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39)화 (141/141)

<139화>

약속은 진실이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이그니스는 무어라 정의할 수 없이 벅차오르는 감회에 잠겨, 망연한 빛을 띠고 그를 바라보는 한 쌍의 적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시간을 넘어 이루어진 약속을 맹세한 필멸자는 까마득히 먼 옛날, 그가 축복했던 일족의 후예이기도 했다.

이 모든 기적 같은 우연이 모여 탄생한 그 순간.

이그니스는 연약한 육신에게 버겁도록 강대한 물의 근원을 품고서도 더없이 꿋꿋하게 살아 현존하며 생명을 불태우는, 이 세상에 있어 그의 모든 명운을 걸고서라도 신뢰할.

유일무이한 소녀를 향해 영원한 사랑을 말없이 맹세했다.

[너는…… 이그니스?]

[오랜만에 마주하는군요. 오리에드. 그리고…… 당신 또한.]

마찬가지로 이그니스의 등장에 놀란 듯 침묵하던 오리에드가 말을 걸어왔고 이그니스는 온화한 미소를 그린 채 그의 물음에 화답하며, 그 소녀를 돌아보았다.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던 소녀는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은 듯 멍한 낯빛으로 이그니스를 응시했다.

[네가 이곳엔 어떻게…….]

[아르카네의 기운이 유난히도 짙게 느껴져 와 보았습니다. 한데 이런 광경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하였군요.]

이그니스는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볍게 저었다.

[당신들을 이 시간에 붙들어 놓은 힘은 아르카네의 권능인 듯하니……. 제가 무력화시키도록 하지요. 그럼 곧바로 본래의 시간대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맙다. 이 빚은 후일 갚도록 하지.]

빚이라.

이그니스는 다시금 그의 소녀를 돌아보며 나직이 읊조리듯 이야기했다.

[빚이라니요. 이 일은 제게 새로운 확신이 되어 주었으니…….]

처음으로, 변화를 향한 희망을 마주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무언가, 족쇄와도 같은 숙명을 깨뜨릴 거대한 변화가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유일한 희망.

이그니스는 애틋함을 품은 눈길로 그 소녀를 바라보며 그저 소원했다.

[부디 그대들의 앞날에 빛의 가호가 깃들기를.]

태고의 광휘가 내린 금빛 장막에 휩싸여 서서히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그니스는, 마침내 모두가 본래의 시간으로 떠나간 후.

한차례 불어오는 바람결에 후련히 미소를 그리며 속삭였다.

[기다리겠습니다. 당신과 온전히 같은 시간 속에서 마주할 수 있을 그 날을.]

머지않은 날, 분명 다가올 재회를 그리며.

* * *

검은 일색의 궁정에 미온한 볕이 스며들었다.

“……아.”

긴 공무를 끝내고 비로소 고개를 든 국왕은 낮게 침음하며, 앙상히 마른 가지에 차디찬 바람이 불어 드는.

그 쓸쓸함이 깃든 아스라한 정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전하. 무엇을 그리 생각하십니까.”

국왕의 곁을 지키던 보좌관이 침묵을 깨고 조용히 물었다.

“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군. 예전이었더라면 심상에 남지도 않았을 흔한 광경에, 이토록 허망한 상념이 드는 것을 보면.”

씁쓸한 자조가 깃든 음성으로 답한 그가 천천히 곁을 돌아보았다.

“이르마크.”

“……전하께서는 아직 한창때의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긴 세월이 흘러, 칼날조차 꿰뚫지 못할 만큼 강고한 기세가 흐르던 왕제의 부관은 마모된 육신에 더 이상 전성기와 같이 전투에 임할 수 없어지자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준 뒤 관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듣기 좋은 말을 해 주는구나.”

그리고 이르마크가 평생을 바쳐 모신 주군 또한, 검은 머리카락 곳곳이 희게 센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어.

“전하께서는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사실 겁니다.”

종종 회한이 깃든 시선으로 과거를 향한 상념에 빠지는 때가 잦아졌고.

이르마크는 언제나 곧은 등을 보이며 모든 고난을 향해 앞서가던 주군의 약해진 모습이 못내 서러워 애써 고집스럽게 말하곤 했다.

당신께서는 젊은 날과 한 점 다를 바 없이, 위대하고 강인하신 나의 주군이시라고.

칼리드는 그런 부관의 마음을 다 이해하고 말없이 미소 지었다.

“글쎄. 노환에 시달리는 국왕이 권좌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젊고 영명한 후계자에게 하루빨리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낫지 않겠나.”

“전하.”

“농이다. 말 한마디에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구는 네 면모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구나.”

칼리드는 정색하며 그를 부르는 이르마크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자. 회담이 열리는 시간을 맞추려면 지금쯤 떠나야 해.”

“……이곳에 계십시오. 제가 준비해 놓으라 이르겠습니다.”

“그래.”

이르마크는 절도 서린 움직임으로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린 뒤 집무실을 나섰다.

“……세월이, 참으로 많이 흘렀어.”

오늘따라 어찌 이토록 회한이 스미는 것인지 모르겠다.

홀로 남은 칼리드는 창가를 통과하여 내리쬐는 볕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 * *

찬탈 이후, 아무리 인망이 드높았던 일카이의 왕제라 해도 오랜 전통을 깨뜨리고 왕좌를 빼앗은 그의 행태는 결코 온당치 못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니샤 왕국의 곳곳에서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다행히도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작게나마 산재하는 반란을 억제하는 데 있어 칼리드는 많은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민심을 다스리고, 군권을 적절한 이에게 배분하며 쉴새 없이 달려온 끝에.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서야 비로소 일카이 왕조의 통치가 안정되었다.

‘…….’

가장 필사적이었던 목표를 달성한 때, 억지로 묻어 두었던 기억이 공허한 만족을 뚫고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어제처럼 생생한 순간의 기억.

‘칼리드, 당신이 유물의 잔해를 보관해 주었으면 해요.’

그의 삶을 이곳까지 이끌었다 칭해도 과언이 아닐 여인은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칼리드는 그녀의 허상을 향해 다시 한번 약속했다.

당신이 내게 맡긴 유물의 잔해를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감사해요. 그럼, 저는 이제…… 가족에게 돌아갈 생각이에요.’

하지만 약속을 건넨 이후 돌아오는 것은 영원한 이별이었다.

그가 죄책감에 잠겨 그녀의 눈을 피했기에, 그리 이야기한 후 그녀가 지었던 표정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혹여 생각하곤 한다.

당신은, 당신이 가족에게 돌아간 직후 숨을 거두리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을까?

만약 알고 있었다면…….

‘하카드엘라는 이미 멸망했지요. 이제 와 후회한다 해도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어요.’

대체, 어떤 참담한 심정으로 그런 이야기를 건넸을지.

그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하니 진정으로 속죄하길 원하신다면,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당신의 민족과 나라가 옳지 못한 길을 걷지 않도록.’

차라리 그녀가 목소리를 잃기를 바랐다.

어떠한 말도 이어지지 않은 채, 그 순간에 박제되어.

다가올 죽음과 벗어날 길 없는 죄를 맞닥뜨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밤을 밝히는 달처럼, 모두를 비추는 군주가 되어 이 니샤를 이끌어 주세요.’

하지만 죽은 자의 창백한 목소리가 그를 이 나라와, 이 삶에 옭아매었고.

‘……제 모든 생애를 걸고, 약조하겠습니다.’

일족의 발아래 짓밟혀 죽어 갔던 수많은 이들을 상징하는 것과 다름없는 여인의 청을 이루어야만, 비로소 온전히 속죄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약조하겠습니다…….’

칼리드는 거멓게 죽은 눈으로 먹먹한 밤에 잠긴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약조했다.

그녀의 부탁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이생의 숨이 다하는 날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니샤가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바른 기틀을 완성하겠다고…….

‘전하, 전하!’

‘……무슨 일이지?’

그러나 칼리드가 비로소 온전한 그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되었던 그 시기.

‘크, 큰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드라이어스 국경 인근 지대에서……!’

이 우주의 어둠이 수만 년 동안 품어 온 고독을 세상에 터뜨리며.

‘어둠의 정령사와 아르카네를 따르는 신도들이, 전쟁을 선포하였다고 합니다!’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재앙이 시작되었다.

* * *

정령왕의 축복을 받은 국가들은 차라리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비교적 역사가 짧고, 세가 약했던 나라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지옥에 산 채로 떨어져.

고통에 절규하다, 어둠이 뱉어 낸 괴물에게 모든 것을 잡아먹혔다.

‘비록 전 왕조의 모든 일족이 유폐되었다고는 하나, 니샤는 건국 이래 단 한 순간도 아르카네를 숭배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지. 한데 우리가 대체 당신들의 무엇을 믿고 연합에 들여야 한단 말이오?’

당대의 아르카네는 어딘지 이상했다.

본래대로였다면 니샤를 칼날로 휘둘러 일을 시작하였을 것 일진데, 어떠한 계시조차 없이 다른 패를 이용하여 세상에 재앙을 선포한 것이다.

진정으로 기이한 일이었으나, 니샤에 미치는 피해가 없다고 하여 세상이 죽음으로 물들어가는 참극을 그저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결코.

‘……어둠의 정령사만이 정신 조작 권능에 해를 입지 않습니다. 바로 직전까지 눈물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싸우던 전우가, 그림자에 조종당하는 병기로 전락해 서로를 베고 참살해야 하는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니샤의 참전은 커다란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칼리드는 직접 연합국들을 방문하여 온 힘을 다해 설득했다.

감당할 수 없이 거대한 재앙이 범람해 오는 이때, 과거는 잠시 묻고 서로 힘을 합쳐 항전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우리는, 그대들의 일족에게 당한 것이 매우 많지.’

그러나 오랜 적대 관계에 놓여 있던 타국의 수장들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대의 말이 맞소. 어둠 속성을 지닌 거의 모든 정령사들이 날뛰는 판국에서, 니샤의 정령사만은 살육에 가담하지 않았으니. 그대들 또한 이 젊은 국왕의 말을 믿어 보는 것이 어떠하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도 칼리드의 청을 수용해 준 유일한 이는 바로, 오래전 그가 저열하게 협박하고 몰아세웠던 드라이어스의 국왕.

알키페였다.

그의 시선을 마주하던 칼리드는 참담함에 자조하며 고개를 숙였다.

과거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이토록 추악했던 자신의 허물을 맞닥뜨려야만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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