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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34)화 (136/141)

<134화>

* * *

어둠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저주를 내리고 공허로 되돌아갔다.

모든 정령왕은 혼란에 잠겼다.

이 우주에서 가장 오래된 태고의 정령이, 다른 무엇도 아닌 끔찍한 재앙을 예고한 것이다.

이제껏 중립의 시선 아래 사실상 어느 한쪽으로도 온전히 기울지 않은 균형이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 존재하는 모든 이가 알고 있었다.

하나 어둠의 정령왕은 이제 중립의 시선조차 개의치 않고, 오직 파멸만을 위해 사력을 다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진정,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지독한 저주를 쏟아 낸 아르카네가 떠나간 자리를 응시하던 나이아드가 떨리는 음성으로 읊조렸다.

[이그니스, 뭐라도 말 좀 해 보지 그래. 아르카네의 저 작태를 보고도 여전히 가망 없는 평화를 소원하나?]

에리얼이 청아한 낯빛을 분노로 물들인 채, 속이 열화로 타들어 가는 것이 역력히 느껴지는 어조로 이그니스를 향해 빈정거렸다.

[그만.]

어둡게 가라앉은 안색으로 아르카네가 떠나간 자리를 응시하던 이그니스가, 에리얼을 돌아보던 그 순간.

[거대한 재앙이 밀려 들어오고 있다. 이토록 긴박한 때, 서로 간의 분쟁으로 시간을 낭비하려는 건가?]

침묵을 이어 가던 로어가 첨예하게 빛나는 은회안을 들어 에리얼을 응시했다.

[로어……!]

에리얼은 로어의 이름을 나직이 읊으며 턱을 억세게 악물었다.

[맞아. 지금은 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니야. ……한데, 로어. 너는 그리 놀란 기색이 아니어 보이네. 생각해 놓은 방도라도 있는 거야?]

드라이어드가 애써 분위기를 풀려는 듯 입을 열어, 로어를 향해 은근한 어조로 물음을 던졌다.

[유물이 아르카네의 손에 파멸되기 시작했던 때부터…… 구상해 놓은 방도가 있긴 하지.]

로어는 두 눈을 내리감으며 나직이 답했다.

[뭐? 한데 왜, 이제껏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던 거지?]

그러자 곁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오리에드가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 내어 물었다.

[때가 도래하지 않았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묘한 답을 던진 그는, 아르카네가 나타난 이후 정말 드물게도 낯빛을 굳힌 채 침묵하는 일리피아를 주시하며 말했다.

[자아 없는 물체에 근원의 조각을 넣은 것이 패착이었다면, 이번에는 살아 숨 쉬는 생명에게 명운을 맡겨 보는 것이 어떠한가?]

그리고 지혜의 정령왕은 재앙을 막아 낼 새로운 방도를 제시했다.

인간의 육신으로, 불멸의 권능을 품은 존재를 창조하자고.

* * *

“공녀께선 어떠하시지? 진통이 어찌 이토록 오래 이어지는 것인가?”

평화로웠던 그라시아의 별궁은 산실에서 새어 나오는 비명과 분주히 오가는 시녀들로 인해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오직 여인들만이 가득한 그 공간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존재하는 사내.

레제크 드라이어드는 초조함에 얼룩진 낯으로 그 앞을 서성이다 핏물로 젖은 천이 쌓인 소쿠리를 들고 나서는 시녀를 붙잡고 물음을 건넸다.

“의원께서도 영문을 모르시겠다고 하십니다. ……출혈이 너무 심해서, 공녀님과 아기씨께서 무사하시리라 장담조차 할 수 없다고…….”

“안 돼, 마리에…….”

시녀가 난처하게 내놓은 답에 레제크의 안색이 황망함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그의 뇌리에 떠오른 이는, 십여 년 전.

본능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의 품속에서 창백한 낯으로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인생에서 유일무이하게 숭배했던 한 여인이었다.

‘레제크, 나를 막아서지 마세요. 이제부터 내가 아닌 마리에를 온 힘을 다해 지켜 주세요. 물의 유물을 품은 이상, 이제 마리에가 하카드엘라 공국의 후계자이니.’

‘로제,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카드엘라 공국의 후계자는 바로 당신…….’

‘레제크.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 있지 말아요. 현실을 생각해요.’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의 길에 어떤 고난이 펼쳐지든 상관없었다.

오직 당신의 곁에서 함께하고 싶었다.

‘당신과 미래를 함께할 사람은 내가 아닌 마리에니까.’

하지만 그녀가 내린 마지막 명령은 그를 무거운 책임감에 얽매었고.

“……마리에에게, 좀 더 신경을 기울였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레제크는 짙은 후회에 잠겨 힘없이 중얼거렸다.

로제 하카드엘라가 숨을 거둔 이후, 그 가증스러운 칼리드 일카이는 더 이상 레제크와 마리에에게 어떠한 위협도 향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전해 왔다.

레제크는 증오에 몸서리쳤으나 망국의 왕족인 그에게는 니샤의 칼날이 비껴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숨죽여 살아가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그리하여 피눈물을 삼키고, 애끓는 심정으로 마리에를 보살펴 오던 어느 날.

‘레제크 오라버니, 저…… 아이를, 가진 것 같아요.’

마리에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진실로 깨달은 듯 겁에 질린 낯빛으로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세월이 흐르며 소녀에서 여인으로 자란 공녀는 그라시아 왕궁을 지키던 일개 군졸과 사랑에 빠졌다.

하나 그 사내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지체 높은 여인과 깊은 관계를 이어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고, 끝내 작별을 고하며 왕궁을 떠나갔다.

슬픔에 잠긴 마리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찌 그토록 어리석은 선택을 내린 거야! 회임이라니, 그것도 신분조차 불분명한 일개 군졸의 자식을!

‘죄송해요. 오라버니께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레제크는 머리가 아찔해지는 분노에 휩싸여 마리에를 질책했으나,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귀한 하카드엘라 공가의 핏줄이었다.

무사히 태어난다면 앞으로의 대를 이어 갈 유일한 후계자이기도 하였으니.

“……제발, 무사해야 하는데…….”

레제크는 두려움에 잠겨 애타게 되뇌었다.

바로 그 순간, 고통에 잠긴 비명이 산실 바깥으로 새어 나왔고.

“으애애앵-!”

세찬 울음소리와 함께.

“레, 레제크 공! 공녀께서 드디어 해산하셨습니다!”

시녀 한 명이 반색한 얼굴로 산실을 뛰쳐나와 고했다.

“뭐라?”

레제크는 그제야 비로소 숨을 내쉬며 다급히 산실로 뛰어 들어갔다.

“감축드립니다. 공녀께서 어여쁜 따님을 얻으셨어요.”

“마리에……!”

산파가 하얀 포대기에 감싸인 작디작은 아이를 안고서 미소 지은 낯으로 고했으나, 레제크의 시선에는 오직 미약한 숨을 내쉬며 눈조차 뜨지 못하는 마리에만이 존재했다.

“오라버니……. 아이, 아이는…….”

마리에가 바짝 마른 입술을 힘겹게 달싹이며 물었다.

“무사히 태어났다. 아이 말고 너부터 챙기도록 해. ……공녀의 상태는 어떠한가?”

빛을 잃은 은색 안광을 내려다보던 레제크는 안타까움에 잠겨 의원을 향해 물었다.

“……저, 송구하오나…… 공녀께서는,”

“아니, 되었습니다. 제가……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으니.”

불길하게도, 의원이 눈에 띄게 망설이는 기색으로 말문을 열던 그 순간.

마리에의 가냘픈 목소리가 적막이 내려앉은 산실을 채웠다.

“……뭐?”

레제크는 모든 희색이 사라진 낯으로 망연히 물었다.

“오라버니께서도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유물을 육신에 품었던 것을.”

“!”

알다마다, 어찌 그 사실을 잊을 수 있을까.

“설마…….”

레제크는 천천히, 하얀 강보에 싸여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돌아보았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육신에 존재하던 근원의 조각이, 나에게서 아이에게로 흘러갔음을…….”

“마리에.”

“알 수 있었어요.”

그녀가 힘겹게 내뱉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레제크는 단번에 깨달았다.

“……숲의 주인께선 이 일에 어떤 부작용이 존재할지, 당신조차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모든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담담한 음성으로 읊조린 마리에가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이 낳은 딸아이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제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하니, 아이를 한 번이라도 볼 수 있게…….”

흐린 은빛의 눈동자에서 처연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아이를, 내게 다오.”

레제크는 참담한 심경으로 연약한 생명을 안아 들어 마리에가 볼 수 있도록 몸을 굽혔다.

“아가……. 어미는, 네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조차 허락받지 못하였구나.”

쉼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파리한 얼굴을 적시던 마리에는, 곧 오래전 떠나간 자매의 환상을 마주하고 흐리게 미소 지었다.

“어미로써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이름뿐이군요. 부디 제가 이른 대로 아이를 불러 주세요.”

“……약속하마.”

“감사해요. 아, 이제야 언니를 만나러 갈 수 있게 되었어요.”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오고, 가냘픈 속삭임은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읊조렸다.

“아타라.”

바로 왕관이라는 뜻을 품은 그 이름은.

“아타라, 하카드엘라.”

역사에 잠든 망국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물의 근원을 지닌 위대한 대정령사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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