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제 7장. 아르칼리크 공국 회담에 가자!
내 납치 사건으로부터 12시간 뒤.
화이란은 양어머니와 아버님, 할아버님과 이난나 님에게 둘러싸인 채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유리를 구하려면 화이란을 죽이면 안 되는데, 싶었던 나는 그나마 제일 이성을 갖고 계신 이난나 님을 택해 소곤거렸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을 전부 다.
이난나 님 역시 유리를 구출하고 싶으실 테니까.
“쨘! 이건 린다 선물!”
“그리 큰일을 겪으셨는데 제 선물을 챙겨주시다니요. 흐어엉.”
“아, 아니……. 납치당하기 전에 산 거야. 그리고 이건 유모 선물!”
“앞으로 저택 밖으로 나가실 때마다 이 유모 가슴이 철렁해서 어찌하지요? 그리 큰일을 당하시다니……. 나쁜 놈 같으니라고!”
“그……. 난 멀쩡해. 괜찮아. 납치 같은 거 드리블랴네의 며느리면 보통 다 겪는 일이라고 들었어.”
신성제국과 전쟁이 치열했던 당시의 내정된 안주인. 즉, 이난나 님보다도 윗세대인 17대 안주인과 18대 안주인은 각기 최소 5번의 납치와 감금을 겪었다고 하던걸.
드리블랴네 가문의 역사를 가르치는 수업 시간에 배운 거였다.
“그렇다고 해서 플로린 님도 겪으셔야 하는 건 아니에요!”
“맞아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큰 걸로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어요. 그거 좋아하시니까…….”
유모가 훌쩍거리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나는 히 웃으며 유모를 꼭 껴안았다.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아니지만.’
단테에게 주려고, 하도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해주면 안 되느냐고 졸랐더니 저택 내에서 그렇게 인식이 굳어진 모양이었다.
뭐어, 맛있으니까 아무 상관 없어!
“주방에 갈 거면 나도 갈래. 사실 주방 식구들 것도 사 왔거든.”
“맙소사! 어쩜 이리도 사려 깊고 마음이 따스하신지. 다들 크게 감동받을 거예요.”
“나한테 맛있는 음식을 늘 해주니까 내가 고마워해야지.”
저택 내엔 고용인들이 아주 많았다. 아직 이름도 모르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고용인들도 많고. 그러니 그들의 것을 전부 다 살 이유도 그럴 수도 없지만…….
‘그래도 내가 인지하고 있고 친해진 사람들은 잘 챙기고 싶어.’
비단 라흰 방지 계획 때문만이 아니라 그냥 정말로 고마워서.
“그러고 보니 이안은? 아직 안 왔어?”
“아, 요즘 이안 도련님을 못 뵈기는 했네요.”
“선물 바로 주고 싶었는데. 아쉬워라.”
국경 지대에서 괜찮을까?
아버님에게 부탁해서 마법으로 편지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그건 순전히 내 욕심이었다. 혹시 위험한 훈련 중에 나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어떡해.
‘잘 갖고 있다가 만나면 줘야지.’
상처 없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이안이랑 같이 발견했던 곡예사가 사실은 아르칼리크인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깜짝 놀랄 텐데.
‘이런 거 좋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 이런 게 친한 친구라는 거겠지?
“어찌 이런 걸 다…….”
“이 제프, 한평생의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작은 마님.”
“허어. 살다살다 주방 식구를 이리 챙겨주시는 분은 처음이야.”
그리고 잠시 뒤. 내가 모두의 선물을 가지고 나타나자 주방은 거의 쑥대밭이 되었다.
일단 주방장인 제프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고 다른 요리사들도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좋아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기뻐해 줄 줄은 몰랐던 나는 약간 멋쩍어하다가 그대로 제프를 꼭 껴안았다.
“늘 맛있는 요리를 해줘서 고마워. 제프랑 주방 식구들 덕분에 하루하루가 행복해.”
“크, 크흡……. 크허어어엉!”
제프는 결국 냄비 뚜껑만 한 손에 얼굴을 묻곤 엉엉 울어버렸다.
그에 눈시울이 붉어진 수석 요리사가 다가와 내게 귀띔을 해주었다.
“제프는 평생을 이 가문에 바쳤습니다. 열 살 때부터 여기 주방 일을 도와서 지금 주방장의 자리까지 오른 거거든요.”
“으응.”
“그런데……. 이렇게 찾아와주시고 저희의 이름을 알아주시고. 또 여행지에 갔다고 저희 생각이 나서 선물을 사 오시는 분은 플로린 님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감격해서 저러는 거니까, 내버려 두시면 울음을 그칠 겁니다.”
제프는 이제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나는 제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다가 이내 다른 요리사들도 한 번씩 꼭 껴안았다.
“저희는 공작 가문을 섬길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대단히 영광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맞습니다! 누가 요리를 만드는지 모르셔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래도 요리 뒤에 사람이 있음을 알아주셔서 기쁩니다. 그게 이렇게 기쁠 줄은 저희도 몰랐습니다.”
아, 그래. 바로 그거다.
‘요리 뒤에 사람이 있어.’
잘 다려진 옷 뒤에도 사람이 있고, 깨끗한 이불보 뒤에도 사람이 있다. 그걸 잊지 말아야지.
‘선물 사서 오기를 잘했다.’
난 배시시 웃으며 이내 큰 소리로 외쳤다.
“나 오늘 딸기 생크림 케이크 먹고 싶어!”
“그러믄요, 그러믄요. 당장 제가 만들겠습니다. 이 제프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크허엉, 만들 겁니다요!”
“고마워!”
나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모두에게 손을 붕붕 흔들어주었다. 기분 좋은 오후였다.
* * *
한편, 어린이는 몰라도 되는 어른들의 장소. 주방에서 저어어어어 아래 깊숙한 곳엔 드리블랴네 가문의 비밀 감옥이 있었다.
“너무하네. 여기까지 순순히 따라와 줬건만 이런 대우라니.”
드리블랴네의 역사상 이 비밀 감옥이 공실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화이란이 갇혀 있는 가장 좁고 더러운 감옥 반대편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었다.
모두 동공이 탁해졌으며 이성을 잃어 이큘리스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반복되는 고통에 스스로 정신을 놓아버리고 동물화를 시도한 자들도 있었다. 물론 제대로 동물화를 할 수조차 없어 반은 사람이고 반은 동물인 끔찍한 꼴이 되어버렸지만.
한 번 들어오면 죽어도 나가지 못하는 곳. 그런 무서운 장소에 갇혀서도 화이란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오, 저건 지상에 사관 학교라 불리는 곳. 거기 문양 아닌가?”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던 화이란은 감옥 동기들이 입고 있는 옷에 붙은 문양에 주목했다.
사실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게, 그 문양이 박힌 옷을 걸친 자가 수두룩했던 것이다.
“저들이 뭐 큰 잘못이라도 했나 봐? 페로몬이 약한 걸 보면 끽해봐야 하인들 같은데.”
그러나 아무리 주절거려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것. 화이란 역시 잘 아는 방식이었다.
만약 반대 입장이었더라도 그 역시 이 남자처럼 했을 것이다. 가두고, 분위기로 압박하고. 정보를 빼낸 다음에는 어떻게 죽여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을지 고민했겠지.
화이란은 어둑하게 빛나는 청록색 눈동자를 보며 그가 자신과 동류임을 이미 눈치챘다. 그렇기에 그가 갈등 중인 것도 알았다.
“어이. 이미 공주님이 나에 대한 걸 아신다고? 게다가 공주님은 분명히 아르칼리크에 가고자 하셨거든.”
물론 공주님은 단호하게 안 간다고 하셨다. 그러나 눈앞의 이 사내는 그 사실에 대해 알 수 없었으므로 화이란은 양심의 가책 없이 사기를 치기로 했다.
“공주님은 하늘에 속한 분이시다. 지상에서 천한 알비노라는 취급을 받으며 계실 분이 아냐.”
오, 이번엔 조금 반응이 있다.
화이란은 방금 한 말 중 그를 자극했을 만한 게 무엇인지 재빠르게 판단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입 밖으로 뱉었다.
“천한 알비노. 그래. 나 역시 이곳에선 그저 천하다고 하겠지. 하지만 하늘에선 그렇지 않아. 공주님은 나와 같은 가이아노스의 백성이다. 본래 속하신 곳으로 돌아가야 해.”
물론 진짜 공주님이 맞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사내가 되물었다.
“그래서. 갔는데 공주가 아니면.”
“그렇다면 죄인의 핏줄일 테니 즉시 재추방됨이 옳지만, 만약 원한다면 아르칼리크에서 사실 수 있도록 간언해 보지. 내 섬에서 살면 돼.”
“들을 가치가 없군. 결국 너희 좋을 대로 아이를 이용하겠다는 것 아닌가. 그리 귀한 딸이라면 어째서 직접 내려오지 않지?”
왕께서 직접 행차를?
미친 소리도 정도껏이다.
화이란은 드물게 정색했다.
“왕께서는 신과 다름없는 존재시다. 함부로 움직이실 분이 아니라는 걸 지상 것들이 어찌 알까마는.”
“잃어버린 귀한 딸을 찾는데 직접 오지도 못할 정도면, 그게 무슨 애비라고.”
키락서스는 픽 웃으며 비꼬았다.
사실 이성적으로는 플로린이 내세운 계획이 꽤 괜찮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진행하면 가문에 이득이 될 것도 안다. 그러나 마음이 동의하지를 못했다.
친부라고. 친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난 생에선 친부가 등장하지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