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46화 (46/166)

46화

“꺼져.”

그를 찾아와 훈련을 구경한 그 애에게 그렇게 못된 말을 한 건 자신이 위험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발작을 일으키는 주기가 짧아졌다.

언제 낮에도 짐승이 될지 모르는데, 가까이 오지 마. 저리 가.

너만 보면 가슴이 이상하게 뛰니까. 저리 가!

하지만 꿈에서 갑자기 현실로 튀어나온 소녀는 어젯밤, 짐승 모습이 되어버린 그를 찾아왔다. 마찬가지로 새하얗고 작은 담비가 되어서.

‘게다가 나를 치유해 주기까지 했어.’

그 애에게서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 같은 향기가 났다.

몽롱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그는 자제력을 잃고 그 애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물거품이 나를 덮쳤고, 또 꽃이 피어나서…….’

이성이 돌아왔다.

그게 그 애의 힘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꿈속에서도 그 애는 몇 번이고 그를 구했으니까.

어른이 된 그는 그 애 없이는 살지 못했다.

‘아, 가슴이 아파.’

쿵. 쿵. 쿵.

지금도 심장이 숨 가쁘게 뛰어서. 제 심장이 아닌 것 같아서.

어른의 그가 가졌던 감정이 어린 몸에 그대로 내리꽂히는 바람에-

멈춰 선 단테는 어쩔 줄 몰라 귀를 발갛게 붉히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것 외에는 무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근데 그 애는 나를 처음 보는 것처럼 굴었어.’

게다가 빅토르 선배를 빤히 보기까지…….

쾅.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있어야 할 버려진 탑에 돌아온 단테는 저도 모르게 벽을 내리쳤다.

건물을 통째로 뒤흔드는 충격에 머리 위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걸 뒤집어쓴 단테는 얼굴을 박박 닦아내며 지하로 내려갔다.

그 애가 집에 돌아갈 때까지 여기서 나가지 않을 셈이었다. 이번엔 그 애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제발 오늘 밤은 무사히 넘어가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는데.

“안녕, 단테! 나 왔어!”

사위가 어두워지고 세상이 고요해지자 갑작스레 나타난 소녀는 남의 타들어가는 속도 모르고 말갛게 웃었다.

“크르르르.”

그러나 어김없이 동물화를 해버린 단테가 낼 수 있는 건 위협적인 울음. 그것뿐이었다.

* * *

‘음, 역시 경계가 심하네.’

밤이 되자 아버님은 나를 낡은 탑에 데려다주셨다.

그런 다음, 아버님은 존과 함께 ‘어른의 사정’을 해결하러 가셨는데 나는 그동안 여기서 단테와 함께 있어야 했다.

‘아, 폼폼도 같이 있지. 참.’

무슨 일 생기면 폼폼에 대고 냅다 소리를 지르라고 하셨으니까.

게다가 지하로 내려가기 전에 보호 마법을 걸어주셨기에 난 정말 단테가 하나도 안 무서웠다.

“저녁은 먹었어?”

“크르륵.”

“못 먹었어? 있지, 밥을 제때 안 먹으면 까칠해져. 그래서 쨔잔! 내가 간식을 가져왔단 말씀!”

내가 챙겨온 건 오늘 저녁 식사에 나왔던 머랭 쿠키였다.

입에 넣으면 파사삭 부서지니까 이빨이 다칠 염려도 없고, 향긋하게 퍼지는 단맛에 엄청나게 행복해지는 디저트야.

침이 꼴딱꼴딱 넘어갔지만 단테에게 주려고 한 개도 안 먹고 손수건에 잘 싸서 가져왔다.

“이거 하나 먹어봐.”

“크륵!”

“옳지.”

단테가 화를 내려는 듯 목을 긁었으나 나는 입이 살짝 벌어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머랭 쿠키를 쏙 집어넣어 버렸다.

이안이 봤으면 위험하게 무슨 짓이냐고 했을 것 같지만……. 아, 어쩐지 돌봐줘야 할 거 같단 말이지.

“거 봐. 맛있지?”

“…….”

단테는 잠시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난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바닥에 슬쩍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어제 심하게 다쳐있던 단테의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어? 너, 어제 그 상처가 다 나았어! 어떻게 된 일이야? 따로 치료를 받았어?”

그런데 분명 그렇게 심했던 상처가 씻은 듯 나아 있었다.

아버님이 마법으로 치료를 해주셨나? 하긴,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게 행사에 참석했겠지?

“아, 지금은 대답을 못하겠구나. 나중에 알려줘.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이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고 보니 단테가 있는 곳은 방도 아니었다.

아버님은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셨는데, 당연히 위로 올라갈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단테가 있는 곳은 지하였다.

춥고, 더럽고, 딱딱한 지하의 감옥. 드리블랴네의 후계자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환경이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단테는 대답할 수 없지만 나는 꿋꿋하게 말을 걸었다.

“어리다고 무시한 거야. 가문에서 사람이 올 때만 어떻게든 잘 감추면 될 줄 알았겠지.”

이가 갈린다.

폐쇄된 환경. 돌아가신 부모님. 갑작스러운 폭주 현상.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어떤 아이들은 부모님의 죽음을 경험하면 실어증에 걸리기도 한다. 그 정도로 끔찍한 충격이다.

아마 단테는 정신적으로 많이 몰려 있는 상태겠지.

이런 대우를 받아도 제대로 항의하지 못하도록, 어쩌면 선생이란 자들이 나서서 단테를 가스라이팅했을 지도 모르겠다.

네가 피해를 주니까 이런 대우를 받는 거라면서.

하인들의 꼴을 보니 충분히 그랬을 것 같은데.

“어제 내가 만든 꽃 향기를 맡으니까 정신이 좀 돌아왔잖아. 그래서 오늘도 네게 꽃을 주려고 해. 신기한 거 보여줄까?”

단테에게 머랭 쿠키를 또 내밀었지만 단테는 입을 닫은 채 결코 벌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까웠지만 남은 머랭 쿠키를 바닥에 뿌렸다. 그런 다음 그 위에 두 손을 얹고 눈을 꼭 감았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을 피워내게 해줘.’

엄청 달콤한 디저트를 대가로 꽃을 연성하는 거니까 아주 아름다운 게 피어나지 않을까?

“쨔잔, 이거 봐! 내가 주는 꽃다발이야!”

그리고 잠시 뒤. 나는 환한 표정으로 단테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해바라기 씨에서는 해바라기가 나오더니 머랭 쿠키에선 연분홍색 라넌큘러스가 피어나네!’

신기하다. 저택에 돌아가면 이것저것으로 실험해 봐야지.

비록 단테는 흑범의 모습으로도 알 수 있으리만치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라넌큘러스 다발이 마음에 들었다.

“향기 좀 맡아볼래? 내 꽃이 네게 도움이 될 거래.”

“…….”

“참, 내 이름은 플로린이야. 알고 있어?”

지하 감옥에는 천장 가까이에 아주 작은 창문이 뚫려 있었다.

하루 종일 흐린 날씨였는데 이제 개려는 모양인지 그 사이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달빛을 받아 반질반질 윤이 나는 흑범의 털을 보며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

단테는 아리아드네 님의 둘째 아들이자 동시에 좋은 신분의 아버지를 둔 귀족 중의 귀족이었다.

원작에서 단테를 묘사할 때 몇 번이고 ‘태생이 좋다’라거나 ‘신분적으로 완벽하다’고 했었거든.

‘그래서 그런지 동물 모습인데도 몹시 존귀해 보여.’

잘은 모르겠지만 단테에게는 기품이 있었다.

‘게다가 눈동자.’

눈동자가 행성 같아서 그런가…… 빨려들 것만 같다.

이안의 눈은 금빛 달 같은데 단테는 행성 같아.

“있잖아, 단테. 세상에 봄이 왔대. 여기 있지 말고 나랑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래?”

어느새 얌전해진 단테가 앞발 사이에 묻고 있던 눈을 들어 나를 힐끔 보았다. 봄이 왔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는 투여서 나는 쿡쿡 웃었다.

“그야 봄이 왔으니까 피크닉도 가고 호수에서 뱃놀이도 할 수 있잖아. 넌 폭주를 일으킬 만큼 이미 너무 강해서…… 여기서 더 배울 게 없을 거야.”

지나치게 뛰어난 아이는 그냥 집에서 좋은 선생을 붙여 1:1 과외를 받는 게 낫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솔직히 드리블랴네에, 정확히는 내 주변에야 알파가 넘쳐나지만 보통 사람들 기준으로는 ‘알파’는 평생 가도 못 만날 신화 속 존재 같은 거였다.

사람의 악의에 대해 잘 아는 나는 솔직히 단테를 이 꼴로 방치해 둔 이유 속에 질투가 없었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알파지만 아직 어린애.

얼마나 짓밟기 쉬웠을까. 아니, 짓밟고 싶었을까.

‘이참에 어린 싹을 꺾어내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나, 아이다호 가문의 양녀가 되었거든. 아이다호 후작가말이야. 그리고 기사단장이신 아이다호 경이 지금 저택에 와 있어. 양어머니께 배우면 될 거야.”

원작에는 양어머니가 등장하지 않았다. 이건 내가 며느리가 되어서 원작이 비틀린 부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기사단장 아이다호 경’이 저택에 돌아온 게 비단 내게만 좋은 일은 아닌 듯했다.

“알파고, 노련한 기사시니까 배울 게 많을 거야.”

기사단장이라는 위치가 얼마나 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관 학교에 있는 교관보다야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뛰어나지 않을까?

아리아드네 님이 살아 계실 적에는 단테가 발군의 재능을 갖추었다고 한들, 일단 가르침을 받기에 너무 어렸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다호 경은 아리아드네 님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아야 했으니 전쟁터에 계속 있었을 테고…….

뛰어난 기사는 다 전쟁터로 내몰렸던 시절이니까 단테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관 학교에 넣은 거야. 사관 학교에 입학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영예로운 일이기도 하고.

‘그런데 아들이 1년씩 성장하면서 폭주를 일으킬 만큼 강해질 줄은 몰랐던 거지.’

나는 슬그머니 상체를 기울여 단테에게 살짝 다가갔다.

“나랑 같이 집에 가면 혹시 폭주할 것 같더라도 안심할 수 있어. 내가 늘 꽃을 만들어주면 되니까!”

만약 안 간다고 버텨도 아버님이 억지로 끌고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래도 나는 단테에게 ‘집에 가면 좋은 점’을 일일이 설명했다.

그냥 그렇게 해서 한 마디라도 더 붙여보고 싶었다.

왜냐면-

‘에휴, 얼굴에 약한 게 죄지.’

내가 너무 속물 같아서 어제부터 부정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인정할 때가 됐다.

단테는…… 심각할 정도로 내 취향이었다.

제복을 갖춰 입고 있었을 때도 그렇고, 다른 애들은 다 가로 베기를 반복하는데 자기 혼자 옆에서 선배 생도와 대련할 때도 그래.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도 솔직히 잘생겼고…….’

나는 내가 단테를 챙기려고 하는 이유를 하나하나 꼽아보다가 그냥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럽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