말을 내뱉었다.

[유물을 제거하시고자 니샤의 일족들을 이용하신 것은 이해합니다. 유물은 형님의 안위를 위협하였으니까요. 하지만 제게 누누이 말씀하셨듯…… 너무도 하잘것없어, 관심을 둘 가치조차 없다고 가리키셨던 생명을.]

시선조차 마주할 수 없는, 유골로 지어진 가면의 구멍을 응시하며.

[구태여 해치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치, 악의를 품으시기라도 한 것처럼.]

집요하게.

에시메드는 그조차 모르는 새 눈매를 옅게 일그러뜨리고 물었다.

[…….]

뜻을 알 수 없는 침묵이 지속되었다.

[무슨 이야기이기에, 이토록 어렵게 꺼내나 했더니.]

그러다, 작은 한숨과 함께.

[고작 그 이유가 묻고 싶었느냐?]

[……형님.]

아르카네가 더없이 평온한 투로 물었다.

에시메드는 순간 당황했다.

……고작이라니?

[굳이 수호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 또한 아끼시는 존재가 바로 생명입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생명을 학살하신 행적은 가벼운 무게를 지닌 것이 아닙…….]

[그만, 그만하려무나.]

아르카네는 나긋한 어조로 읊조리며 에시메드를 진정시키려는 듯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너에게 굳이 이야기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해 함구하였을 뿐이란다. 하지만…… 고작 이런 문제로 네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진심으로 의아한 듯 이어지는 목소리에 에시메드는 시선을 떨구었다.

[저는…….]

사실, 이전이었다면 이렇게 구태여 묻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의문을 품었겠지만, 형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당연히 뜻이 있어 벌이신 일이리라 생각하고 관심을 거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온통 어둠으로 물들었던 시야에, 푸른 물감이 한 방울 떨어져 번지듯.

‘지난번 죽음의 정령왕께서 제게 감시역으로 붙여 두셨던 까마귀가 저를 도와준 일이 있었어요.’

그 목소리조차 창백하고 푸르른 여인.

하나 자신과는 달리 그 눈 속에 찬연한 빛을 품은 인간.

‘말씀해 주세요. 그날, 니샤의 왕제에게 끌려갈 위험에 처했던 제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조력자를 불러 주셨던 이유를.’

그가 남긴 기억의 잔상을 곱씹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엄습해 오는 것 같았다.

……하잘것없는 존재.

영원은 꿈조차 꾸지 못하고, 찰나와 같은 시간만을 몸부림치며 생명을 전소하고 죽음에게 잡아먹히는 필멸.

하지만 그런 필멸의 존재가, 불멸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신조차 가지지 못한.

‘나이아드…… 컥, 으윽…….’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소망을 관철하는 강렬한 의지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아무리 필멸의 존재라 해도, 경시하는 것이 과연 옳은 행동인가?

에시메드는 이와 같이 생각하고 말았다.

어쩌면, 조금은 존중해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거대한 힘에 휩쓸려 짓밟히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오랜 시간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지켜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니 형님께서 니샤의 일족들을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으신다면, 그 인간도.

조금이나마 평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어째서 생명이라는 것들의 행복과 자유를 존중하며, 이 우주에서 영원토록 기생할 수 있게 우리가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걸까?]

일말의 희망을 품고 형제를 바라보던 순간.

[나는 정녕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에시메드. 그저 너의 먹잇감에 불과한 것들일 뿐인데.]

그의 마음에 움튼 싹을 짓밟는 냉혹하리만치 순수한 의문에.

에시메드는 처음으로 절망이라는 감정에 휩싸여,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어딘가에 가둬 놓고 사육하다 네가 필요할 때마다 하나둘 집어삼키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토록 번잡하고, 성가실 일도 없을 테니.]

……먹잇감.

에시메드는 떨리는 눈빛으로 아르카네를 바라보며 천천히 깨달았다.

그동안, 생명을 그런 식으로 여기셨군요.

이 우주에서 태어나, 삶을 살아가며.

의지를 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조차 못마땅히 여기는…….

[형님께서는…… 어찌하여 생명을 그토록 미워하십니까?]

에시메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 이를 악물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에시메드…….]

아르카네는 처음으로 격정에 일그러진 아우의 낯을 바라보며 멍하니 답했다.

[나의 세상에는 너와 그만이 존재하면 되니까.]

그것이 모든 증오의 이유였다.

[……그렇군요.]

맥이 탁, 풀리는 듯.

허무하고도 차가운 감각을 이 순간 맞닥뜨리며.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에시메드…….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잠시만, 가지 말고 여기 있거라. ……에시메드!]

에시메드는 미련 없이 돌아서 그림자의 성역을 떠났다.

* * *

칼리드 일카이가 니샤의 왕좌를 찬탈했다.

“역시 주군께서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공녀님, 이제 마음을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잘된 일이네요.”

무사히 이룬 변혁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다가도, 앞으로의 일을 상기하며 근심에 젖던 때.

“왕궁의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는 신분을 드러내시지 않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우선 주군을 만나러 가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앞으로의 처우를 논의하기 위해서라도…….”

칼리드의 수하가 건넨 제안에 동의하여 이틀간 머무르던 처소를 벗어나 왕궁의 복도를 거닐던 때였다.

“조심히……. 아, 괜찮으십니까? 무녀님!”

가냘픈 몸집의 여인을 부축하듯 양옆에 선 시녀들이 염려 어린 시선으로 걸음걸이가 온전치 못한 여인을 살폈다.

……무녀?

“아…… 공녀님, 저분께서 바로 안누시카의 무녀이십니다.”

의문을 품던 찰나, 마찬가지로 안타까이 여인을 바라보던 칼리드의 수하가 내게 설명했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초점이 맞지 않는 몽롱한 회색빛 눈동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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