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36)화 (138/141)

<136화>

* * *

얼어붙은 바다는 외롭고도 고고하여,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적막감이 흘렀다.

축객령을 내려 어떠한 권속도 자리하지 못하도록 몰아낸 빙황은 차디찬 왕좌에 기대어 앉아 어둑하게 가라앉은 안광을 빛냈다.

죽음이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이라는 명명이 지닌 영원불멸의 관념만이 남겨졌을 뿐.

그를 다스리던 유일한 왕이 떠나갔다고 표현해야겠지.

[……꼭, 그리해야만 했어?]

홀로 남겨진 프린셔는 쓸쓸히 읊조렸다.

그는 대정령사를 창조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늘 그랬듯, 거대한 운명의 흐름에 휩쓸려 자각하지도 못한 새 다른 이의 장기 말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빙황, 프린셔는 태생부터가 그런 존재였다.

자신만의 엄혹한 왕국을 지어, 왕좌에 앉아 세상이 흘러가는 양상을 관망할 뿐.

그 어떤 존재도 그의 자유 의지를 침범하거나 어지럽혀서는 안 되었다.

[……너는,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점 변한 것이 없구나. 고고히 틀어 앉아 그저 관망하기만 한다면 어떤 격랑에도 네가 휩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어리석기는!]

나이아드는 그 안광을 분노로 번뜩이며 거침없이 비난을 쏟아부었다.

[프린셔, 나이아드의 말이 과격하기는 하지만…… 내 생각도 다르지는 않다. 이번 일만큼은, 너도 우리와 뜻을 함께하면 안 되겠나.]

오리에드가 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는 투로 그를 향해 권유하였으나, 프린셔는 끝내 모두를 물리치고 자신의 권역으로 되돌아갔다.

스스로 모든 이를 쳐낸 채 자신의 궁전에 틀어 앉은 동안 바깥의 세상에서는 결국 아르카네가 재앙을 몰고 와 순리가 어그러지고, 끝없는 비탄과 참혹함으로 얼룩져 가고 있었다.

아, 이 모든 고뇌가 다 무슨 소용이랴.

프린셔는 피로감에 눈을 감으며 상념의 굴레를 끊어버렸다.

결국 위대한 지혜의 계획 아래 모든 변수가 정리되어 갈 테고, 하니 그가 나설 필요는 더더욱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는 것은 오직 하나.

이 지루한 불멸의 세월 속, 그의 유일무이한 친우와 다시 만나는 날이었다.

* * *

[뭐?]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 에시메드가 그의 존위를 내버리고 인간의 삶을 택하겠다는 뜻을 밝혔던 때.

[잠시만…….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정령왕으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간으로 태어나겠다니?]

프린셔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소리 내어 묻다,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발 뭐라고 설명을 해 봐!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그저 침묵만을 내뱉는 에시메드를 향해 분노하여 소리쳤다.

[프린셔. 너는 아나? 누구보다도 믿고 따르던 존재의 모순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와…… 미완의 감정을 남겨 두고 흔적도 없이 떠나 버린 어떤 이를 잊을 수가 없어 절망하다…….]

고요히 가라앉은 창백한 벽안이 프린셔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머금었고.

[단 하나, 그 존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냈을 때 나의 심경을 채우는 감정의 이름을…….]

[그래서, 그 인간 하나 만나자고 모든 것을 내던진 뒤 떠나 버리겠다고? ……네 형제가 그 일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아? 당연히 길길이 날뛰며 온갖 난동을 다 피울 것이 자명한데!]

[네가 말하지 않았나.]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이름의 이채가 깃든 친우의 낯을 바라보며 당황에 잠기던 프린셔가 곧 격렬한 어조로 반박했으나.

[내 형제에게 얽매여 살아가는 것은 언제쯤 그만둘 것이냐고.]

[……!]

예상치 못한 에시메드의 말이 그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이제야 결단을 내렸을 뿐이야. 하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자신은 그를 유일한 친우로 여겼으나, 그는 아님을 은연중 알고 있었다.

[부탁한다, 프린셔. ……내가 믿을 수 있는 자는 오직 너뿐이야. 내가 로어의 힘을 빌려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서 숨겨 줘.]

[……하.]

하지만 그토록 무정하던 이가 건넨 진실한 신뢰 앞에서 프린셔는 결국 두 손 들어 패배하고 말았다.

[그래, 알았다. ……내가 너를 어찌 이기겠나. 한데, 에시메드. 너 인간으로 태어난 이후의 일은 생각해 봤어?]

[응?]

서늘한 무표정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더없이 얼빠져 보이는 얼굴을 마주하며, 프린셔는 엄습하는 두통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인간을 다시 만나려면 수십 년 정도 후에 인간으로 태어날 터. 아무리 로어가 너의 정체를 숨기려 한다 해도, 아예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축복을 내리기 위해 너의 영혼에 다른 정령들이 관여하게 될 텐데.]

[아…….]

[아는 무슨 아야! 너의 영혼을 들여다보고도 네 정체를 알지 못할 정령은 없어. 그렇다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비정령사로 살아갈 건가?]

에시메드는 그 부분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양 눈을 살짝 크게 뜨고,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했다.

하, 내가 너 때문에 평안을 못 찾지.

프린셔는 한숨을 토해 내고, 한결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할게. 네 주 속성 정령.]

[……뭐?]

하지만 어쩌겠나.

이런 너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던 것도 나인 것을.

[인간으로 태어날 너의 영혼에 내가 가장 많은 축복을 내려 주겠다고. 부속성들은…… 마땅한 녀석을 찾아보도록 하고.]

침묵이 흐르고, 애써 시선을 돌려 무상한 순간을 흘려보내던 때.

[……고맙다, 프린셔.]

언제나 그랬듯, 느린 답이 돌아왔다.

[알면 갚아. 다음에 다시 만날 때에는 확실하게…… 나를 네 친우로 여겨 주든지. 아무튼, 갚아.]

프린셔는 불퉁한 표정으로 호의의 대가를 청구했다.

[그래. 다음에는…… 반드시.]

그 순간, 창백한 죽음의 낯 위로 작은 미소 한 자락이 스쳤으나.

안타깝게도 프린셔는 그를 보지 못하고, 그저 순간을 흘려보내 버렸다.

* * *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때로부터 아주 먼 옛날.

죽음의 정령왕은 하나의 고뇌에 빠져 있었다.

책무를 성실히 행하던 그는 죽음을 맞이한 인간들의 육신을 직접 찾아 생명을 거둬가고는 했는데, 이러다 보니 원체 무감한 그조차도 조금이나마 거북스럽다는 감정을 느낄 만큼.

볼꼴 못 볼 꼴을 불가피하게 맞닥뜨려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아, 그저 체념하던 때.

에시메드는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혹독한 겨울이 머무는 동토의 얼음과 눈 속에 파묻힌 시체는 생각보다 깔끔하고, 바깥에 방치된 경우보다 부패 속도가 현저히 느리다는 사실을!

[시체 보관에 유용한 권능이로군.]

한결 가벼운 심정으로 책무를 이행하게 된 에시메드는 자연히, 냉기를 다스리는 정령왕과 그의 권속에게 미약하게나마 관심을 품었다.

한편 그 유용한 권능을 다스리는 정령왕은 아르카네와 에시메드, 둘보다는 덜했지만 정령계에서 어울리는 이가 없기로 악명이 드높았다.

그 누가 다가가더라도 차갑게 무시하여 어떠한 답도 기대해서는 안 되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극인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는 프린셔를 공공연히 혐오했으며.

프린셔는 그냥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딱히 친밀한 관계를 쌓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저 이렇게 살아가다 언젠가 다가올 멸망 앞에 스러지면 그만.

[프린셔 님, 죽음의 정령왕께서 권역에 드셨습니다.]

[……그래?]

하지만 참으로 이상하지.

정령계가 갑갑하여 인간 세상으로 나와 북쪽의 영구 동토에 머무르는 때면, 어김없이 발을 들이는 무모한 인간들의 생명을 거둬 가기 위해 정기적으로 그의 권역에 드나들던 죽음의 정령왕에게만은.

어째서 자꾸만 관심이 향했던 것인지.

[…….]

나이아드가 수도 없이 저주하고 증오하던 대상, 아르카네.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잔악한 존재가 그토록 싸고도는 마지막 태고의 정령이라니,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지 않나?

하지만 저자와 어울린다면 또 나이아드가 얼마나 귀찮은 비난을 쏟아내겠는가.

그리하여 수없이 고민하고, 망설이던 끝에.

결국 프린셔는 그 흥미로운 존재에게 다가서기를 선택했다.

[저기…….]

우선 성의를 보이면 한결 대화하기가 편하지 않을까 싶어, 깊은 눈 속에 파묻혀 온전히 보존되었던 나무딸기 몇 알을 손에 담아 쭈뼛쭈뼛 건네며 말을 걸었다.

[얼어붙은 동토에는 나고 자라는 것이 없어서,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인데…….]

그런데, 내가 다른 정령왕에게 먼저 말을 걸어 본 적이 있었던가?

야속하리만치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어째서 죽음의 정령왕에게 말을 건네고 나서야 떠오르는 것인지.

무어라 말을 이어가야 할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아, 입술만 달싹이던 프린셔는 탄생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에 휩싸였다.

바로 그가 이제껏 먼저 다가온 정령왕들을 무시했던 때 그들이 느꼈을 부끄러움과, 무안이었다.

[…….]

역시나.

죽음의 정령왕은 어떠한 반응도 내비치지 않은 채, 그저 추상처럼 굳은 낯으로 프린셔가 내민 새빨간 나무딸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었다.

……실수했다.

프린셔는 고개를 떨구며, 손을 거두고 달아날 생각을 품었으나.

그 후에 벌어진 일은 정말로 예상 밖의 일이었다.

[……어?]

에시메드가 프린셔의 손 위에 올려진 열매를 천천히 집어 입에 넣었다.

프린셔는 무표정한 낯으로 나무딸기를 먹는 에시메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군.]

한동안의 침묵 이후, 에시메드는 프린셔를 똑바로 응시하며 그 말을 남겼다.

[……아?]

그러고는 더 볼 일 없다는 듯 떠나 버린 그의 빈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프린셔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드디어 깨달았고.

[반응을…… 했어.]

에시메드가 무시하지 않고 자신이 건넨 나무딸기를 먹어 주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뻐서.

[여기.]

그날 이후 프린셔는 에시메드가 동토에 남겨진 시신을 찾으러 올 때마다 그에게 나무딸기를 건넸다.

[시다.]

에시메드는 그가 내어주는 것을 다 받아먹으며 언제나 같은 평을 내어놓았다.

그리하여 어딘지 요상한 그들의 친목 관계가 형성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