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 * *
세상을 가르는 중립이자 균형의 수호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하고도 광활한 우주에게는 비밀에 묻어 둔 진명이 존재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는, 태고의 정령을 제외하면…….
[이그니스.]
[아, 로어군요.]
상념에 잠겨 있던 듯, 가라앉은 시선으로 빛의 바깥을 바라보던 이그니스가 낯익은 음성이 들려오자 연한 미소를 머금고 방문객을 돌아보았다.
지혜의 정령왕, 로어가 냉기가 묻어 나오는 눈길로 그를 응시하였다.
[여전히 네 뜻에는 변함이 없나?]
거두절미하고 던져진 물음은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고.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내게 물으시는군요.]
되돌려 줄 답은 언제나 같았다.
이그니스는 천천히 두 눈을 감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둠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니.]
생명의 탄생 이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세월이 흘렀을 때.
[……그래, 그것이 현재의 네가 택한 길이라면 더는 강요하지 않겠다.]
훗날 어둠을 향하여 가장 확실히 대립하게 될 두 정령왕 사이에 오간 마지막 대화였다.
[현재의 내가 택한 길이라니…….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흐르더라도 변치 않을 결심입니다.]
로어가 떠난 후, 홀로 남겨진 이그니스는 빈자리를 내려다보며 쓸쓸히 읊조렸다.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겠지요.]
아름다우나, 이유 모를 공허함이 깃든 광휘를 올려다보며 고요히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와 낯빛에 처연함이 감돌았다.
* * *
정령의 탄생을 이르기를, 태초에 어둠이 존재하였으며 그 뒤를 따라 생명과 죽음의 정령왕이 태어났다고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그 전설이 단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실인지, 알 길은 없으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 또한 존재하였으니.
바로 이그니스가 태고의 정령의 뒤를 이어 최초로 탄생한 정령왕이라는 것이었다.
우주의 유일무이한 빛의 근원에 해당하는 존재이자 아르카네의 절대적인 천적.
스스로 낮은 자를 자처하여 만물을 굽어살피고 소생시키는 그의 자애로운 성정은, 이 우주의 가장 거대한 의지이자 그 자신의 창조주를 지극히 닮아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빛은 우주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어둠을 도무지 증오할 수 없었다.
하나 창조주의 사랑은 어둠에게 있어서 방종으로 변질되었고.
수없는 비극을 탄생시켜, 가엾은 생명들이 괴로이 울부짖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그니스의 심경에도 깊은 슬픔이 자리 잡았다.
어찌하여, 당신은 해소될 길 없는 탐욕과 증오에 눈이 멀어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일까?
[아르카네.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닥쳐라. 내가 왜 너 따위와 말을 섞어야 하지?]
아픈 마음에 그에게 먼저 다가섰으나, 돌아오는 것은 날카로운 적의와 질투뿐.
[……우리를 품은 세상이 가장 사랑하는 이는 바로 당신인데.]
어둠은 우주가 자신을 버리고 빛을 선택했다 믿으며 그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이 맹렬한 증오를 이그니스를 향해 쏟아 냈다.
되돌릴 수 없는 오해를 맞닥뜨리고 이그니스는 더욱 고뇌했다.
이해가 있어야 사랑이 피어날 수 있으며, 오직 사랑만이 모든 분쟁과 증오를 멈추고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하나 어둠은 모든 것을 등진 채 오직 그가 마음을 허락한 이에게만 헌신을 다했다.
주위를 둘러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이 믿는 진실만을 향해 맹렬히 돌진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이그니스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을 바라보며 속만 태우다, 그조차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지쳐 갔다.
마음만 같아서는 저 어리석고도 가여운 어둠에게서 모든 칼을 빼앗고 과오를 되짚을 수 있도록 금제에 몰아넣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힘이, 없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괴로이 읊조리는 그의 말처럼, 최초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우주의 어둠.
태고의 초월적인 권능을, 아무리 상성 상 천적에 해당하는 이그니스가 맞서 싸운다 해도.
결코 승패를 가를 수 없을 것이다.
서로가 회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타격을 입은 채 동귀어진하는 결말만이 남을 뿐…….
하여 이그니스는 두려움을 망각한 것처럼 아르카네를 적대하는 로어의 행보를 야속하게 여겼다.
천고의 지혜는 미래마저 꿰뚫어 본다고 하나, 앞일을 예견한다고 하여 이미 정해진 결과가 달라지겠는가?
설사 교묘한 수를 써 어둠의 숨통을 틀어쥔다 해도…….
[그분께서, 결코 어둠을 잃으려 하실 리가 없겠지.]
이그니스는 자조하며 중얼거렸다.
결론은 단 하나.
승리할 방도는 없다.
위태로우나, 이 귀중한 평화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서는…….
[참고, 인내하는 수밖에 없어.]
그렇게 결심한 이그니스의 낯은 어두운 절망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 자신조차 스스로의 감정을 외면했기에.
어떠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심연으로 흘러가 버렸다.
* * *
[내게 답하라, 이그니스! 정녕 추악한 어둠이 모든 운명을 어그러뜨리는데도 침묵만을 유지할 것인가?!]
[나이아드!]
날카로운 힐난이 비처럼 쏟아지더라도.
[나와, 나오란 말이다! 그 귀한 모습을 내 앞에 드러내! 늘 그랬듯 하등 쓸모없는 연민이라도 건네며 눈물 한 방울 떨구기라도 하란 말이야…….]
마음이 문드러져 더 이상 미소 한 자락조차 지을 수 없어져도.
[진정으로 냉정하군……. 한 번쯤은 나와 줄 만도 하건만.]
인내해야 했다.
그저 관망해야 했다!
[나서 봤자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어, 하니 참아야 해……. 제발.]
모두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권역에 홀로 남을 때면, 이그니스는 고아한 낯을 처절히 일그러뜨린 채 스스로를 향해 수없이 되뇌었다.
‘포기하라고요……. 제 사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시면서, 그저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느 날, 그 인간을 마주하지 않았더라면.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을 갉아먹던 뱀의 독니를 소멸시켜 주신 은혜는 진정으로 감사드리나, 사명을 포기하고 돌아가라는 말씀만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통을 삭이고 그린 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가장된 평온을 두르고 의미 없는 세월을 흘려보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평화를 유지하기보다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택하였지요.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옳은 선택이라고는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인간은 특별했다.
빛의 정령왕을 상대하면서도 주저 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강고한 결의가 서린 눈빛으로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어떤 인간도…… 그를 이와 같은 눈빛으로 보지 않았다.
[아르카네, 뱀은 이 우주가 존재하던 순간부터 살아 있었던 어둠. 그 자체가 태고의 권능인 자입니다. 로어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맞선다 한들, 승리할 수 있는 방도는 없지요.]
‘……그래서. 겁쟁이처럼, 몸을 움츠린 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인가요?’
그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이었던 이유를 들려주자 돌아온 것은 짙은 조소와 경멸이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시선을 받기 위해, 그토록 인내해 온 것이 아니었다.
분명 아니었는데…….
‘탄생 직후부터, 어둠을 몰아낼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권능을 지녔으면서. ……당신이 진작에 로어와 함께 아르카네에게 맞서 싸웠다면, 지금의 현실이 조금이나마 나아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단 한 번도 품어 본 적이 없는 건가요?’
이어지는 힐난을 오롯이 받아 내며, 이그니스는 서서히 동요를 갈무리했다.
늘 받아 오던 분노일 뿐이다.
조금 특별하다 생각했지만, 이 인간도 결국 다를 바는 없었다.
‘……제발, 뭐라도 말해 보라고요…….’
절망의 끝에서 고개를 떨구고 숨죽여 흐느끼는 인간을 향해 ‘균형’에 대한 이야기를 건넸던 것은 순전한 연민과 이유 모를 충동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 인간은 다급히 질문을 쏟아 내다, 유의미한 답을 얻지 못하고 다시금 절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이제 마음을 꺾었을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 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니요.’
그러나, 감았던 눈꺼풀이 천천히 걷어지며.
‘그럴 수는 없어요. 당신의 말마따나, 분쟁 없이는 못 사시는 지혜의 정령왕께서 제가 그분이 내린 사명을 포기하고 홀라당 돌아가 버린 이후 얼마나 혹독한 징벌을 내리실지…….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리거든요.’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찬연한 은빛의 눈동자에서 고요히 타오르는 것은 도무지 꺾을 수 없는 강렬한 의지였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당황에 잠긴 이그니스는 고민 끝에 말했다.
[내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됐어요, 당신 같은 나약한 겁쟁이의 약속 따위 믿고 싶지도 않으니까.’
분명 절망하지 않았던가?
어떤 가망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인데…….
그의 말을 받아치는 어조는 한 점 거리낌 없이 당당했으며, 절망의 기색이라고는 한 줌도 서려 있지 않았다.
‘이그니스, 당신이 분명…… 내가 당신을 본 적이 있었느냐고 말했었지요.’
그리고, 무언가를 궁리하는 듯하던 인간은 차분히 읊조렸다.
‘맞아요. 나는, 내가 살아가던 시간에서 당신을 만났어요.’
절망하고, 순응하며.
그저 인내하던 그의 운명에 거대한 변혁을 몰고 올.
‘그리고 미래의 당신은 나를 알고 있던 것처럼 행동했지요.’
단 한 번의 만남을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