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 * *
도착한 로이바이엄 저택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긴 겨울을 지낸 건 어느 가문이나 똑같을 텐데 여긴…… 발을 들이자마자 기겁할 정도로 온 사방이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새하얀 복도에 깔린 주홍빛 카펫. 그 위로 떨어지는 커다란 유리창의 햇살.
곳곳에 장식된 이국적인 장식품을 지나 후원에 도착하니 거기엔 흰색, 주홍색 장미가 만발해 있었다.
‘와, 진짜 돈 많은가 보다.’
이 많은 장미를 키우는데 드는 물이며 인력, 비료 값이 다 얼마야?
이런 것부터 생각하게 되는 내가 싫지만……. 지금이 봄이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임을 따져보자면 이 정원에 들어간 막대한 투자금을 계산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 기선 제압 확실하게 하네.’
오늘 이 자리에 불려온 다른 가문 애들은 주눅 들 수밖에 없겠지.
이렇게 할 수 있는 가문이 얼마나 있겠어?
‘황궁 아니면 로이바이엄뿐일 것 같은데…….’
왜냐면 드리블랴네는 극도의 실용주의자와 합리주의자들이 모인 가문이라고도 볼 수 있거든.
그러다 보니 꽃을 피워낼 자리가 있으면 식량을 생산하고…… 예술품을 둘 자리가 있으면 거기에 갑옷과 무기를 전시하는 편이지 아무래도.
‘여긴 정말 세간에서 생각하는 귀족 집안 그 자체구나.’
음. 근데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걸?
‘그래. 하려면 확실하게 하는 게 좋지. 장미가 만발했을 때 손님을 초대하는 전략, 아주 좋아.’
머리를 쓸 줄 아는구나, 셀리나는.
아마 셀리나는 자신이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아는 애인 것 같았다. 욕심도 많고 자기 과시적이고, 아마도 발랄하고 명랑하지 않을까?
‘정말 어쩌면 나와 성격이 잘 맞을지도 몰라.’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추가 다시 긍정적인 쪽으로 성큼 움직였다.
“이쪽입니다.”
집사의 안내에 따라 단테와 함께 후원을 가로지른 나는 이윽고 장미가 풍성히 휘감겨 자란 가든 아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뒤편에 색색의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의자도 테이블도 어린아이들이 쓰기엔 호화로운 제품이었다.
“어머! 드디어 왔네요!”
그리고 그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앉은 건 미리 이야기를 들었던 대로, 셀리나 로이바이엄.
이 가문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머리칼을 지닌 첫째 딸이었다.
“어서 와요! 나는 셀리나라고 해요. 초대에 응해줘서 기뻤답니다!”
“반가워요. 나는 플로린 드리블랴네라고 해요. 처음 만나네요, 다들.”
드리블랴네의 장원은 어마어마한 규모였기에 거길 빠져나오는 데만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그러니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을 때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어요. 우리가 친구가 되면 얼마나 멋질까요?”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지닌 셀리나는 꼭 꿈을 꾸는 듯 몽환적인 주홍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이 저택만큼이나 화려한 차림인데 그걸 다 소화해 낼 만큼 예뻤다.
시선을 끌지 못할 수가 없는 아이.
셀리나의 첫인상은 딱 그랬다.
“어머, 함께 오신 분은 설마……!”
“소개할게요. 오늘 저를 에스코트해 준 단테 드리블랴네에요.”
“플로린 양의 결혼 상대군요!”
셀리나가 두 손을 꼭 모아 쥐며 기쁘다는 듯 외쳤다.
하지만 나는 멈칫할 수밖엔 없었다.
‘플로린, 양?’
왜 내가 플로린 양이야?
물론 귀부인을 뜻하는 ‘마담’을 붙일 나이는 아니었다. 나와 또래인 아이들이 내게 ‘마담 플로린’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었고.
그런다고 한들 셀리나는 나를 ‘플로린 양’으로 불러선 안 됐다. 그건 마도 제국 사교계에서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칭하는 호칭이니까.
‘무례하기 짝이 없네.’
아직 이름이나 애칭을 허락하지 않은 사이라면 ‘레이디 드리블랴네’라고 불렀어야 했다. 내 나이가 어려서 우습고 이상해도 그게 예법이었다.
황제조차도 나를 레이디 드리블랴네라고 칭하는 게 옳은데, 네가 뭔데 나를 플로린 양이라고 해?
“공자가 바로 그 사관 학교에 입학하신 그분이지요?”
“어쩜……. 멋져요.”
“저런 분의 에스코트를 받다니, 부러워요.”
모여 앉은 영애들이 까르르 웃으며 소곤거렸다.
이마에 힘줄이 돋았지만 나는 일단은 참기로 하고 단테를 돌아보았다. 단테는 내 신호를 알아차리고 곧바로 의자를 빼서 내가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럼 재미있게 놀아, 플로린. 나는 잠시 빠져줄게.”
단테가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그런데 단테가 정말 가버릴 것 같자 영애들이 한목소리로 아쉬움을 표출했다.
“아이, 좀 더 있다 가세요.”
“맞아요. 의자는 하나 더 가져오라고 하면 되는걸요?”
“사관 학교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무례가 슬슬 도를 넘는데.
얼핏 보기엔 그저 순수하게 단테에게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초대를 받은 건 나고, 단테는 에스코트를 한 입장인데 첫 인사도 다 하기 전부터 대화가 단테 위주인 건…….
“자, 자. 여러분. 공자는 이만 놓아드려요.”
그때, 셀리나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우린 오늘 플로린과 친해지려고 온 거잖아요. 아, 이름 불러도 되지요? 플로린.”
셀리나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더니 내가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곧바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혹시 영애들이 공자에게 관심을 가져서 기분이 나쁜 건 아니죠?”
야. 해보자 이거지?
아주 잠깐이지만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나는 주홍색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반들거리는 악의를 읽어내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요, 셀리나.”
“다행이에요! 플로린은 마음이 넓나 봐요. 드리블랴네의 특이한 제도에 대해선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궁금한 것도 많아요. 오늘 다 이야기해 줘요!”
셀리나가 내 손을 꼭 부여잡았다.
나 역시 셀리나의 손을 쥐고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래, 차라리 확실하게 알았으니 됐어.’
여기는 적진. 그리고 무릇 드리블랴네의 며느리는 비록 8대 1이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법이었다.
* * *
셀리나는 사람을 살살 긁는 타입이었다. 결코 겉으로 대놓고 못되게 굴지 않지만 제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반박하는 식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고 가야 직성이 풀렸다.
‘피곤해.’
처음 한 시간이야 겉으로나마 화기애애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대화의 패턴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간단한 예시로는 어떤 백작가 영애가 거리에 새로 연 디저트 가게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자-
“저는 블루베리 팬케이크가 제일 맛있었어요!”
“그래요? 난 사과 조림이 올라간 게 더 낫던데?”
“역시 셀리나는 입맛도 남다르네요. 생각해 보니 저도 사과가 더 나았던 것 같아요.”
셀리나가 뭘 좋아하든 그게 알 바인가?
그런데 대화는 저렇게 마무리되고 자연스레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런 건 무어라 지적하기도 어려운 내용이고, 일단 아직까지 이 아이들이 내게 적대감을 완전히 드러낸 게 아니기에 나는 상황을 지켜보며 말을 최대한 아꼈다.
좀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도 자기들이 알아서 셀리나를 추켜세우겠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전 이번 황궁 연회에 프릴이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고 싶어요. 작은 꽃처럼 보이게요.”
“저도요, 저도요.”
그러다 마침내 봄 연회 드레스에 대한 주제가 나왔다.
셀리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고 나는 심드렁하게 초콜릿이나 주워 먹었다.
그러던 다음 순간.
“그런데 셀리나가 금색 드레스를 입으니까, 다들 다른 색으로 골라야 하는 거 아시죠?”
뭐? 왜?
나는 먹던 걸 멈추고 눈썹을 추켜세웠다.
발언한 것은 아까부터 가장 셀리나의 편을 많이 들던 소녀였다. 어디 후작가 딸이라나.
이름이 캐서린이랬지.
“다들 잘 아시리라 믿어요. 우린 셀리나가 앞으로 사교계의 꽃이 되는 걸 응원해 주기로 했잖아요? 친구로서요.”
그 애는 ‘친구’라는 말을 강조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 ‘친구’ 안에 나도 포함되는 모양이었다.
“그게 ‘미혼 영애들’ 사이의 규칙인가 보네요.”
결국 한마디 하게 만드네.
로즈힙 티가 찰랑이는 찻잔을 가만히 들어 올린 나는 눈매를 휘었다.
“얼마나 예쁜 드레스를 골랐는지 기대할게요, 셀리나.”
요약하자면, ‘네가 뭔 드레스를 입던 나랑 무슨 상관?’이란 뜻이다.
그리고 속뜻을 알아들었는지 예의 그 영애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미혼 영애의 규칙이 아니라요, 셀리나는 나중에 황가의 일원이 될 몸이니까요. 지금부터 셀리나가 규칙을 정하는 거예요.”
“그래요? 그런데 황가의 일원이라니. 누구랑 결혼하는데요?”
“그야 황태자님이지요!”
셀리나는 가만히 있는데 캐서린이 답답하다는 듯 나를 가르치려 들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난 고개를 갸웃하며 정말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말투를 꾸며냈다.
“그 말씀은, 유리 예레반 헬리코프리온 드리블랴네 님이 황태자가 된단 건가요? 캐서린은 참 많은 걸 알고 있네요!”
“……그, 그건!”
“아니에요? 그럼 누가 황태자가 되는데요?”
“화, 황후 폐하께서…….”
“제가 모르는 사이 황후 폐하께서 귀한 황손을 잉태하셨나요? 어쩜 좋아요, 제가 소식이 많이 느리네요.”
나는 입을 가리며 놀란 척했다.
그러자 캐서린은 입을 꾹 눌러 닫고 고개를 팩 돌렸다.
‘더 할 말이 없겠지.’
왜냐고? 유리는 현 황가의 유일무이한 핏줄이며, 황후는 임신조차 한 적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