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힉!’
그제야 놀란 나는 엉덩방아를 크게 찧으며 반사적으로 두 눈을 감아버렸다.
‘미, 미쳤어! 미쳤…… 이거 꿈 아니잖아!’
화들짝 놀란 난 벌벌 떨며 닥쳐올 충격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 조그만 몸은 갈가리 찢기지 않고 멀쩡했다.
‘뭐, 뭐지?’
혹시 커다란 입이 눈앞에 있을까 싶어 바들바들 실눈을 떠본 나는 기대하지 않은 상황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꽃?’
나와 단테의 사이에 꽃으로 이뤄진 장벽이 존재했다.
내가 무심코 바닥을 짚은 부분부터 시작해 줄기가 돋아나더니 꽃이 무더기로 피어난 것이다.
종류도, 색도 통일되지 않은 수백 송이의 꽃이 견고하게 나를 지켰다. 동시에 형형색색으로 만발한 꽃들은 단테를 향해 달콤한 향기를 뿜어냈다.
“…….”
툭.
이지가 완전히 사라졌던 동공이 점점 돌아오는 게 보였다. 어쩌면 마지막에 단테가 나를 알아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으악!’
비틀거리던 거대한 덩치의 검치호가 쓰러지자 나는 그 밑에 깔리지 않기 위해 얼른 도망쳐서 수풀로 뛰어들었다.
요새 잘 먹어서 통통해진 엉덩이가 가지 사이에 끼는 바람에 볼썽사납게 바동거려야 했지만 뒤에서 폼폼이 밀어준 덕분에 간신히 대재앙을 피할 수는 있었다.
‘헉, 허억! 어떡해. 내 꽃향기를 맡고 진정한 건가? 죽은 건 아니겠지? 그냥 잠든 거겠지?’
숨을 몰아쉬던 나는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어 철퍼덕 주저앉았다.
‘대체 단테는 언제부터 저랬던 거야? 괜찮은 거 맞나? 가문에 데려가서 상태를 살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그 전에…… 사관 학교는 정말 단테의 상태가 저런 걸 몰랐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이상하면 알렸어야 하는 거 아냐?
무엇보다 저 모습은 조금 이상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하, 이 새끼 또 이러네.”
“아주 돌아버리겠어. 저놈 때문에 다친 사람이 대체 몇인지, 원.”
내 꽃! 어쩌지, 어쩌지!
수풀 사이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크게 당황했지만 일단 커다란 바위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헌데 놀랍게도 하인들이 당도하기 전, 내 꽃이 빛 가루가 되어 바람결에 사락사락 사라졌다.
“엥, 오늘은 알아서 쓰러져 있는 거 같은데?”
“뭐? 진정제 놓을 필요 없어?”
“엉. 다행이지 뭐. 얼른 옮기자고.”
달이 밝은 날이라 모여든 하인들의 얼굴이 잘 보였다.
그중엔 친절하게 내 옷을 옷장에 걸어준 사람도 있었고, 지나가면서 꾸벅 인사를 한 사람도 있었고…… 연무장을 열심히 정리하던 사람도 있었다.
“독방에서 꺼내놨더니 어김없이 귀찮게 구는구만.”
“야, 잘 모셔야지. 수억대 기부금을 내주시는 미친 꼬맹이인데!”
“아, 그건 그렇지.”
지금 저기서 낄낄거리는 하인들과 내가 낮에 본 하인들이 같은 사람인가?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아서 입을 떡 벌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실히 알겠네. 여기서 들키면 나, 진짜 큰일 나는 거야.’
조심스레 폼폼을 가져와 꼭 껴안은 나는 그들이 단테를 들것에 싣고 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발소리가 충분히 멀어졌다 싶은 다음에야 아주 조심스레 수풀에서 빠져나온 나는 높은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저기 있다!’
흔히 있었던 일이라는 듯 하인들은 주변을 딱히 경계하지도 않았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끔 조심하며 뒤따라간 나는 그들이 단테를 낡은 탑 같은 곳으로 데려가는 것까지만 확인했다.
‘누가 봐도 기숙사가 아닌 곳인데…… 저기다 애를 재운다고?’
심지어 지금까지 쭉 그랬어?
기부금 때문에?
‘와.’
이건 또 새롭게 열 받네.
조심조심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동이 트고서야 겨우 분을 삭인 나는 이성적인 결론을 내렸다.
‘이건 이미 내가 해결할 만한 사안이 아니야.’
그럼 올바른 어린이의 사건 해결 방법은 무엇이지요?
‘보다 센 권력자에게 일러바치기!’
아까 폼폼이 나랑 같이 모든 걸 다 봤거든.
‘두고 보자.’
나는 이를 갈며 간신히 눈을 붙였다. 키락서스가 이렇게 보고 싶기는 또 처음이었다.
* * *
다음 날, 힘겹게 눈을 뜬 나는 어제 고민이었던 내용에 몇 가지를 추가해서 할 일 목록을 만들었다.
‘혹시 사관 학교에서 뭔가를 해서 그런 건지 확인해 볼 것.’
‘일단 6번부터.’
입맛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나는 아침 식사로 나온 오트밀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그냥 그릇째로 밀어놓았다.
‘난 분명 원작을 잘 기억하고 있어.’
그대로 읊으라면 읊을 수도 있을 만큼 상세히 기억하는 장면들이 많다. 그러니까 아마…… 내 추론은…….
‘라흰은 자연스럽게 드리블랴네 가문에 존재하게 해달라고 빌었어.’
즉, 남자주인공을 구원한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은 일’인 거다.
그런 건 한 적 없지만 그저 소원으로 신이 이뤄준 거야. 마치 라흰이 그들을 구원해서, 드리블랴네에 있는 게 마땅한 것처럼 만든 거지.
‘그럼 그건 사기고 기만이잖아.’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켠 나는 빈 컵을 탕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마음에 안 들어. 그게 무슨 여자주인공이야?’
사기꾼이지!
혼자 씩씩거리던 나는 존이 멍하니 보고 있는 걸 깨닫곤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아하하.”
“큼,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음, 그게…… 존. 어제 내가 밖에 나간 거 알았어?”
“예에에에?!”
역시 몰랐구나.
내가 대체 무슨 재주가 있어서 존의 기감을 속이고 바깥에 나간 걸까?
“밤에 어딜 혼자 나갔다고?”
그때였다. 허공에 빛이 휙 일더니 찬란한 후광을 지닌 미남이 등장했다.
‘와. 갑자기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나타나신다고?’
살롱에서 밤을 새고 오기라도 한 건지 아침치고는 화려한 꾸밈새였다.
각이 잡혀 있는 새카만 바지에 흰 바탕에 검은 실로 모란이 수 놓인 재킷을 걸친 아버님은 정말이지 눈 뜬 채로 기절할 수도 있을 만큼 잘생겼다.
‘나타나자마자 시선을 확 잡아끄는 건 물론이고 공간을 제 것으로 만드는 능력은 타고나야 하는 거겠지?’
몇 초 정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보던 나는 내 코를 톡 치는 손길에 간신히 나간 넋을 되찾아 왔다.
“집 나가면 고생인데 가출하면 못쓴다.”
“가출 아니거든요! 그보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아직 연락도 못 드렸는데!”
“네가 잘하고 있나 확인차 온 거다. 헌데…… 존. 플로린이 나가는 걸 정말로 눈치채지 못했나?”
아버님이 우아하게 손짓을 하자 내 몸이 둥실 떠올라 거실의 소파에 착 내려앉았다.
허둥지둥 내 곁으로 다가온 존은 뻣뻣해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전혀 몰랐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존, 혼내지 말아요! 이상한 일이 있었단 말이에요.”
“이상한 일이라.”
“제가 나가려고 나간 게 아니라 사실은요…….”
나는 폼폼까지 동원해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아버님이 늦게 오시면 어쩌나 했는데 행사가 시작하기 전에 오셔서 다행이야.
“……그래서 제 생각에는요, 사관 학교에서 단테의 상태를 알고 숨긴 지 오래된 것 같아요.”
“후원금이 끊길까 두려웠겠지. 단테가 사관 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가주께서 후원금을 다섯 배가량 늘리셨다.”
“아하……. 역시 돈 문제였구나.”
그 후원금, 잘 봐달라고 낸 거지 그렇게 귀신 나올 것 같은 건물에 혼자 가둬놓으라고 낸 게 아닐 텐데요.
“고생했다. 눈썰미가 좋구나.”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아버님이 내게 불쑥 칭찬을 던졌다.
“단테가 이성을 잃고 덤벼들어서 무서웠을 텐데.”
“헤헤, 괜찮아요. 제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단테는 아픈 거잖아요. 이해해요.”
푸욱.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아버님이 내 머리를 꾹 누르며 쓰다듬었다.
“이제부터는 어른이 할 일이니 아이는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걱정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