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근심 어린 어조로 말을 잇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로어가 시선을 들어 탁 트인 하늘을 응시했다.
[하나 이제 스스로 대가를 치르고자 하여, 올바른 길로 되돌아왔으니.]
로어는 잠잠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어둠이 아닌 정령에게 축복받을 수 있을 거야.]
“……정말요?”
놀라 묻던 나는, 몰려오는 기쁨과 안도에 미소를 지었다.
[다른 권능이 생긴다면 삭의 힘에 의지하는 빈도 또한 줄어들 테니 악제도 감당할 만하겠지. 그러니 네가 그들을 염려할 필요는 없다.]
“다행이네요…….”
그러고 보니, 니샤의 왕족들이 오직 어둠의 권능만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다시 시리도록 무정한 낯으로 되돌아간 로어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의외였다. 자비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냉혹하고도 엄격한 정령왕일 것이라고만 상상했는데.
“지혜의 정령왕께서는 제 예상과 다르게…… 온화하신 것 같아요.”
[……온화하다, 라. 그런 표현은 처음 들어 보는군. 차라리 생각보다 융통성이 있어 놀랍다고 이야기하지?]
“…….”
찔린다.
꼭 내 속내를 들여다본 것만 같은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오늘은 이만하면 된 것 같으니 돌아가 보도록 해라.]
“……제 물음에는 끝끝내 답해 주지 않으시는군요.”
불만을 담아 중얼거리자 로어가 딱 잘라 답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나. 너의 의문은 지금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로어를 마주했다.
그때 그의 안광에는 기이한 열망이 깃들어 있었고.
[끝없이 의문하고, 답을 구하기 위해 몸부림쳐라.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진실을 갈구하는 이만이 미래로 나아갈 권리를 지니므로.]
믿어 의심치 않는 진실을 읊듯,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돌아가는 방도는 염려할 필요 없다. 죽음의 정령왕이 로제 하카드엘라의 생명을 거두는 순간 내가 너를 본래의 육신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
죽음의 정령왕.
낯익은 그 외양을, 이때까지는 그저 의아하다고만 여겼지만…….
“그럼…… 이 물음에는 답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나는 마지막으로 로어를 향해 답을 청했다.
“제 약혼자, 에시메드와 죽음의 정령왕은 어째서 그토록…… 닮은 외양을 지닌 것인지. 어째서 아르카네가, 인간일 뿐인 에시메드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것인지…….”
세찬 바람이 한차례 불어왔다.
비산하듯 휘날리는 푸른 머리칼에 시야가 흐트러져 나의 물음을 받은 로어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머지않은 때, 너 스스로 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를 스쳐 지나가고.
“공녀님! 날이 춥습니다, 이만 돌아가 보시지요!”
오직 그와 나만이 존재하여 고요하기 그지없던 성벽 위로 다른 사내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람이 멎어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하고 서둘러 로어를 보려 했지만, 언제 떠나간 것인지 그가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공녀님!”
그리고 내가 떼어 놓고 온 칼리드의 수하가 다급히 달려와 내 팔을 붙들었다.
“무녀님께 그런…… 불길한 예언까지 들으셨는데, 이리 차가운 날씨에 오래도록 나와 계시면 안 됩니다.”
아마도 안누시카의 무녀가 한 이야기를 말 그대로 받아들인 듯했다.
어차피 다르게 이해했다 한들, 달라질 것도 없지만…….
“……칼리드 님을 뵈러 가야겠어요.”
“아, 잘 생각하셨습니다. 주군께서 어떻게든 해결해 주실 테니까요.”
나는 다시 한번 로어가 떠나간 자리를 돌아보았다.
죽음의 정령왕과 에시메드.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미지의 연결점을 나 스스로 깨닫게 될 때는 과연 언제일까.
* * *
“로제.”
“칼리드.”
알현실에는 오직 그만이 있었다.
나는 장중하면서도 독특한 양식을 구경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니샤의 국왕으로 즉위하시게 된 것을 감축드려요.”
“저 스스로 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런 저를 믿고 따라 준 이들과…… 당신의 설득이 없었더라면,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칼리드는 왕좌를 돌아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듯했다.
아마도 얼마 전까지 저 왕좌에 앉았을 아이나르를 떠올리는 것이겠지.
“……마지막으로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부탁이야 당연히 들어드릴 것이나, 마지막이라니…….”
내가 가라앉은 어조로 용건을 꺼내자 칼리드는 의아한 듯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지하의 버려진 창고에서 바람, 대지, 전기의 유물이 남긴 잔해를 발견했어요. 본래는 다른 안전한 장소를 찾아 옮기려 했지만…….”
이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로 되돌아갔을 때, 나는 니샤의 왕궁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내 생각이 맞다면 숲의 유물과…… 물의 유물을 찾아 헤맬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칼리드, 당신이 유물의 잔해를 보관해 주었으면 해요.”
이그니스가 보호하는 빛의 유물과 로샨 제국에 현존하는 불의 유물을 제외한 다른 유물들을 구태여 다른 장소를 찾아 그곳에 두는 것보다는, 니샤의 군주에게 맡겨 보호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현실로 돌아간 내가 유물의 잔해를 챙기기에도 수월할 것이다.
“……제게, 유물의 잔해를 맡기시겠다고요.”
칼리드는 생각지 못한 부탁이라는 듯 황망한 기색으로 천천히 읊조렸다.
“네. 부탁드려요. 니샤의 군주인 당신이 손수 유물의 잔해를 보호한다면 감히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테지요.”
“알겠습니다. 그리 약조하지요.”
칼리드는 굳은 표정으로 내게 약속했다.
유물의 잔해를 보호하겠다고.
하면 이제 그와 나의 연은 모두 끝났다.
“감사해요. 그럼, 저는 이제…… 가족에게 돌아갈 생각이에요.”
거짓말이다.
마리에와 레제크의 앞에서 로제가 죽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하니, 나는 드라이어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음의 정령왕을 만날 생각이었다.
“……그리하셔야지요. 그간, 저로 인해 너무도 많은 고초를 겪으셨으니.”
칼리드는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듯했지만, 그를 삼키며 애써 미소 지었다.
아마도 그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로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자신으로 인해 로제가 이른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여기며 누구에게도 토해 낼 수 없는 죄책감에 잠겨 괴로워하겠지.
하지만 그것은 내가 어찌해 줄 수 없는 필연적인 비극이었다.
죽은 이의 육신을 뒤집어쓰고 칼리드를 찬탈의 길로 이끌었으니까.
애초부터 결말이 정해져 있는 인연이었으니…….
“로제……?”
나는 말없이 칼리드의 손을 힘주어 붙들며 말했다.
“하카드엘라는 이미 멸망했지요. 이제 와 후회한다 해도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어요.”
그러니, 내가 떠난 이후의 그에게…….
“하니 진정으로 속죄하길 원하신다면,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당신의 민족과 나라가 옳지 못한 길을 걷지 않도록.”
삶의 목표로 자리하여, 그가 절망을 견딜 수 있는 지지대가 되어 주기를 바라며 나는 간곡히 이야기했다.
“밤을 밝히는 달처럼, 모두를 비추는 군주가 되어 이 니샤를 이끌어 주세요.”
“…….”
한동안 침묵에 잠긴 채 망연히 나를 내려다보던 칼리드는.
“……제 모든 생애를 걸고, 약조하겠습니다.”
내 손을 미약하게나마 힘주어 마주 잡으며 맹세했다.
앞으로 남은 자신의 모든 삶을 지배할 단 하나의 약조를.
* * *
칼리드와 작별한 이후, 나는 마차와 호위를 사양하고 홀로 니샤의 왕궁을 걸어 나왔다.
부러 샛문으로 나왔기에 눈앞으로 펼쳐진 풍경은 인적 하나 없는 고즈넉한 숲속이었다.
“죽음의 정령왕을 어떻게 불러야 한담…….”
나는 근심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검은 전령을 눈으로 찾아 헤맸다.
“저기요, 죽음의 정령왕님? 저 안 보이세요?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으니, 제 앞에 좀 나타나 주세요.”
에라, 모르겠다.
나는 죽음의 정령왕이 들을 때까지 부르겠다는 심정으로 혼잣말을 내뱉으며 숲을 걸었다.
[…….]
“어? 오셨네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촘촘히 둘러싼 나무 너머, 절벽 위.
낯익은 거구의 형체가 홀연히 나타나 그 새파란 안광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한 이야기는 모두 들으셨어요? 이제 사명을 모두 마쳤으니, 돌아가면 돼요.”
[…….]
“죽음의 정령왕님께서도 후련하시죠? 성가시고 이상한 인간이 드디어 돌아가는 거니까요.”
애써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장난스럽게 말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깊은 적막이었다.
뭐야, 왜 이래?
전에는 뭐라고 대꾸라도 하더니.
“……무슨 일 있으세요? 안색이…….”
나는 의아함에 잠겨 죽음의 정령왕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낯이 이전보다도 더 무겁게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