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33)화 (135/141)

<133화>

은회색 안광이 첨예하게 빛났다.

[…….]

오리에드는 입을 굳게 닫으며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지금 서로를 의심할 때가 아니야! 아르카네가 미쳐 날뛰고 있다고. 이러다 애꿎은 분노를 세상에 쏟아붓기라도 하면 어떡해?]

두 정령의 대화를 지켜보던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가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유물 중 반절이 제 구실을 못 하게 되었으니 아르카네를 금제에 몰아넣을 방도는 없어.]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이 가라앉은 어조로 사실을 읊었다.

그러자 정령왕들은 일제히 침묵에 잠겼다.

[…….]

한편 빛의 정령왕은 묘한 눈빛으로 좌중을 응시하며, 곧 그만의 생각에 잠긴 듯 어떠한 발언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가 좋지 않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니?]

[일리피아.]

그때 차갑도록 식어 버린 겨울의 침묵을 단숨에 몰아내듯, 따스한 온기로 빛나는 생명의 정령왕이 나타나 고아한 미소를 지으며 물음을 건네왔다.

우주를 담은 그의 눈동자가 정령왕들의 안색을 찬찬히 살폈다.

[죽음의 정령왕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건가? 그의 권능만이 남고, 이름조차 필멸의 기억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대지의 정령왕이 세상 물정을 모르다 못해 태평하게마저 보이는 일리피아를 응시하며 착잡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인간들을 보살피느라 정령계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더니.]

산란히 반짝이는 광휘를 품은 검은 안광에 의미 모를 회한이 서렸다.

[그토록 사랑하던 아우가 떠나 버렸으니…… 아르카네가 많이 고통스러워하겠구나.]

[아르카네의 고통을 우리가 왜 헤아려야 하지? 쓸데없는 염려는 집어치워, 일리피아.]

심기가 불편한 듯 안색을 굳힌 채 다른 곳을 응시하던 에리얼이 날 선 어조로 일갈했다.

[그만해! 일리피아는 태고의 정령이니, 어쩔 수 없이 아르카네에게도 마음이 쓰이는 것이겠지.]

혹여 분란이라도 생길까 싶어, 드라이어드는 다급히 에리얼을 제지하며 일리피아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그니스, 만약 그가 사라진 죽음을 찾겠다며 날뛴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해?]

평온한 낯빛으로 사태를 관망하듯 앉은 이그니스의 곁에서 하얀 베일로 온몸을 꽁꽁 감싼 채 두려움에 몸을 떨던 아스트라페가 실낱같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글쎄요. 앞으로의 일을 확신할 수는 없으나…… 아스트라페, 이 사실만은 잊지 마세요. 당신 또한 우주를 밝히는 빛의 권능으로부터 탄생하였다는 것을.]

이그니스는 다정히 아스트라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그러니 어둠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답니다.]

제대로 된 외형이 드러나 보이지 않았으나, 한눈에 보기에도 왜소한 체구를 지닌 전기의 정령왕은 고개를 푹 숙이며 어떠한 대꾸도 내뱉지 않았다.

[새로운 방도가 필요해. 아르카네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이니…….]

어둡게 가라앉은 안색으로 침묵을 이어 가던 나이아드가 잇새를 악물며 느직이 읊조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다들 조심해, 아르카네의 기운이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온기 한 자락 서리지 않은 냉엄한 낯빛을 드리운 채 자리를 지켰으나, 유독 근심 어린 눈빛으로 좌중을 응시하던 프린셔가 목소리를 무섭도록 굳히며 경고했다.

[뭐라고? 아르카네?!]

드라이어드가 기함한 듯 외치며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아스트라페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이그니스에게 더욱 바짝 붙이며 언뜻 드러나 보이는 검은 눈망울로 광휘 서린 결계에 스며드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초대받지 못한 객의 무례한 난입이었다.

[……아르카네.]

프린셔의 경고에 온화하게 머금고 있던 미소를 거두며 낯빛을 굳힌 일리피아는 지척에서 들려오는 뱀의 울음소리에 천천히 돌아서 그를 응시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수백 마리의 뱀이 쇳소리를 흘리며 서로를 옭아매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박이고 말 정도의, 찰나의 시간이 흐른 이후.

뱀이 있던 자리에는 얼굴의 반이 가려졌음에도 위험하리만치 아름다운 매혹을 독물처럼 뚝뚝 흘려보내는 미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이 우주의 어둠, 가장 오래된 태고의 정령.

아르카네였다.

[……아, 일리피아.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평온해 보이는 낯빛이로군.]

파리한 입매를 당기듯 끌어 올려 미소를 그린 아르카네의 목소리는 기이하리만치 격양되고, 옅은 떨림으로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의 근원이 산산이 부서져 불가능한 소멸을 바랄 만큼 고통에 울부짖는다고 하여도…… 그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세상만을 바라보겠지.]

그는 마치 열에 들뜨기라도 한 것처럼 두서없이 말을 읊조리며, 뼈대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마른 손을 뻗어 생명의 활기를 머금고 아름답게 빛나는 은빛 머리칼을 쥐려 했으나.

[그 추악한 손, 치워라.]

콰득-

허공에 나타난 금빛의 창이 그의 창백한 손을 관통하였다.

검은 핏물이 진득하게 떨어져 내려 짙은 흔적을 남겼다.

[……오리에드.]

달뜬 열기가 식고 섬뜩하리만치 냉혹한 음성이 자신을 저지한 이의 이름을 읊었다.

오리에드는 금빛 안광을 증오로 번뜩이며 그에게 있어 악의 결정체나 다름없는 어둠의 형상을 응시했다.

[아, 그래. 초대받지 못한 객이라 이건가.]

냉소적인 어투로 나직이 중얼거린 아르카네가 자신의 손을 관통한 금빛의 창을 무자비하게 뽑아내, 검게 으스러뜨려 소멸시켰다.

곧이어 그의 손에 남겨졌던 깊은 상처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내가 이토록 무례하게 난입한 이유는 구태여 설명치 않아도 알고 있겠지? 내 아우, 에시메드의 이름이 세상에서 지워졌다. ……그 존재 또한 내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졌어.]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을 품은 듯한, 칼날 같은 미소를 머금은 아르카네는 가면 아래 가려진 시선을 돌려 로어를 응시하며 소름 끼치도록 분명한 어조로 물음을 건넸다.

[로어. 에시메드는 어디에 있지?]

그가 이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 마지않는 듯한 어투.

정령왕들의 안색이 무겁게 경직되며, 모든 이의 시선이 로어에게 쏟아졌다.

[……무슨 이야기를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군. 그걸 왜 나에게 묻는 거지?]

하나 로어는 더없이 평온한 태도로 아르카네를 직시하며 침착히 답했다.

그러자 아르카네의 낯에 깃들었던 미소가 사라졌다.

[에시메드는 어디에 있어?]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물음이 또 한 번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모른다고 답했는데, 귀라도 먼 건가?]

로어는 그의 물음에 다시금 답하며, 더없이 차분한 어조로 비아냥을 덧붙였다.

[……에시메드, 어디에 있어?]

사나운 침묵이 얼마간 흐른 이후.

아르카네는 마지막으로 에시메드의 소재를 물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섬뜩하게마저 느껴지는 아르카네의 집요함에 드라이어드는 진심으로 질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여타 정령왕들도 동감하는 기색이었다.

[모른다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

로어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으며, 아르카네의 물음을 일축했다.

[하…… 하, 일리피아. 이것 좀 보십시오. 분명 저놈 말고는 에시메드를 내게서 빼앗아 갈 자가 없는데, 끝까지 부인하는 저 모습을!]

아르카네는 일순 정신을 놓은 것처럼 헛웃음을 내뱉으며, 마치 일리피아에게 하소연하듯 읊조렸다.

[……로어는 알지 못한다고 답했어.]

그 순간, 일리피아의 낯빛에 일순 망설임의 기색이 번뜩였으나.

그는 두 눈을 내리감아 아르카네를 바라보지 않은 채.

[어쩌면 에시메드, 그 스스로 너를 떠나 알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고요한 음성으로 답했다.

[……일리피아.]

그 모습은, 마치 아르카네의 반응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대마저, 나를 버리겠다는 것입니까.]

허탈한 듯, 씁쓸한 듯.

나직한 중얼거림에 숨소리 몇 자락이 스쳐 지나가고.

[……모든 징조는 끝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둠은 그 자신의 모든 가식을 상징하던 유골로 지은 가면을 내던지고.

[이로써 내가 이 세상을 향해 가졌던 유일한 미련이 사라진 것이다.]

오직 증오만이 서린 무저갱으로 모든 정령왕을 돌아보며 선언했다.

[균형은 너희가 먼저 깨뜨렸으니, 지금 이 순간부터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너희들은 나를 금제할 권한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 무슨…….]

[아르카네!]

경악과 증오로 얼룩진 정령왕들의 낯을 응시하며, 아르카네는 잔혹한 희열에 젖은 미소를 그렸다.

에시메드마저 사라진 세상은 그에게 있어 더 이상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그 지독하리만치 잔인한 현실을 맞닥뜨린 순간, 근원 깊숙이 뒤흔드는 분노에 괴로워하다 못해 이대로 모든 이지를 놓아 버린 채 미쳐 날뛰고 싶은 광기마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니 모든 것을 끝내 버릴 때였다.

인간. 이 우주에 기생하는 모든 피조물.

그 먼지만도 못한 생명 따위, 전부 말살해 버릴 것이다.

그리하여 온전히 무결해진 세상에서 에시메드를 찾아낼 것이다.

마침내 되돌아간 태초의 그 어둠 속에서, 다시금 살아갈 것이다.

종막을 드리우기를 결심한 어둠은 이전과 비할 수 없이 맹렬한 저주를 세상에 쏟아부었고.

재앙은 알 속에서 깨어나 고요히 박동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