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내가…… 당신을 알고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일까.
이그니스는 미세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그가 상상치 못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저를 축복한 정령은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였지요. 그는 아르카네의 함정에 빠진 저를 구하려다 불미스럽게도 미치광이 인격인 유히리안을 깨워 버렸고, 위태롭던 상황 속 아르카네가 개입하여 저와 오리에드를 과거로 보낸 것이었는데……. 아마도 당신과 제가 마주하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정도 후에 일어날 일일 거예요.’
[유히리안이라……. 그의 존재를 아는 필멸자는 흔치 않은데.]
눈앞의 이자가 거짓을 자아낸다고 판단하기에는, 정령왕을 제외한다면 아는 이가 극히 드문 오리에드의 이면을 알고 있었기에 차마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유히리안을 잠재우고 오리에드를 깨워 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로서는 아르카네의 권능을 깨트리고 본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는 방도가 없었지요. 바로 그때! 당신이 우리의 앞에 홀연히 나타났어요.’
아르카네의 함정에 빠졌던 이자의 앞에, 내가 나타났다고……?
‘당신은 아르카네의 권능이 짙게 감돌아 와 본 것이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요. 이상하리만치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이 아련하고, 애틋하고…….’
이그니스는 자신의 입이 벌어지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멍하니 그의 말을 경청했다.
‘게다가 나를 보며 오랜만에 마주한다고 말하기까지 하셨다니까요?’
[……내가, 당신에게요?]
그 뜻은…….
‘오리에드와 대화를 나눈 이후, 당신은 우리를 원래의 시간대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고는 덧붙이셨죠. 빚이라 여길 필요 없다, 이 일은 내게 새로운 확신이 되어 주었다고. 그렇게요.’
미래의 자신이, 눈앞의 이 인간이 한 이야기를 온전히 믿고 있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의 나는 당신의 말이 품었던 진의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아요.’
따스한 온기가 감돌아야 하였으나 안타까울 만큼 야위고 차갑게 식은 손이 그의 손을 힘주어 붙들었다.
‘바로 오늘의 만남이 당신에게 커다란 의미로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요.’
[……!]
의미.
이 찰나의 만남이, 나의 미래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커다란 의미를 남겼단 말인가?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어째서 확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마치…… 균형의 뜻 아래 모든 비극을 방관하던 당신이 처음으로 기적을 믿게 된 것처럼. 아니, 믿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희망이라도 품게 된 것처럼…….’
기적이라.
그 인간이 그리 말하던 순간, 이그니스는 헛웃음을 토해 내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모두가 찬미하는 위대한 빛을 다스리는 정령왕이면 뭐 하나.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며, 그 어떤 것도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할 수 없었고……. 현실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짓밟힌 지 오래라.
그저 절망을 짊어진 채 살아왔을 뿐이었는데.
‘그러니 결정을 내려 주세요. 당장 지혜의 정령왕과 뜻을 함께해 달라 부탁하는 것이 아니에요. 작은 도움이라도 괜찮으니, 지혜의 사명을 받아 과거로 온 제게 힘을 보태 주세요.’
더없이 아름다우나 지울 수 없는 공허가 깃든 적안이 긴장이 역력한 기색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인간을 제 눈동자에 담았다.
고작, 이 연약한 필멸의 말에.
신념을 꺾고, 반목하던 상대의 뜻이 이뤄지는 것을 도와.
이미 스러져 흔적조차 남지 않은 희망을 되살리기라도 하란 것인가?
[……내가, 당신의 무엇을 믿고?]
그리 생각한 순간, 더는 거짓된 평온을 가장할 수 없었다.
이그니스는 신성함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내던지고 그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던, 부조리하고 또 부조리한 이 세상과 숨이 막힐 정도로 이기적인 창조주를 향한 원망을 만면에 드러낸 채 서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태고 이래, 나는 단 한 번도 균형의 의지를 거스르려 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르카네를 적대하지 않는 것. 모두가 나를 비난함에도 결코 꺾지 않았던 나의 신념이란 말입니다. 한데, 내가 당신의 무엇을 믿고 셀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지켜 왔던 의지를 저버려야 한단 말입니까?]
내가 너의 무엇을 신뢰하고 선택을 감행해야 하지?
이그니스는 당혹감을 드러내는 인간을 거멓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어떠한 증명조차 할 수 없지 않나.
그토록 괴로이 고뇌하면서도 어둠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끝끝내 지켜 왔던 의지를 버리고.
두려운 미래 따위 상관치 않고 모든 헌신을 다할 만큼.
……과연 네가, 나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인간인가?
나의 선택을 가치 없는 헛된 희망으로 전락시키지 않을 자인가?
그렇게, 잔혹하리만치 냉정히 계산을 이어 가던 때.
‘미래에서 당신을 기다릴게요.’
차갑고 가녀린 손이 마치 매달리듯 그의 손을 붙들었고.
그 애처로운 감촉에, 눈앞을 자욱이 가리던 검은 안개가 순식간에 흩어져 비산하는 듯했다.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의 시간이 흐른 미래, 어둠의 권능이 짙게 도사리는 곳. ……그곳에서 어린 날의 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이그니스는 결연하고도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생명을 망연히 응시하며 생각했다.
증명을 갈구했던 것은, 그만큼 스스로를 옭아맨 신념이 고통스러웠기에.
벗어나기를 누구보다도 갈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미칠 듯한 불안에 사로잡혀, 죄 없는 생명을 잔혹하게 몰아세웠으나.
이 강인하고도 순수한 생명은 그저 하나의 약속을 돌려줄 뿐이었다.
선택이 두렵다면, 그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운명이 이끄는 손길을 따라…… 내가 들려준 이야기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그 순간을 마주하고서, 그때 비로소 당신의 결정을 내리라고.
[……증명하라 말씀드렸더니. 돌아오는 것은 기약 없는 맹세뿐이로군요.]
그야말로 사랑스러울 만치 허황된 약속이 아닌가.
이그니스는 허탈하게 웃음 지으며 느리게 읊조렸다.
하나 어째서 외면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어쩌면,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인지도 모르겠다.
필멸이 건넨 약조에 한 번 속아 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무심코 들어 버린 건.
* * *
약속대로 십수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그니스는 손아귀에 남은 유물의 잔해를 매만지며 상념에 잠겼다.
영원의 세월을 살아가는 그에게 있어, 찰나에 달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일이 마치 범람하듯 몰아쳤다.
죽음의 정령왕이 권능만을 남긴 채 자취를 감추었고, 아르카네는 그에 진노하여 세상을 향해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증오를 터뜨렸다.
로어의 계책 아래 이그니스를 비롯한 정령왕들은 다시 한번 근원을 조각내어 아르카네를 금제에 몰아넣을 ‘무기’를 창조했다.
[…….]
스스로를 미래에서 왔다 이야기했던 그 인간은, 이 모든 일들을 알고 있었을까.
하면 로어 또한…….
[!]
가라앉은 심경으로 생각을 이어 가던 그 순간.
검은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며, 평온히 빛나던 붉은 안광이 요동치듯 흔들렸다.
[설마…….]
왕좌에서 천천히 일어선 이그니스는 허공을 황망히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아르카네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랐다.
무언가, 기묘하게 뒤틀린 듯한 이 권능은…….
[시간 역행……?]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거짓말처럼 한 목소리가 떠올라 환청처럼 귓가에 메아리쳤다.
‘다행히도 유히리안을 잠재우고 오리에드를 깨워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로서는 아르카네의 권능을 깨트리고 본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는 방도가 없었지요. 바로 그때! 당신이 우리의 앞에 홀연히 나타났어요.’
이그니스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약속의 때가, 바로 지금 다가오고 있음을.
* * *
그 흔적을 쫓아 당도한 곳은 거대한 산맥에 둘러싸인 평야였다.
곳곳의 지반은 엉망으로 헤집어진 채였고, 아르카네의 권속들이 처참한 몰골로 죽음을 맞이하여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
그곳에 그가 있었다.
“저기……. 마인하르트.”
“말씀하십시오.”
“우리, 어떻게 돌아가요?”
그 곁에 오리에드가 함께하였고, 아스트라페의 축복을 받은 사내가 그 아이를 안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봉착한 문제에 대해 논의하느라 이그니스의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런. 아주 난장을 쳐 놓으셨군요.]
떨림이란 감정을 느껴 본 지가, 그 언제였던가?
이그니스는 심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쓰며 부러 평온을 가장하고 읊조렸다.
그에 소스라치게 놀란 듯 작은 몸체가 크게 흔들렸고.
연한 라벤더색 머리칼이 흩날리며, 총기로 빛나는 어여쁜 아이의 낯이 그를 돌아보았다.
마치 거울에 비친 것과 같이 서로를 닮은 붉은 안광이 마주쳤다.
‘미래에서 당신을 기다릴게요.’
커다란 눈망울을 동그랗게 뜬 채, 조그마한 입을 벌리며 놀란 기색으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이는.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의 시간이 흐른 미래, 어둠의 권능이 짙게 도사리는 곳. ……그곳에서 어린 날의 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영혼을 두른 육신이 달라지고, 기억조차 사라졌다 해도.
이그니스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