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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83화 (83/166)

83화

“어……. 어……! 그, 늑대! 그러니까 이름이……!”

“빅토르 클라우딘입니다. 흑륜 기사단에 들어오게 되어 심히 영광입지요!”

와, 성격 좋다고만 생각한 사람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빅토르 클라우딘은 회색 늑대 수인으로 지난번에 사관 학교에서 만났었다. 내가 승자를 위한 월계수 관을 씌워주기도 했었거든. 나름 인연이 깊달까?

“클라우딘 경도 그 끔찍한 시험에서 살아남았어? 대단해!”

“빅토르면 족합니다. 어우, 엄청난 시험이었지요. 먹을 것도 없이 눈밭에 던져져선 데굴데굴 굴렀는데 딱 죽겠다 싶던 차에 눈앞에 곰 한 마리가 있지 뭡니까.”

“헉, 그래서? 곰을 잡았어?”

“에이, 제가 어찌 곰을 잡습니까. 냅다 튀었죠!”

“아, 뭐야! 무용담인 줄 알았더니!”

내가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자 빅토르가 낄낄거리더니 이내 멋진 척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번엔 잡으려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왜 못 잡았어? 실력은 되지 않아?”

빅토르 덕분에 어느덧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신입 기사들은 입단 시험을 떠올리더니 다 같이 핼쑥해졌는데 빅토르만이 펄펄 살아 날뛰는 게 좀 재미있었다.

“아, 그게요. 존경하는 단장님께서 아무 무기도 주지 않고 그냥 던지셨거든요.”

“뭐어? 단검 하나도 없이? 그럼 어떻게 살아남아?”

“그게 바로 시험인 거죠! 크! 알아서 살아남기!”

“…….”

무서워. 역시 다시 태어나도 기사는 안 해야지…….

상상하던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도리질을 쳤다.

갑자기 오싹해져선 발끝부터 차가워지는 기분이야.

“초콜릿 감사합니다.”

“저도요. 감사드립니다.”

한차례 빅토르와 대화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신입 기사들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나는 최대한 그들의 이름을 외워보려 노력했지만 사실 다 기억하긴 힘들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이름을 모른다면 다음에도 친절하게 말해줄 수 있어? 다 기억하고 싶은데 어려울 것 같아.”

나는 일부러 울상을 지으며 눈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그러고는 발끝을 세워서 땅을 톡톡 찍었다.

“당연하지요! 몇 번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무 기억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기억해 주시면 기쁠 거예요.”

“맞아요, 맞아요.”

작정하고 귀엽게 굴자 신입 기사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나는 배시시 웃고는 이내 치맛자락의 양 끝을 쥐었다.

“저 플로린은 드리블랴네를 지켜주는 여러분께 감사해요. 이번 여정, 잘 부탁드려요. 믿고 있어요.”

살포시 무릎을 굽혔다가 일어난 나는 얼빠진 얼굴을 하는 신입 기사들을 돌아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갑자기 극도로 예의를 차리자 깜짝 놀란 듯했던 그들은 몇 초 뒤, ‘우오오!’ 하는 소리를 내며 발을 굴렀다.

“알겠습니다!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기초 체력 단련이라도 하고 자겠습니다!”

“어흐흑, 이렇게 상냥한 분을 모실 수 있다니……. 전 행운입니다!”

“그 지독한 시험에서 살아남길 잘했어……!”

좋아, 이미지를 잘 남기는 건 성공한 것 같지?

나는 나름 만족해하며 마차로 돌아갔다. 단테와 앙드레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편하게 자고 싶으면 마차로 오겠지.

이번에 알게 된 건데, 제국법에 의하면 열한 살 미만은 성별이 달라도 같이 잠들어도 아무 상관 없다고 한다.

‘어쩐지. 내가 이안과 같이 자는 일이 종종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네 싶었는데.’

그래서 이번 행렬에 마차는 큰 종류로 한 대뿐이었다.

소파 부분을 어떻게 잘 조절해서 펼치면 침대가 되는데 한쪽에서 내가 자고 다른 쪽에서 단테와 앙드레가 자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앗, 작은 마니이임! 저 왔어요!”

“린다. 설거지 다 했어?”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얼른 잠자리 봐드릴게요!”

별이 참 예쁘네.

나뭇가지 사이에 총총 박힌 별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하품과 함께 마차로 들어갔다.

“잘 자, 린다.”

“네! 혹시 주무시다가 불편한 게 생기시면 종 흔드는 거 아시지요?”

“으응.”

폭신폭신한 이불에 둘러싸인 나는 오르골의 태엽을 돌려 머리맡에 놓고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저택의 침대보다야 당연히 못하지만 그래도 이것대로 운치가 있네.

“하아암.”

눈을 문지른 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쳇.”

그렇게 플로린이 잠든 마차의 뒤.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단테는 괜히 돌멩이나 걷어찼다.

‘하필 앙드레가 그런 소리를 해선.’

같은 마차에서 자는 것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잖아.

‘근데 나만 신경 쓰나? 플로린은 왜 나랑 같은 마차에서 자는 걸 아무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지?’

명확하게 설명하긴 어려운데 뭔가 마음에 안 든다. 그래서 자꾸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사실 황궁 연회 이후로 이안과 플로린이 너무 친해진 것 같아서 그것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아, 몰라!”

머리칼을 마구 헤집던 단테는 누가 제 얼굴을 보고 한 마디라도 얹을까 싶어 서둘러 도망칠 곳을 찾았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동물화를 해서 나무 위로 올라가 잠드는 것이었다.

* * *

그렇게 내내 꿍한 채로 있던 단테는 다음 날 아침 햇살을 맞으며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이번 여행 때 이안에게 쏠린 관심을 뺏을 거야.’

일부러 새 옷도 맞추고 구두도 샀다. 곱상하게 생기기만 한 이안이 대체 뭐가 좋은지 모르겠지만 플로린이 예쁜 걸 좋아한다면 그도 예쁘고 싶었기 때문이다.

‘노력할 거야.’

네가 나를 더 좋아하게. 아니, 네가 나를 제일 좋아하게.

“단테! 어디 있어? 아침 먹어야지!”

단테는 제 이름을 부르는 플로린을 내려다보다 훌쩍 뛰어내렸다.

저 입에서 ‘이안’이 아니라 ‘단테’가 나오는 게 좋다. 플로린은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걸 좋아하니까 하는 수 없지만…….

그래도…….

‘이안 형보다 나를 더 좋아해 줘.’

단테는 새벽녘에 잠시 깼을 때 숲속을 돌아다니며 꺾은 꽃을 등 뒤에 숨긴 채 플로린에게 다가갔다. 잘 보이기 작전의 일환이었는데, 과연 플로린이 기뻐해 줄까?

“단테! 어디 있었어?”

“위에.”

“설마 나무 위에? 위험하게!”

“이거.”

좀 더 멋지게 주고 싶었는데 쑥스러움이 커서 그러지 못했다.

단테는 풀꽃 무더기를 불쑥 내밀며 괜히 툴툴거렸다.

“축제에 가면 이거보다 더 크고 예쁜 거 사줄게. 이거 말고 보석꽃.”

“설마 나 주려고 꽃을 찾아다닌 거야?”

“응.”

칭찬해 주나?

새하얗고 작은 풀꽃을 품에 안은 채 향기를 맡던 플로린은 이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 고마워!”

“!”

“진짜 좋아. 보석꽃 아니라도 단테가 정성을 다해서 준 거잖아. 난 이게 더 좋아.”

플로린이 기뻐한다!

순간, 펑 하고 단테의 머리에서 귀가 튀어나왔다.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탓이었다.

“좋은 남편은 아내한테 꽃을 주는 거랬어.”

“단테의 아버지가 그랬어?”

“응. 앞으로도 자주 꽃다발을 줄게. 약속해.”

사실 플로린은 플로린 자체가 꽃이니까 별로 꽃다발에 감흥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단테는 귀를 까딱이며 볼을 붉혔다.

무척 찬란하고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 * *

“브로치 사세요! 가넷 브로치가 싸게 나왔어요!”

“여기는 스피넬입니다! 사파이어의 반의반 값으로 스피넬을 착용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보석으로 만든 꽃입니다! 금세 시드는 꽃보다 요즘은 보석꽃을 선물하는 게 유행이에요!”

“싸다, 싸! 원석 파격 세일!”

축제가 한창인 따르티에의 거리는 물건을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으로 온통 북적였다.

보석이 귀족의 전유물인 건 맞지만 그건 불순물 없이 투명하고 깨끗해 진짜 ‘보석’으로 취급되는 종류에 한한다. 그러나 광산에서 나오는 게 전부 다 그런 것일 수는 없는 법.

귀족에게 판매할 수 없는 덩어리가 나오기도 하는데 그런 물건들은 보석이 아니라 일명 ‘원석’으로 불린다고 했다.

“원석은 평민들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가격에 거래된대!”

앙드레가 영지 입구에서 나눠주는 팸플릿을 들고 열심히 읽어 내렸다.

사실 나는 이미 다 본 내용이어서 알고 있었지만 앙드레를 위해 모른 척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고가의 보석이랑 유명한 세공사의 장신구들을 파는 거리는 따로 있대. 여기 말고 저쪽으로 가면! 거긴 귀족만 입장할 수 있나 봐.”

“가볼 거야?

“당연하지! 여기까지 왔는데 엄마 선물 사야지.”

앙드레가 신이 나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에 나는 창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행렬의 앞에 서 계신 양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다.

햇살 아래 찬란한 은발과 곧은 등이 참 멋있다.

새파란 사파이어가 잘 어울리시겠지. 장식이 많지 않고 크기는 작은 걸로, 귀에 딱 붙는 디자인의 귀걸이면 어떨까?

“나도 어머니 선물을 살까 봐.”

“오, 정말?”

“응. 근데 그럼 아버님 선물도 사야 할 텐데. 이난나 님이랑 할아버님도……?”

잠깐만. 여기까지 왔는데 린다랑 존이랑 유모 선물을 안 살 수는 없었다.

‘어라, 그럼 다 사는데 이안 선물만 빼놓을 수는 없는 거 아냐?’

그뿐 아니라 아무리 일 때문에 여기 왔다지만 무려 축제에 온 거라 유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유리는 여전히 그 차가운 수조 속에 있는데…….’

그래서 언젠가 건네줄 수 있게 유리 선물도 사고 싶은 게 내 욕심이었다.

‘잠깐. 그런데 나……. 얼마 남았더라.’

땀을 삐질 흘린 나는 여기에 있을 골드러시 은행 지점부터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설마 파산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그런데 그때였다.

관심 없는 척 턱을 괸 채 창밖을 보고 있던 단테가 툭 하고 한 마디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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