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일전에도 제가 따님에게 이런 걸 전해준 적이 있었죠.”
“카드…… 세 개의 카드네요.”
“그래요. 붉은색, 청록색, 보라색. 무엇을 고를지 하나하나 다 열어봐요.”
정오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양어머니가 내게 카드를 내밀었다.
약간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받아 든 나는 한 장 한 장을 차례대로 열어보았다.
오후 다섯 시에, 내가 데리러 갈게.
정갈한 필체. 끝을 가볍게 휙 날려 쓰는 버릇. 그리고…… 붉은색 카드.
이 다정한 한마디는 이안의 것이다. 이름이 쓰여 있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데리러 온다는 거야.’
넌 지금 어디 있는데.
또 상처 입은 채 아파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이안이 보내온 카드를 몇 번이고 눈으로 다시 읽다가 접어두었다.
두 번째는 청록색 카드였다.
오후 다섯 시에…… 연무장의 그 느티나무 아래에서 기다릴게.
‘단테다워.’
연무장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함께 했던 피크닉이 떠오른다. 내가 가지 않으면 어쩌려고 거기서 기다린다는 건지.
대체 몇 시부터 기다리고 있을 건데 오후 다섯 시라고 적어둔 건지…….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이내 마지막 카드를 열었다.
보라색 카드는 열자마자 진한 라일락 향기가 훅 풍겨왔다.
오후 다섯 시. 부디 내가 보낸 마차를 타고 와줘, 누나.
어쩐지 ‘내가 미쳐버리기 전에’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 같은데-
세 명의 개성이 그대로 묻어나는 카드를 모두 읽은 난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멋쩍게 웃었다.
“자, 그럼 따님. 첫 주 데이트는 누구와 하는 게 좋겠어요?”
제 10장. 선택의 시간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오는 맑은 날이었다.
봄볕이 따사롭고 화창한 날씨.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간소한 원피스를 입은 나는 오늘 머리에도, 귀에도 장신구를 달지 않았다.
대신 앞치마를 하나 둘렀지.
머리도 하나로 질끈 묶었고 신발도 굽 없이 편한 가죽신이었다.
마지막으로 지금 내 두 손에는 나눠줄 아몬드 쿠키가 잔뜩 들어 있는 라탄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애들, 엄청 귀여워. 벌써 스콰이어가 되고 싶다고 하는 애들도 있고.”
그런 내 옆엔 바구니를 세 개씩 들고 있는 단테가 있었다.
내 첫 주 데이트 상대.
단테를 택한 것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중 제일 큰 게 고아원에 관한 일이었다.
단테가 여태 어떻게 지내왔는지, 이곳에 함께 가보면 다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꿈같아, 플로린. 네가 날 제일 먼저 택해주다니.”
“궁금했어. 네가 고아원에 관심을 가질 줄 몰랐거든.”
“아, 그게 말이야. 길에서 어떤 애가 내 주머니를 털었거든. 그걸 붙잡아 보니까 길에서 지내는 패거리 중 하나더라고.”
내가 자신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게 즐거운지 단테가 쾌활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아원에 왜 가기 싫은지, 어째서 차라리 길에 있는 게 나은지. 그런 걸 알아보니까 고아원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어.”
“고아들이 많을수록 보조금이 많이 나왔다거나?”
“맞아. 그런 제도적 문제가 있더라. 그렇다고 모든 고아원을 다 똑같이 대우할 순 없었어. 어딘가는 아이들이 많고 어디는 적을 것 아냐.”
우리는 아이들이 거리감과 부담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멀리서부터 마차에서 내려 고아원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입구.
단테는 자신이 직접 보살피고 있는 고아원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어. 기사들이 정기적으로 고아원을 다니면서 확인해야 한다고. 드리블랴네에서 세운 것이든 아니든 간에.”
“흑륜 기사단의 일이 그럼 너무 늘어나는 것 아니야?”
“괜찮아. 어차피 원정 훈련을 다니잖아. 가는 길에 마을마다 들러서 확인하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할아버지가 황제 폐하께 건의했고, 흑륜 기사단이 이 나라의 모든 고아원 감사를 맡게 되었어.”
고아원을 바라보는 단테의 옆얼굴이 자부심으로 빛이 났다.
“그랬더니 고아원에 들어오는 아이들 숫자가 점점 늘어나더라고. 길거리를 배회하던 아이들이 고아원이 좋다는 걸 알고 드디어 거리 생활을 포기하기로 한 거야.”
“멋지다.”
“머, 멋지긴.”
칭찬을 해주자 단테가 쑥스러운지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통계를 보니까 매해 고아원에 들어오는 아이들이 30%씩 증가하더라. 그래서 이제 성인이 돼서 고아원을 퇴소하는 아이들에 대한 지원도 필요해졌어.”
확실히 단테가 고아원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사회적 보호망을 잃은 아이들을 위해 좋은 일이었다.
귀족으로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일.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그걸 나누고 베푸는 건 고귀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니까.
또한, 이렇게 감사를 행하는 기관이 있다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면 전국의 고아원 원장들이 언제 흑륜 기사단이 들이닥칠지 몰라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낼 테니까 잠재적인 학대 위협을 막을 수 있지.
‘그런데 나라면……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갔을 것 같아. 전쟁고아들에게 부모를 찾아주면 더 좋았을 텐데.’
전쟁은 국경 지대에 살고 있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고아라지만 부모가 살아 있는데 모르는 경우도 있을 테지.’
난 내가 아빠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아서 그런지 이산 가족을 만나게 하는 일에 좀 더 관심이 갔다.
‘혹은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마찬가지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연결해서 입양을 추진할 수도 있었을 거야.’
일찍이 그렇게 진행했다면 고아원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나기보단 줄어들지 않았을까?
물론 이 나라를 오래 떠나 있었던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다.
‘이제부터라도 가족을 찾아주는 사업에 손을 대자고 하면 단테는 당연히 좋은 생각이라고 할 테지.’
그럼 아까 단테가 말한 성인이 된 고아원생에 대한 지원은 어떻게 해야 좋을까.
‘지역 사회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하고 싶진 않아.’
고아원 내에서 밥을 배부르게 먹고 공부를 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과연 그 지역에서 그 아이들을 고운 시선으로 봤을까?
10개의 마을이 그렇다 하더라도 1개의 마을이 그렇지 않다면, 고아라고 차별하는 일이 있었다면…… 그 지역 사회에서 일자리를 주선하는 건 그다지 좋지 못한 생각이었다.
‘몇 개의 대도시를 정하고 그 쪽으로 이주할 수 있게끔 기숙사 시설을 지원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가정집처럼 생긴 것으로.’
만약 단테를 선택하지 않는 일이 생기더라도 단테가 하던 일은 이어져야 한다.
그렇기에 난 오늘 하루를 이 고아원에서 보낼 생각이었다.
“기사님이다!”
“기사님!!!”
“기사님 오셨어!”
우리가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당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단테를 향해 우르르 뛰어왔다.
따로 알리지 않고 불쑥 찾아왔음에도 아이들의 행색은 깔끔했고 위생 상태도 좋아 보였다.
“우와! 과자다!”
“얘, 그럼 안 돼! 먼저 원장님께 말씀드리고 먹어야 한댔잖아.”
“힝. 그럼 내가 지금 말씀드리고 올래!”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 중 하나가 내가 들고 있던 바구니에서 쿠키를 꺼내려 했다.
그걸 막아선 건 나이가 좀 더 있어 보이는 여자애였다.
나는 어느새 바구니를 내려놓고 아이들을 팔에 매달리게 해주고 있는 단테를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기사님, 그거 해주세요. 높이높이!”
“저도요!”
아이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단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단테 역시 익숙하게 놀아주었는데, 훤칠한 남자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이안이 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단테와 여기부터 와보길 잘했어.’
황궁에서 열리는 데뷔당트 연회는 다음 주니까, 어차피 그땐 유리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유리는 첫 주 데이트 후보가 아니었다. 여러 정치적 문제로 내 데뷔당트의 에스코트는 유리에게 부탁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면 자연스레 이안은 마지막 주로 밀리게 되는데…….
돌아온 첫날에 딱 만났으면 모를까, 한 번 엇갈리고 나자 긴장감이 심해졌다.
‘오늘은 날도 좋은데.’
이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느티나무 아래에서 세 시간도 넘게 서 있던 단테에게 갔을 때.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고 있던 단테를 보며 그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 주었을 때.
단테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를 보며 씩 웃었을 때.
그때 이안은 나를 보고 있었을까.
‘만약 이안이 그간 가주에 어울리는 일을 해둔 게 없다면…….’
나는 단테를 선택하게 되겠지.
그럼 아마도 적당히 행복하고, 적당히 내 책임과 의무에 어울리는 삶을 살다가 적당히 아이를 두셋쯤 낳게 되지 않을까.
환한 햇살 아래에서 꼬리와 귀가 튀어 나온 아이들을 이리저리 들어 올려주는 단테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단테와의 삶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것 같다고.
어쩌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