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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110화 (110/166)

110화

“있지, 화이란. 요즘 신성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알아?”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나는 화이란을 쿡 찔러 정보를 얻으려 해보았다.

“국제 정세가 궁금하십니까?”

“대외적인 거 말고. 알려지지 않은 거. 대외적인 건 나도 배워.”

“한 시간만 말미를 주시면 보고서 형식으로 올립지요.”

알려주지 않겠다면 알아내면 그만이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화이란이 미동도 없이 잠든 이안을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헌데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인재긴 하네요.”

“이안이 탐 나?”

“아르칼리크 사람이기만 했어도 제자로 키워 보는 건데……. 아쉽습니다.”

화이란이 입맛을 쩝 다셨다.

‘진짜 아쉬워 보이네.’

근데 화이란에게 직접 배우면 이안이 앞으로 이렇게 다칠 일도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이안이 너무나 마음 쓰였다.

단테는 당연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고, 유리야 말할 것도 없다.

유리가 황자궁은 물론이고 일부 대신들까지 장악했다는 건 할아버님을 통해 건너 들었는걸.

앙드레도, 메르엠도 따지자면 엘리트 코스였다. 출발선 자체가 다른 거.

그런데 왜인지 이안만 달라.

어제까지는 이안도 그럴 거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까보니까 아니잖아.

“나는 조금 달라.”

나는 방금 이안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

그 한 마디 속에 깃든 수많은 나날을 되짚어 보았다.

무엇이 이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했을까…….

“이안은 내 남편 후보야. 그거로는 자격이 안 돼? 미래에 아르칼리크의 공주인 나랑 이어질 수도 있는 건데.”

다른 아이들은 가만히 있어도 얻을 수 있는 게 많았다.

하지만 누구도 이안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라도 도와주면 안 되는 걸까.

이안이 자존심 상해할까?

하지만 동정심으로 하는 말 아닌데.

이안이 좀 더 강해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아파하는 걸 두 번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내 눈에 띈 게 한 번이라면…… 내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혼자 아팠을 시간은 열 배쯤 되겠지.’

너는 그런 애니까, 이안.

“뭐, 본인이 직접 부탁하러 온다면 생각은 해보죠. 공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니까요. 자, 그럼 이만 공주님도 방에 돌아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이안, 이제 괜찮은 거 맞지?”

“그럼요. 열도 내렸잖습니까.”

괜찮다는데 왜 이렇게 발길이 안 떨어지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던 난 하는 수 없이 내 방으로 돌아갔다.

내 방으로 가는 걸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공주님은 가셨고. 이제 우리 둘이 정다운 대화를 좀 나눠 볼까.”

어딘가 아주 즐거운 듯한 화이란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안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사실 잠든 체하고 있었지만 이안은 아까부터 깨어 있었다.

걱정을 받는 게 좋기도 하고 민망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왜 이렇게 다쳤느냐’는 질문을 슬쩍 넘기기 어려울 것 같아 일어나지 않았을 뿐.

이까짓 상처 좀 입었다고 의식을 잃은 채 한나절이 지나면 죽었다 깨어나도 클라운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가르쳐 주십시오.”

“호오, 이놈 보게?”

마찬가지로, 신성 기사와 싸웠다고 이렇게 자리보전을 하는 실력으로는…… 조커가 될 수 없었다.

이안이 원하는 자리는 조커의 주인.

내부에서는 마스터라 불리고 외부에서는 단체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조커라고 불리는 자.

거기까지 바득바득 기어 올라가려면 실력을 더 쌓아야만 했다.

“스승님을 뛰어넘을 제자가 되겠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이안은 플로린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에겐 애초에 기회가 얼마 오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 잡아야만 했다.

이안은 망설임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건 자신을 완전히 아랫사람으로 두고, 상대를 윗사람으로 올리겠다는 의미.

그에 화이란이 헛웃음을 지었다.

“독한 새끼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서 내게 배우면, 그 뒤엔 어떻게 하려고?”

화이란은 자연스레 반말을 사용했다. 나름대로 제자로 받아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는 이안이란 이 소년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몇 해간 공주님의 곁을 지키면서 남편 후보란 놈들을 눈에 불에 켜고 노려본 결과-

그나마 이놈이 가장 싹수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왕의 유일무이한 공주님께는 참한 사내가 짝으로 어울린다.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은 안 되지, 안 돼.

감히 공주님을 구속하려 들거나 감정적으로 괴롭게 만드는 놈도 탈락.

한평생 서로 정답게 아끼며 살아가야 하니 성품이 고울 것이 제일 중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보같이 제 밥그릇 하나 못 챙기는 놈이어서도 안 된다. 장군일 필요는 없지만 유약하고 비리비리해서도 안 되지.

친구가 너무 많아서 공주님의 속을 썩일 만한 여지가 있는 놈도 탈락. 귀염성 없는 사내도 탈락.

지상에서의 지위나 신분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지만 그 외의 조건들이 까다로웠다.

“저는 플로린을 위협하는 것들을 제거할 겁니다.”

“예를 들면, 이번에 네가 찾아 갔다가 되레 찔리고 돌아온 그런 놈?”

“……예.”

“혼자 가진 않았을 텐데.”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열에 들떠 정신이 혼미한 채로도 계속 생각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조커는 암살 집단이라는 악명과 참 어울리지 않게도, 조직의 아랫단계에 있는 약자일수록 생존 확률이 높았다. 빠져나갈 수 있는 퇴로 쪽에 배치해 주니까.

하지만 같이 갔던 다섯 명의 클라운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보통 그런 비밀 집단은 잡히면 자결하지.”

“…….”

“그런데 소년이 열만 나도 저리 발을 동동 구르는 우리 공주님인데…… 만에 하나 자결하는 일이 생기면, 아주 큰일이 날 것 같거든.”

머리칼을 배배 꼬던 화이란이 이내 싱긋 웃었다.

“그런 건 막아야 하지 않겠어?”

이안이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배울 수 있는 모든 걸 배운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낸다. 그래야만 가주 자리가 그의 손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단테보다 남에게 인정받기가 세 배는 더 어려우니까.

“……신성 기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상처가 욱신거린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마법으로 말끔히 낫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 흉을 볼 때마다 오늘이 떠오를 테니까.

‘나는 네게 받기만 하는구나. 언젠가 네게 돌려줄 수도 있으면 좋을 텐데…….’

플로린이 그를 위해 또 하나의 길을 열어준 날.

이안은 평생 오늘을 잊을 수 없을 터였다.

* * *

신성제국, 외곽. 트리비엔 영지.

그 긴 전쟁 속에서도 이 지역만큼은 멀쩡했는데, 이유는 트리비엔을 둘러싸고 있는 큰 산맥 때문이었다.

그 산맥의 이름은 수탄.

험준해도 넘을 수 있는 산이 있는가 하면, 몸을 숨길 곳조차 없는 바위산이 있는데 수탄은 후자였다.

그리하여 트리비엔 백작령은 침략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고, 이제는…… 숙박업으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양국을 안전하게 오가고 싶은 용병과 떠돌이 상인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트리비엔에 이제는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백색의 망토를 늘어트리고 흰 제복을 갖추어 입은-

신성제국의 영웅들.

간악한 마도제국에 맞서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낸 신성기사들이 트리비엔에 당도한 것이다.

“미치겠군. 이걸 어찌한다.”

“드리블랴네 가문에서는 그저 문답무용으로 일관하니…….”

“하…… 성녀님이 맞는지 확인만 하겠다는데 그걸 그리 거부할 줄이야.”

그러나 멋들어진 위용과는 달리 이들은 축 처진 상태였다.

공식적으로 종전을 한 지도 몇 년. 갑자기 교황청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마도제국의 성녀를 생포해 와라!

성기사들이 놀란 점은 ‘성녀를 사칭하는 자’가 아니라 ‘성녀’라고 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봉인당해 있는 라흰 성녀님은? 그분이 발휘한 것도 분명 신의 힘이었는데.

“성녀가 설마하니 둘일 리는 없고…….”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생포라니. 모셔오라는 것도 아니고, 생포라니.”

“드리블랴네 가문에서 보내는 살수들 때문에 저희가 죽게 생겼습니다.”

하아아.

교황청의 성기사단 중에서 가장 궂은일을 도맡는 일들이 바로 청동매 기사단이다.

이들은 날개를 펼친 매 모양의 배지를 가슴에 단 채 전국을 누볐다. 이젠 누비다 못해 이 외곽까지 오게 되었지만.

교황의 명령은 절대적이라 따르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성기사인 몸으로 마도제국에 잠입해서 납치를 시도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라 드리블랴네 가문에 조심스레 청을 넣었더니 다음 날 곧바로 살수가 왔다.

진짜 죽이려 들어서 하는 수 없이 방어하다 보니 난전이 되었고…….

“으아아악! 어쩌란 말입니까, 신이시여!!!”

“왜 성녀님을 마도제국에서 태어나게 하셔서는!!!”

이제 불경하게 신까지 원망하기 시작한 성기사들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때아닌 혼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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