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32)화 (133/141)

<132화>

* * *

그라시아 왕궁에 검푸른 죽음이 홀연히 나타났다.

미지의 존재를 향한 두려움과 경외에 사로잡힌 이들의 시선은 곧 죽음의 품속에 창백한 얼굴빛으로 잠든 한 여인에게로 향했다.

[하카드엘라의 첫 번째 공녀가 순리대로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그의 혈육에게 시신을 인도하라.]

서늘하며 고요한 기품 어린 그의 명령에 사람들은 홀린 듯 하카드엘라의 공녀와 드라이어스의 왕족 레제크 공을 데려왔다.

“어, 언니……. 왜, 왜 눈을 뜨지 않아? 나야, 마리에. 언니의 하나뿐인 동생이잖아. 그러니 제발, 눈 좀 떠봐…… 이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당장이라도 혼이 빠져나갈 듯 핏기없는 낯빛으로 황망히 달려 나온 마리에 하카드엘라는 죽은 자매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현실을 부정한 끝에 참담히 울부짖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로제 하카드엘라 공녀께서, 어찌하여 차게 식은 시신으로 돌아오셨단 말입니까!”

붉게 젖은 눈시울로 비극적인 광경을 응시하던 레제크 드라이어드가 들끓는 증오에 휩싸여 죽음을 향해 외쳤다.

[……순리대로, 본래부터 정해진 운명에 따라 자연히 눈을 감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 니샤에서……!”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이성을 잃고 고함을 내지르는 레제크의 목소리를 일언지하에 끊으며, 죽음이 냉엄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정해진 수명을 누리다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내가 몇 번을 이야기해야 하지? 고통 없이 눈을 감았으니 그 누구도 원망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말문이 막혀 망연히 그를 올려다보는 은빛의 눈동자를 마주하던 순간, 이미 눈을 감은 여인의 미소가 다시금 떠올라서.

[…….]

에시메드는 동요를 간신히 억누른 채 검은 안개로 화해 그라시아 왕궁을 떠났다.

“언니……. 아니야, 제발 나를 떠나지 마, 언니마저 사라지면, 나는 어떡해…….”

남겨진 자들은 벗어날 길 없는 애통함에 잠겨 끝없이 절망할 뿐이었다.

* * *

무의식적으로 왕궁을 떠나 당도한 장소는, 하필이면 그 바닷가였다.

‘꼭 하늘과…… 별을 담은 바다 같네요.’

푸른 머리칼을 바람에 휘날리며 그를 향해 옅게 미소 짓던 여인의 상이 걷잡을 수 없이 떠올라 뇌리를 물들였다.

에시메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하얗게 파도치는 바다를, 어느새 황혼이 내려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가.

대체 무엇 때문에, 심경이 해소할 길 없는 막막함에 잠겨 이토록 괴로운 것이지?

누구보다 믿고 따랐던 형제의 잔악함을 비로소 맞닥뜨렸기 때문인가.

하지만 과거였다면, 설사 형제의 치부를 알았다 하더라도…… 이토록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래, 모든 것은 그 인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에시메드는 근원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눈매를 찡그리며, 그의 고백에 부드러우나 누구보다도 강인한 심지가 깃든 음성으로 답하던 여인의 모습을 회상했다.

‘제가 대신해서 답을 내려드릴 수가 없는 문제예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필멸과 불멸을 떠나, 생명이라면…… 삶에 불어 드는 변화의 바람을 피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너무 두려워는 마세요. 그저 운명이라 여기고, 온전히 몸을 내맡긴다면…… 분명 그 끝에서, 이전의 삶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풍경을 마주할 수 있을 거예요.’

가냘픈 손을 뻗어 마치 위로를 건네듯, 그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붙들며.

‘먼저 겪어 본 자로서 드리는 확실한 경험담이니 믿으셔도 괜찮아요. 분명 다 잘 될 테니까.’

안도를 선사했던 여인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험난한 길의 유일한 등불이자 이정표와 같이 여겨졌다.

[더는 네가 없는데, 나는 어찌해야…….]

해소할 길 없는 황망한 괴로움을 물리칠 방도가 도저히 떠오르질 않았다.

앎의 문턱을 넘은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하나 그 발단을 일으켰던 존재를 떠나보낸 지금, 이는 바로 미완의 시작이라.

뿌리 뽑아 지워 버릴 수도, 그렇다고 품어 기를 수도 없는 감정이 영혼 깊숙이 파고들었음을 깨닫고서 에시메드는 더없이 절망했다.

‘미래를 살아가는 제 곁에는…… 알 수 없게도, 당신과 아주 많이 닮은 소년이 언제나 함께해요.’

그리고 에시메드는 망연히 떠올렸다.

‘실없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당신이 인간으로 태어나 저를 찾아왔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불멸의 존재인 정령이 필멸에 속하는 인간으로 화해 태어난다는 이야기는, 그토록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던 일이었다.

만약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단번에 말도 안 된다 치부하며 외면할 경악스러운 이변.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이야기가 이토록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어 알 수 없는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이 무거운 존위와 탄생 직후부터 짊어진 책무를 내버리고.

오롯이 나 자신으로 남는다면, 내가 알지 못했던 미지를 깨달을 수 있을까?

윤회가 지닌 의미와, 필멸과…….

[그 인간을.]

더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온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더는 차갑게 식어 버린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안색이 복잡해 보이십니다.]

[……너는.]

한 번 들이킨 갈망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괴로움에 짓눌리던 그 순간.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을지요.]

뇌리에 드리운 암운을 거두고 내리는 한 줄기 빛처럼 나타난 백색의 지혜가, 담담한 기색으로 에시메드를 응시했다.

[……무엇을, 돕겠다는 말이지?]

에시메드는 낯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지긋지긋하지 않습니까? 태고의 은혜를 저버리지 못하여, 당신을 옭아매는 어둠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도.]

지혜의 정령왕, 로어는 더없이 여상한 말씨로 죽음의 정령왕에게 되려 물음을 던지며 고요한 안광에 오직 그만을 비추었다.

은빛의 호수 위, 분노를 품고 일그러진 검푸른 죽음의 낯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앎에 대한 갈망을 처음으로 품으셨습니까. 하면 외면하지 마십시오. 이미 너무도 오랜 세월을, 어리석은 존재에게 붙들려 낭비하셨습니다.]

이전이었다면 지혜가 내뱉은 말에 당연히도 적의를 품었을 것이다.

그 자신에게 있어 절대적인 신뢰의 상대였던 유일무이한 형제, 이 우주의 어둠을 비방하기 위한 교활한 술수라 여기며.

[……무슨 수로, 나를 돕겠다는 것인지부터 말해라.]

하나 신뢰는 깨졌다.

더 이상 그림자가 선사하는 안온에 기대어 진실로부터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최초의 이변으로 다가온 그 인간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다.

[인간으로 화해 태어나실 수 있도록,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지혜의 정령왕은 에시메드의 갈망을 읽어 낸 듯 제안했다.

[다만……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존재하는 법. 인간으로 태어나길 원하신다면, 당신이 지닌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손을 잡으시겠습니까?]

지혜의 정령왕은 그의 운명을 가를 선택을 제시하며 손을 내밀었다.

[……상관없다.]

더는 무지의 그림자에 속해 의미 없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리하여 태고의 죽음은 어둠을 벗어나, 미완의 감정을 남긴 인간을 다시 만나기 위해.

오직 그 자신만의 선택으로 기나긴 여정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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