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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87화 (87/166)

87화

* * *

“있잖아, 플로린.”

이윽고 우리는 노을이 진 거리로 나왔다.

슬슬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하던 찰나, 단테가 슬그머니 입을 뗐다.

“내가 계좌 준 거 말인데……. 지금은 그거밖에 못 주지만 내가 어른이 되면 좋은 거 더 많이 줄게. 더더 많이. 약속해.”

“그것도 충분해. 사실 내가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걸.”

“당연히 받아도 되지! 사실 그보단 더 많이 주고 싶었는데 수익이 난 게 하나뿐이라서……. 내가 어른이 되어서 더 많이 공부한 다음에 또 투자하면 그땐 더 크게 벌 수 있을 거야.”

“뭐어? 어디어디에 투자를 한 거야?”

“그냥 이거다 싶은 거 여러 개? 아빠가 가르쳐 줬거든.”

조기 교육, 대단해.

나는 통장에 찍혀 있던 액수를 떠올리다가 아찔해져서 기억을 휙휙 지웠다.

에비, 너무 큰 돈이야.

그걸 가치 있게 쓸 줄 알게 될 때까지는 손대지 않고 둬야지.

그리고 만약 단테랑 결혼하지 않게 되면…… 그건 고스란히 돌려줄 거다.

“나랑 결혼 안 해도 그건 플로린 거야. 정말로 플로린 마음대로 써도 돼.”

“그러면 네가 너무 손해잖아.”

“좋아하는데 손해니 이득이니 따지고 싶지 않아. 난 네가 좋아. 그러니까 내가 줄 수 있는 걸 다 줄 거야.”

단테의 옆얼굴이 고집스러웠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표정. 저건……. 그래. 아마도 신념이라고 불리는 것이리라.

“고작 돈밖에 못 줘서 좀 화가 나. 집도 주고 싶고 섬도 사주고 싶은데. 우리 엄마는 아빠한테 다 사줬는데.”

기준이 남다르다 싶었더니 역시 아리아드네 님을 보고 자라 그렇구나.

나는 보통은 그렇게까지 하진 않는다고 하려다가 그냥 말았다. 어차피 안 들을 것 같아서.

‘그냥 고맙게 받아야겠다.’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데다 앞으로 사교 활동을 하면서 개인 자금이 필요한 일이 종종 생길 것 같았다.

‘이걸로 내가 사업을 한 다음 몇 배로 불려두면 어떨까 싶지만…….’

아직 너무 이르다. 그건 열다섯 살은 되고 나서 생각해 봐야지.

‘그나저나 단테는 확실히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남편이 해줘야 한다, 아내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개념보다는 단테의 머릿속 구조는 이러했다.

‘존경하는 어머니가 그랬듯 나도 배우자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

이 명제는 단테의 근간을 이루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아마 결코 바뀌거나 꺾이지 않을 의지.

그런 게 있기에 단테는 고집스럽고 단호하고 조금은 막무가내였지만, 동시에 멋있었다.

“그럼…… 이제 돌아갈까?”

단테가 부끄러운지 헛기침을 하며 몇 걸음 앞서 나갔다.

단테가 목덜미까지 빨개진 걸 발견한 나 역시 얼굴 가득 열이 오르고 말았다.

‘어쩐지 몽글몽글해졌어.’

남편감을 선택하는 일, 쉽지 않을 것 같아.

나는 가슴께를 꾹 누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잡아라!!!”

“저자다! 놓치지 마라!”

“보안 구역으로 들어갔다! 잡아!!!”

그런데 그때였다.

거친 고함이 고막을 찢을 듯 달려들었다.

놀라서 고개를 든 찰나, 누군가 내 옆에 나타났나 싶었는데 다음 순간 나는 이미 달랑 들려 있었다.

“어이쿠, 실례 좀 하겠습니다요!”

“뭐, 잠시, 악!”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단테도 막을 수 없고 나를 호위하던 이들조차 허망하게 놓친 단 1초. 그사이에, 나는 납치당했다.

오늘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이었다.

* * *

“이…… 이…… 못된 납치범!”

짐짝처럼 달랑달랑 매달린 채 어느새 도시 외곽으로 보이는 곳까지 온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나쁜 놈의 등을 퍽퍽 쳤다.

“내려놔! 내려놓으라고!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으갸갹, 살벌하시네요. 오랜만에 뵙지요?”

담비로 변해서 귓불을 콱 물어뜯어 버리려던 나는 어딘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하지만 여전히 주먹은 옹골차게 말아 쥔 채로 나는 납치범을 노려보았다.

엄청 흔한 인상인데. 나 이런 사람 모르는데.

‘너무 흔해서 그냥 스쳐 지나갈 것만 같은데 이런 몸놀림……이라면…….’

“곡예사?”

“맞습니다요!”

곡예사이자 납치범인 나쁜 놈이 뭘 잘했다고 활짝 웃었다.

나는 그런 놈의 턱주가리에 머리를 꿍 박아버리고 싶었지만 그걸 방지하기 위함인지 처음부터 날 어깨에 걸쳐놨기에 불가능했다.

“어휴, 겨우 따돌렸네.”

“대체 넌 뭐야?”

“아니, 전 억울합니다! 소매치기 놈들이 돈주머니를 훔쳐댔는데 걸릴 것 같으니까 갑자기 옆에 있던 저한테 떠넘기더라니까요? 그래서 냅다 도망치고 있었죠!”

“근데 난 왜?”

“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공주님을 뵙기 위해서였는데 하필 또 눈앞에 계시지 뭡니까. 이대로 잡히면 귀찮아질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감시 없이 말씀도 나눠야 해서 모셨습니다.”

아버님, 저 정신 이상자를 만난 것 같아요…….

도대체 뭐라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일단 살의는 없는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원래 싱글싱글 웃는 악당이 제일 무서운 법이잖아.

“공주님 주변을 어찌나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지, 원. 그 틈을 뚫고 들어오기가 쉽지 않더라니까요.”

“잠깐만. 대체 날 왜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단테와 호위들이 나를 찾으러 올 거야. 양어머니도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오실 거고. 아버님은 말해 뭐 해.

‘온 집안 사람들이 나를 구하러 총 출동할걸.’

그러니까 난 내 몸을 안전하게 지키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면 된다. 이 미친놈이 홱 돌지 않도록 자극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려면 어이없는 연극에 장단을 맞춰줘야겠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이미 얼굴을 봤으니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뿐.

‘당장 나를 죽일 생각은 없어 보여.’

그렇다면 몸값을 원하는 건가?

“아! 공주님은 왕비님과 아주 닮았거든요. 그래서 공주님인 것 같은데……. 물론 왕의 피와 섞어서 일치하는지 봐야 하긴 합니다.”

“왕?”

“예. 여기 지상에서는 황제라고 부르던가요? 저 위에서는 왕이라고 합니다.”

미친놈이 검지를 쭉 펴더니 허공을 가리켰다.

거기로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하늘을 보곤 인상을 찡그렸다.

‘진짜 미친놈이네, 이거.’

잘못 걸린 것 같아.

사이비 종교 아니야?

“어휴, 황제 놈이 얼마나 집요한지 아세요? 자기 죽은 연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 공국에 있는 것 아니냐고 어찌나 사람을 못살게 굴던지. 황궁에서 도망치는 데도 며칠은 걸렸어요.”

그때였다. 무어라 횡설수설하며 눈가를 닦던 남자가 턱 아래로 손을 가져가더니 이내 찌이익 하고 얼굴을 벗었다.

엄청나게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을 헤 벌린 나는 뒤이어 나타난 새하얀 머리칼에 화들짝 놀라 한발 물러섰다.

‘흰 머리. 붉은 눈.’

알비노?!

“예. 저도 공주님과 같은 가이아노스의 백성입니다.”

“……가이아노스?”

“설마, 가이아노스에 대해 모르십니까?”

“아…….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미간을 좁히며 ‘가이아노스’라고 중얼거리던 나는 퍼뜩 떠오르는 기억 하나를 잡아챘다.

“그리하여 두 신은 자신들의 어머니 신인 고대 자연의 가이아노스를 찾아갔다. 천신이 예를 갖추어 여쭈니 가이아노스가 이르되 이미 나의 생각하는 피조물이 있노라. 그들을 보아라 하였다.”

낮게 중얼거리자 더할 나위 없이 수상한 곡예사이자 납치범이자 미친 사이비 종교인에 알비노이기까지 한 남자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신과 악신의 모신이자 세상의 기원. 가장 최초의 신. 우리의 머리칼과 눈 색은 가이아노스께 받은 것입니다. 가이아노스께서 직접 빚으신 생각하는 피조물이란 즉, 아르칼리크의 백성을 일컫는 것이지요.”

“우와…….”

아버님, 저 이제 슬슬 진짜 무서워요.

아무 영혼 없이 대답한 나는 불신과 의심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남자와 거리를 두었다.

광신도! 무서워요!

“안 믿으시는군요.”

“믿겠어요?”

“으음.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않았군요. 본래 모습으로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대 아르칼리크 공국의 일곱 섬 중 화 섬의 주인, 화이란이라 합니다.”

남자가 내게 예를 차렸다.

그런데 정중하긴 했지만 내가 아는 예법은 분명 아니었다. 왜냐하면 허리를 숙이거나 묵례를 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화이란은 바닥에 넙죽 엎드려 이마를 내 발에 댔던 것이다.

“저는 왕의 유일한 따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따님이지요.”

“……아르칼리크 공국의 왕? 내가 공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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