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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31)화 (132/141)

<131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죽음의 정령왕을 마주 응시하며 의아함에 잠겼다.

[……돌아가도 된다고.]

그에게서 유의미한 답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간의 침묵이 지속된 이후였다.

“네. 지혜의 정령왕께 받은 사명을 모두 이뤘으니까요. 로어 님께서 직접 제 앞에 나타나셔서 이르시기를, 사라진 줄 알았던 로제 하카드엘라의 영혼이 바로 제 영혼과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고 해요. 그러니 죽음의 정령왕께서 그녀의 생명을 거두는 때, 제 영혼을 본래의 육신으로 되돌려 주시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그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그러나 죽음의 정령왕은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답을 망설였다.

“어찌 되었든, 이 순간 로제 하카드엘라는 비로소 온전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의 갈등으로 인해 예정된 결말을 언제까지고 미룰 수는 없었다.

마음을 굳힌 나는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니 죽는 순간만큼은 그녀가 본래 있어야 할 곳에서 눈을 감고 싶어요.”

[…….]

온기 한 점 깃들지 않은 시리도록 푸른 안광이 나를 향해 오롯이 쏟아져 내렸다.

그를 바라보며 나는 청했다.

“로제의 고향인 하카드엘라 공국의, 바닷가로 데려다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바다?]

죽음의 정령왕이 예상치 못했다는 듯 읊조렸다.

“고향이니까요. 부탁드려요.”

드라이어스 왕국으로 떠나가면서, 다시는 하카드엘라 공국을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두려웠던 앞날은 예상 밖의 결말을 맞이하였고.

그로 인해 돌아가기 전 약간의 여유가 주어졌으니…….

나의 외가나 다름없는 나라에서 과거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왕이면, 음. 그래, 가장 넓고 아름다운 바닷가였으면 좋겠어요.”

[너는 정말, 나를 너무…… 쉽게 대해.]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죽음의 정령왕이 두 눈을 살짝 내리감으며, 옅은 한숨을 내뱉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묘한 기분이 일렁이는 심경을 꾹 누르고, 형형히 빛을 발하던 안광이 가려져 서늘함이 조금이나마 가시자 내가 아는 소년의 모습이 더욱 엿보이는 죽음의 정령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당신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몰려와 자꾸만 익숙함을 느끼게 돼.

늘 하던 것처럼, 편안히 대해 버리고 만다.

[그래. 들어주도록 하지.]

죽음의 정령왕은 어떤 방식으로 공간을 이동할까?

의문을 품던 그때, 가시나무로 뒤덮인 그의 손이 뻗어와 조심스레 나의 팔목을 붙들었다.

[……아프더라도 조금만 참아.]

뜻밖의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던 것도 잠시.

검은 안개가 시야를 온통 물들이며 세상이 암전되었고.

당황에 잠겨 숨을 들이쉬던 찰나.

“아…….”

귓가를 가득 채우는 파도 소리.

나의 눈앞으로 펼쳐진 것은 광활하리만치 드넓은 바다와 하늘이었다.

연한 푸름으로 물든 하늘이 짙푸른 색채의 바다에 투영되어 아롱졌고, 모래사장을 물들이는 하얀 파도에 햇볕이 반사되어 마치 작게 바스라진 별들을 흩뿌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름다웠다.

“꼭 하늘과…… 별을 담은 바다 같네요.”

한동안 그 풍광을 감상하던 나는 생긋 웃으며 죽음의 정령왕을 돌아보았다.

[……별은 너희를 닮았어.]

마찬가지로 깊이 침묵한 채 끝없이 파도치는 해변을 응시하던 그가 문득 말했다.

[불멸하는 존재에게 있어 찰나의 시간만을 반짝이다 모든 것을 전소하고 사라지는 것, 꼭 너희와 비슷하지 않나.]

“그렇다기에는…… 별은 저희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빛나며 살아가는걸요.”

뜻밖의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경청하던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시리도록 창백한 청색이 깃든 안광이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저희를 별처럼 아름답고도 고귀한 존재에 빗대어 이야기해 주시다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요.”

[피조물은 하루에도 수없이 태어나고 덧없이 지는 존재.]

[가치 있는 생명의 범주에 들지도 못하는 존재들이야. 한둘쯤 잃거나 바꿔치기 당하더라도 이 세상의 섭리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지.]

그를 처음으로 마주했던 때, 지독히도 권위적이며 짙은 무료함이 서린 어조로 읊조리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히 떠오르는데.

“언제는 가치 없는 존재라 일축하시더니, 어찌 지금은 이토록 듣기 좋은 말씀을 해 주시나요?”

당신에게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걸까?

[……너로 인해 알게 된 사실이야.]

“……!”

그리고 되돌아온, 전혀 생각지 못했던 답에 나는 망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온몸을 휩쓸고 스쳐 지나갔다.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살아 있는 인간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일이 없어. ……내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께서 내가 인간을 가까이 여기는 일을 원치 않으셨기도 하였고, 다른 정령들은 나와 교류를 꺼렸으니 더더욱 인간과,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일은 없었지.]

죽음의 정령왕은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망설이는 듯 중간에 목소리를 흐리다, 끝내 말을 맺고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너를 마주하고…… 참으로 이상하게도, 영겁의 세월 동안 지녀왔던 나의 모든 가치관이 무너지는 것 같아.]

그는 천천히, 하나 분명한 사실만을 담아 고백했다.

[정녕 내가 믿고 따르던 존재가 올바른 신념을 품은 이였던가. 아무리 하잘것없이 연약한 피조물일지언정…… 그 자신의 의지조차 무시하고, 천대하며 짓밟는 일이 옳은 것인가.]

언제나 냉엄히 얼어붙어 있던 푸른 눈동자가 혼란의 빛으로 이지러졌다.

[너는 내가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아주 오래도록 그리 살아왔던 것처럼, 내가 있던 자리에 머물러야 하나? 아니면…….]

“……제가 대신해서 답을 내려드릴 수가 없는 문제예요.”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답했다.

푸른 안광에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필멸과 불멸을 떠나, 생명이라면…… 삶에 불어 드는 변화의 바람을 피할 수는 없어요.”

나 또한 그랬으니까.

할아버지와 단둘이, 작디작은 시골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어느 날.

자신이 나의 아버지라며 들이닥친 로베릭으로 인해 내가 알지 못했던 진실들이 폭풍처럼 몰아닥쳤고.

그 변화가 나를 이끌어 온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무 두려워는 마세요. 그저 운명이라 여기고, 온전히 몸을 내맡긴다면…… 분명 그 끝에서, 이전의 삶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풍경을 마주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검은 옷자락을 살며시 붙들고 말했다.

“먼저 겪어본 자로서 드리는 확실한 경험담이니 믿으셔도 괜찮아요. 분명 다 잘 될 테니까.”

마지막 대목은 나의 바람과 같았다.

현실로 돌아간 나를 기다릴 거대한 재앙도, 나의 삶을 둘러싼 불멸자들의 대립도.

많은 시간이 흐른 뒤, 그때는 그랬지.

실없이 웃으며 회상할 수 있는 과거의 나날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이토록 거대한 체구를 지녔음에도, 길을 잃어버린 아이 같은 눈빛을 한 죽음의 정령왕을 향해 나는 믿음을 담아 미소 지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에요.”

그리고 나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영원히 아름다울 것만 같은 바다를 돌아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부탁 한 가지만 더 드려도 될까요? 로제의 생명을 거두고 제가 떠난 뒤, 남겨질 로제의 시신을 드라이어스 왕궁에 인도해 주셨으면 해요. 수명이 다해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원망에 괴로워하지 말라고. 편히 떠났다고…….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약조하지.]

“감사해요.”

되돌아온 승낙에 나는 그를 돌아보며 후련히 미소 지었다.

“자, 그럼 이제 당신이 하실 일을 하세요.”

나는 그의 옷자락을 붙든 손을 놓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죽음의 정령왕은 당장이라도 내 생명을 거둬가겠다는 듯 행동하던 그때와는 달리.

[…….]

선뜻 손을 뻗지 못한 채, 눈매를 옅게 일그러뜨리며.

“……어째서 망설이시나요?”

주저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나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던 그가.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를 직시하며 어렵사리 내뱉었다.

아, 정말 이럴 때면…….

“제가 죽는 것이 아니에요. 로제 하카드엘라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죠.”

먼 미래, 내가 만나게 될 한 소년이 환시처럼 떠올라.

[알고 있다. 하나 내가 아는 너는, 그 여인의 모습을 지닌 너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드디어 일부나마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떠나보내면.]

죽음의 정령왕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돌려 나의 눈길을 피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진정으로 모를 일이다.

그 소년은 당신과 하나 관계없이 태어날 아이인데, 어째서 당신과 그 소년은 이토록 닮은 모습을 지닌 것일까…….

[그것은 머지않은 때, 너 스스로 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로어, 당신이 내게 그리 말하였지요.

머지않은 때가 되어 나 스스로 진실을 깨달을 것이라고.

이제, 어렴풋이나마 그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것 같아요.

“미래를 살아가는 제 곁에는…… 알 수 없게도, 당신과 아주 많이 닮은 소년이 언제나 함께해요.”

그리하여 나는 괴로이 갈등하는 죽음의 정령왕을 향해 다정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실없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당신이 인간으로 태어나 저를 찾아왔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이 드네요.”

[…….]

죽음의 정령왕은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았다.

“자, 이제 더는 지체할 수 없어요. 죽음의 정령왕이시여. 당신이 해야 할 의무를 하세요.”

나는 가벼운 심경으로 싱긋 웃은 뒤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숨이 달아나고, 생명은 죽음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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