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 * *
어린 왕녀는 굴곡진 산비탈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렸다.
고작해야 열두어 살 즈음 되었을까, 분명 말간 녹음을 품고 순수한 빛을 발했을 소녀의 안광은 절박함과 두려움으로 이지러진 지 오래였다.
“이노!”
질척한 핏물로 흙길을 적시면서도 왕녀를 지키기 위해 곁에서 필사적으로 달리던 장군이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아, 안 돼…….”
어린 왕녀는 그의 갑주를 타고 흘러내린 지 오래인 검붉은 핏물과 깊은 상흔을 바라보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으나 차마 가져다 대지는 못하였다.
“왕녀 전하, 이리 머뭇거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제 안위는 염려치 마십시오, 왕녀 전하의 무탈함이 바로 드라이어스 왕국의 존속과 같으니…….”
“싫어! 이노마저 내 옆에 없는데, 나보고 대체 어떻게 도망치란 말이야? 이노도 분명히 봤잖아, 어둠에서 기어 나온 괴물들이 왕궁까지 침범했던, 그 끔찍한 광경을!”
어린 왕녀가 굵은 눈물을 떨구며 절규하듯 소리쳤다.
“어머님도, 언니들도…… 다 왕궁에 남아 있단 말이야, 한데 왜 나만 도망쳐야 해? 차라리…… 차라리, 어머님과 함께 있고 싶어.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만 살아남는 건……!”
“어리석은 말씀이십니다!”
그 순간, 젊은 여장군이 식은땀으로 젖은 창백한 낯을 분노로 물들이며 왕녀를 향해 일갈했다.
“국왕 전하께서 누누이 이르지 않으셨습니까, 왕녀께선 필생의 근원을 품은 존귀한 몸이시라고! 왕녀 전하께서는 드라이어스 왕국의 정신을 그 심장에 품으셨습니다. 하니 당신께서 목숨을 잃으신다면, 그 순간 드라이어스는 온전히 멸망하는 것과 다름없단 말입니다!”
하나, 어린 왕녀의 눈물로 얼룩진 낯을 바라보며.
종래 그는 슬픔을 억누르는 것이 역력한 기색으로 나직이 말했다.
“하니……. 제발, 저를 두고 어서 도망치십시오.”
어린 왕녀는 서럽게 흐느끼면서도 장군의 말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은 몸을 일으켜 어두운 산길을 나아갔다.
“아타라…….”
도저히 눈물이 멎지를 않아, 기력이 다하다 못해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어린 왕녀는 수풀에 긁혀 쓰라린 뺨을 문질러 닦아 내며 한 해 전 떠나간 소꿉친구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타라! 말도 안 돼, 갑자기 왜 떠나겠다는 거야? 거짓말이지? 응?’
언제나 겁이 많고, 마음이 여려 어머님께 혼나고는 했던 자신과는 달리.
기억하는 순간부터 늘 곁에 함께하던 또래의 소녀는 매사에 차분하고 의연하여, 어찌할 바 없이 질투와 동경심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분명 양가적인 감정에 힘겨워했던 순간도 존재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매와도 같은 소꿉친구를 떠나보내는 일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한데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란 말인가.
레제크 드라이어드 공이 국왕 전하이신 어머님께 그라시아 왕궁을 떠나 타국으로 거처를 옮기겠다는 뜻을 밝혔고.
어머님께서는 그를 수락했다고 한다.
말도 안 돼!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너도 알잖아. 어둠의 정령왕이 재앙을 일으켰고, 그의 추종자들이 대륙 전역에 전쟁의 불씨를 피워대고 있어.’
아타라 하카드엘라, 멸망한 물의 공국의 마지막 후계자인 어린 소녀는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마치 설명하듯 이야기했다.
‘그럼 더더욱 그라시아 왕궁에 있는 게 안전하지!’
‘글쎄. 백부님께서 판단하신 일이고 나는 그분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야속하리만치 냉담한 친구를 향해 원망스레 외쳤건만, 더없이 차분한 답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그에 더욱 마음이 상했다.
‘너무해, 너는…… 정말로, 나랑 헤어지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울먹이며 중얼거리던 순간, 아타라가 조용히 읊조렸다.
‘……시시페아.’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이름이었다.
‘세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해. 사람들은 그걸…… 운명이라고 부르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찬연히 빛나는 은빛 안광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니 소망하자. 부디 우리가 머지않은 날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운명을 향해, 그리 기도하자.’
“……그래서 매일 밤마다 기도했는데. 너를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그렇게…….”
드라이어스의 마지막 왕녀, 시시페아 드라이어드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당장 오늘 밤을 살아 넘길 수 있을지조차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이별한 친구와의 재회란 그저 꿈같은 일일 뿐이었다.
“아타라, 너였다면…….”
그리고 남겨지는 것은 자책이었다.
물의 근원을 품은 아타라와, 숲의 근원을 품은 시시페아.
마치 운명이 짝을 지은 듯 너무나도 닮은 두 아이였으나 상반된 점이 하나 존재하였는데, 바로 아타라는 걸음마를 떼기도 전부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을 다스리고 창조함으로써 자신의 위대한 재능을 드러내 보였고.
시시페아는 열두 살이 되도록 정령사로서의 재능 한 자락조차 보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가족을 구하지도 못하고, 나를 지켜 준 이노조차 버리고 도망쳐 버렸어. ……이런 내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는 거지?”
일개 평범한 정령사만큼의 능력도 지니지 못하였는데, 왜 모두가 나를…….
쐐액-!
“!”
그 순간, 정확히 목표를 노리고 매섭게 날아든 화살촉이 시시페아의 머리칼을 스치고 바로 눈앞의 고목에 박혔다.
“찾았다.”
……단 한 걸음의 차이로, 죽을 수도 있었다.
오싹한 소름이 전신을 뒤덮었다.
시시페아는 금방이라도 살갗을 찢고 나올 듯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을 간신히 내리누른 채 뒤를 돌아보았다.
“드라이어스의 막내 왕녀.”
모든 빛을 잡아먹은 무저갱처럼 새카만 로브 자락이 차가운 바람결에 휘날렸다.
고개를 바짝 쳐들어야 그 눈을 응시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활시위를 쥔 채 우뚝 서 있었다.
한쪽 얼굴은 칼에 베이기라도 한 듯, 끔찍한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의 손목을 휘감은 살아 움직이는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갈라진 동공으로 시시페아를 응시했다.
교전 끝, 그라시아 왕궁에 쳐들어와 무자비하게 학살을 벌이던 아르카네의 추종자 중 하나.
필시 어둠의 정령사일 터였다.
“자, 가라. 고귀한 피와 살점을 마음껏 맛보도록 해.”
그가 비열한 미소를 그리며 잔인한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달빛이 닿지 않아 검은 그림자에 가려졌던 수풀 속에서 여러 형체가 기척을 드러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 아아…….”
시시페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도망칠 방도를 생각하려 애를 썼다.
[캬아악-!]
[크에에엑!]
그러나 조금의 틈도 없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아가리를 벌리며 침을 뚝뚝 흘리는 추악한 괴물의 그림자가 시시페아의 몸 위로 드리워졌다.
어머니……. 어째서, 저를 살리기 위해 그토록 애쓰셨나요?
살기로 번뜩이는 안광을 망연히 올려다보던 시시페아는 생각했다.
차라리 저를 낳지 않으시고, 어머니께서 숲의 근원을 품고 계셨다면.
이토록 허망하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을 텐데…….
사박-
절망에 잠식된 순간, 어딘지 이질적인 기척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괴물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가붓했고…… 서늘한 밤바람에 담겨 온 향은 맑고도 우아했다.
치이이익-
[캬아아악!]
찰나의 이질감에 마음을 빼앗긴 때, 여린 몸을 갈가리 물어뜯을 듯 달려들던 괴물이 돌연 고통스러운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아……!”
집채만 한 몸체가 땅으로 추락했다.
원치 않게 괴물의 낯짝을 코앞에서 마주하게 된 시시페아는 경악에 차 입을 틀어막았다.
그 번뜩이던 눈알이 금빛의 신성한 빛무리에 검은 연기를 흩뿌리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마치, 감히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눈에 담은 죗값을 치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째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늦어서 송구합니다. 상한 곳은 없으신지요?”
고통에 몸부림치는 괴물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시페아는 지척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몸을 떨며 뒤돌아섰다.
“!”
낯선 이의 정체는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제 또래의 소년이었다.
“아…….”
그리고, 소년을 눈에 담은 순간.
밤하늘을 유영하며 달을 가렸던 구름이 거짓말처럼 걷히며 휘황한 월광이 쏟아져 오직 그만을 비추었다.
은빛의 달무리가 후광처럼 감싼 옅은 금빛의 머리칼이 바람결에 우아하게 흩날렸다.
고운 아치형을 그린 눈썹, 티 한 점 없이 맑은 낯빛.
어떠한 결점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인 외양의 소년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평온히 가라앉은 채 생기를 띠고 빛나는 붉은 눈동자뿐이었다.
이그니스가 눈앞의 이 소년만을 특별히 총애하여 친히 창조한 것처럼 성별의 구분조차 그 앞에서는 빛바래 무색해지는.
진실로 현존하는 인간들 중 가장 아름다울 소년이 환상처럼 나타나 시시페아를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감히, 내가 직접 기른 녀석들을 못 쓰게 만들다니……!”
홀린 듯 정체 모를 소년을 바라보던 시시페아는 순간 들려오는 성난 외침에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돌렸으나.
그 소년은 한 점의 동요조차 내보이지 않은 채, 옅은 미소를 그리며 조곤조곤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상황이 급박한 듯하니, 짧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시야가 번쩍이며 밝아졌고.
어둠에 먹혔던 하늘이 순식간에 신성한 금빛의 광휘로 물들었다.
“끄, 끄아아악!”
널브러져 몸부림치던 괴물들과 그것을 부리던 사내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 남자는 땅에 얼굴을 수없이 박으며, 몸을 옹송그려서라도 어떻게든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려 했으나.
빛이 내리쬐는 곳에 그가 몸을 숨길 수 있을 그림자란 존재치 않았고.
“아아아아악-!”
시시페아에게 숨조차 쉬지 못할 만큼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던 아르카네의 신도는 살갗이 타들어 가 벌겋게 벗겨져 가는 얼굴을 들고 비참히 울부짖었다.
“아…….”
시시페아는 황망히, 재가 되어 바스라진 지 오래인 괴물들의 잔해와.
“백야, 아니. 이건…….”
두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음에도 도저히 현실이라 믿을 수가 없는, 밤이 내려앉았던 하늘을 신성한 광휘로 남김없이 밝힌 그 장엄한 광경을 올려다보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저는 드라이어스 왕국을 돕기 위해 로샨 제국에서 출병시킨 원군 소속의 정령사입니다.”
끔찍한 비명이 가득한 밤의 숲속에서 평온한 목소리가 잠잠히 울려 퍼졌다.
시시페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소년을 응시했다.
그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다정한 미소를 그린 채 말했다.
“제게는 과분한 칭호이나 세간에서는 저를 빛의 대정령사라 이르더군요.”
“빛의…….”
대정령사?
녹음을 띤 안광과 붉게 물든 안광이 서로를 마주한 순간, 소년은 가슴 위로 한 손을 올리며 시시페아를 향해 정중히 묵례했다.
“드라이어스의 왕녀 전하를 배알하나이다. 빛의 대정령사, 에제키엘 예레미니아 헤일리안이 전하를 구출하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