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갑작스레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흠칫 몸을 떨며 무심코 한 발짝 뒷걸음질했다.
“당신은…….”
안누시카의 무녀는 여전히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무녀님? 갑자기 왜 그러시는……. 무녀님!”
그녀의 곁에 있던 시녀들 또한 의아한 듯 물었으나, 안누시카의 무녀는 어디에서 난 힘인지 그들의 팔을 뿌리치고 비틀비틀 걸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당황한 채 상황을 지켜보던 칼리드의 수하가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하려는 듯 팔을 뻗어 내 앞을 막아섰다.
“…….”
하지만 안누시카의 무녀는 그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무녀.”
칼리드에게서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던 존재.
미래를 예지하여, 니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는 안누시카의 무녀.
나는 당혹을 가라앉히고 지척에서 마주한 무녀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을 착취당한다는 표현이 거짓이 아니었던 듯, 분명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외양이었지만 마른 몸피에 얹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화려한 의복으로 인해 더욱 위태로워 보였고.
빛을 잃고 흐려진 회색 눈동자는 그의 몸에 짙게 배인 향내와 뒤섞여 본능적인 거북함을 불러일으켰다.
리아트에게서는 안누시카의 무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칼리드가 이들 일족에게 자유를 내려 준 것일까.
“당신은 현재에 속한 사람이 아니군요.”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때, 마치 홀린 듯 나만을 바라보던 안누시카의 무녀가 고요하나 선득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
내가 이 시간대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봤어?
나는 크게 동요하며 여전히 몽롱한 낯빛을 한 무녀를 바라보았다.
“죽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는 마치 꿈결을 걷는 듯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세상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충격에 잠겼다.
그러나, 오직 나에게만은.
“죽음…….”
무녀의 말이 품은 진의가 다르게 와닿았다.
“이제 돌아갈 때입니다.”
빛을 잃어버린 달을 닮은 회색 눈동자에 로제의 모습만이 오롯이 떠올랐다.
“당신이 할 일은 모두 끝났으니까.”
무녀는 뒤이어 속삭였고, 그 순간 나의 귓가에 창백한 음성이 메아리치는 듯했다.
[네 말에 동의를 표하지. 유예를 내려주마, 네가 로어가 내려준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과거에 떨어진 내가 최초로 마주했던 이.
죽음의 정령왕과 맺었던 약조.
모든 사명을 마친 지금,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공녀님, 우선 주군을 만나 보시는 것이…….”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린 무녀는 홀연히 떠나갔다.
적막한 침묵을 깨고 칼리드의 수하가 곤혹감을 드러내며 내게 조언했다.
“……아뇨.”
그와는 이제 단 한 번의 만남만이 남아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의 영혼을 붙든 무언의 힘이 그리 이야기하고 있었다.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요. 호위는 필요 없고요.”
“예? 아니, 잠시만! 공녀님!”
그리고 그 힘은 나를 향해, 이리 오라고.
내가 있는 이곳으로 와 나를 마주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나는 왕궁의 복도를 달려가며 창가 너머로 비치는 드높은 회색빛 성벽을 응시했다.
빛보다 더 순결하고, 어둠조차 꺾을 수 없는 의지를 품은.
나의 어머니를 알게 된 순간부터 마주하기를 바라 마지않던.
이 우주를 꿰뚫는 유일무이한 지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은…….”
차가운 공기가 뺨과 폐를 할퀴고, 마침내 디딘 성벽의 끝자락.
오랜 세월을 상징하듯 하얗게 센 머리칼이 바람결에 흩날리고.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명료한 음성으로 나의 진명을 읊조리며 그가 천천히 돌아서자, 한쪽 눈가를 장식한 외안경에 달린 은빛의 금속 줄이 찰그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언뜻 보기에 니샤의 왕족과 비슷해 보였으나 잿빛인 그들과는 달리 맑은 은빛이 감도는 회안이 나를 또렷이 응시했다.
움푹 파인 눈매는 끝이 날카롭게 이어져 완고하면서도 칼날처럼 예리하다는 인상을 남겼고.
얼굴을 이룬 모든 선이 정결하고도 단정하여, 그 외양조차 자신의 권역을 상징하는 것 같은 차가운 미청년이 고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혜의 정령왕, 로어.”
그 앞에서 나는 홀린 듯 멍하니 그의 진명을 읊조렸다.
지혜의 정령왕은 두 눈을 내리감으며 고요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했다.
[그래. 너를 과거로 보낸 자, 너의 여정을 인도한 자.]
백색의 장막이 걷어지고, 고결한 은빛의 안광이 반짝였다.
[지혜의 정령왕, 로어다.]
“……어째서 모습을 드러내신 건가요?”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나는 손이 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쥐며 동요를 억누르고 물었다.
“그간 수많은 일이 일어났어요. 아르카네는 저를 비롯한 생명을 지긋지긋하게 위협했고, 금제에 얽매였음에도 다시 세상으로 기어 나와 재앙을 일으키려 하고 있죠.”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로어는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저 나를 가만히 응시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제 어머니는…… 대체 왜, 당신이 내린 사명을 이루려다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던 건가요? 애초에 어머니를 선택하셨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결국 모든 일은 실패했는데……. 당신이, 정말 미래를 내다본다면-”
[질문이 많구나. 하나같이 답해 줄 수 없는 것투성이고.]
그 순간, 로어가 옅게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니……. 어째서죠?”
둔탁한 충격에 잠겨 망연히 묻자, 로어는 심중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모든 진실은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성급한 시도는 남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설익어서 제대로 활용할 수도 없어.]
“그런…….”
묘한 어조로 답한 그는 내게서 눈길을 돌려, 성벽 아래 드넓게 펼쳐진 니샤의 수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보다는 당장 필요할 진실부터 말해 주마. 로제 하카드엘라의 영혼은 사라진 것이 아니야. 자아를 잃은 채, 너의 영혼과 뒤섞여 있을 뿐.]
“……뭐라고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심장께를 더듬으며 경악에 잠겼다.
그간 여정을 이어 나가느라 정신없던 와중에도 계속해서 걱정해 왔었다.
죽음의 정령왕에게 사명을 끝내고 내가 떠나면 자연히 로제의 영혼이 돌아올 것이라 호언장담하였는데, 만약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로제의 영혼을 끝내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찾아내야 할지 고민했는데.
“내 영혼과 뒤섞여 있었다니……. 어떻게, 그리될 수 있는 거죠?”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로어를 향해 물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하얀 옷자락과 하얀 머리칼을 맡기며, 초연한 모습으로 성도를 내려다보던 로어가 답했다.
[생명의 윤회를 알고 있나?]
“윤회…… 라고요?”
머뭇거리며 되묻자 그가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영원한 죽음은 없다. 생명을 다하고 죽음에게 삼켜진 영혼은 다시금 생명을 부여받고 세상에 태어나지. 또한 그들의 윤회는 나의 소관이다.]
그가 눈동자를 굴려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생명에게 내려지는 축복 또한 나의 감시하에 이뤄지지. 시공간을 초월하고, 영혼을 다스리는 권능이 나의 것이니 네가 처한 그 상태를 이루는 것 또한, 내게 있어 어려운 일은 아니야.]
“…….”
지혜의 정령왕이 이토록 포괄적인 영역을 다스리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인간에게 있어 그는 언제나 신비에 가려진 정령왕이었으니까.
[복잡한 이야기는 그만할까. 나는 너를 치하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니.]
“……치하라고요?”
나는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그러자, 로어는 그 차가운 낯에 떠오를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실낱같으나 분명한 미소를 그리고 말했다.
[네가 감당하기엔 어려운 사명을 끝내 이뤄 냈으니까.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믿고는 있었지만, 너로 인해 미래에 일어날 큰 문제들을 조금 더 수월히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너에게 진심으로 감사해하고 있어.]
“…….”
[고집불통이던 이그니스도 너로 인해 결국 마음을 정하게 될 테니, 이 또한 고맙군.]
……뭐지?
나는 귀를 의심하며 멍하니 로어를 바라보았다.
바늘 한 점 들어갈 틈도 없이 완고하고 냉정해 보이던 지혜의 정령왕이 진정으로 내게 감사를 표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니샤의 문제도 어느 정도 귀결되었다. 더 이상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어졌지.]
“니샤는…… 정말로, 아르카네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건가요?”
니샤의 이름이 그에게서 거론되는 순간, 나는 당황에서 벗어나 침잠한 심경으로 물었다.
비록 칼리드를 설득하여 비극을 멈추기는 했지만, 더 이상 아르카네에게 복종하지 않는 그들에게 닥칠 재앙을 상기하면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마음이 씁쓸해졌다.
[……니샤의 인간들은 그동안 지은 죄가 많아 다른 정령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아르카네와 어둠의 정령만이 그들에게 축복 아닌 저주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