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솔직히 단테는 지금껏 라흰이 스트레스 때문에 이상 행동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사였고, 병사들을 관리하는 입장이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목숨에 무감각하지만 병사는 아니다.
단테는 임무 중에 사람을 죽이게 되어 그 스트레스에 정신을 놓고 술이나 담배에 빠져드는 병사들을 종종 보았다.
그랬기에 라흰이 방탕하게 돈을 쓰는 것 역시 그와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가주를 선택하는 문제가 라흰에게 큰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그녀가 곧바로 자신을 선택할 수 없었던 건 결코 라흰의 탓이 아니었다. 그가 모자란 게 이유였지.
아마 라흰은 몹시 고민이 될 것이다.
그를 택할지, 이안을 택할지. 그도 아니면…… 황태자를 택할지 말이다.
그러니 최대한 이해하고 배려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사실 라흰이 그깟 쇼핑을 좀 했다고 해서 그게 뭐가 대수인가. 오히려 지금까지 너무 검소했던 거지.
무엇보다 이번에 라흰이 쇼핑에 쓴 돈은 어차피 가문의 돈도 아니었다. 오래전, 그가 주었던 통장 속 돈이었지.
세월이 지나면서 거기엔 제법 괜찮은 금액이 쌓여 있었다.
언제 써줄까 싶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다 써주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이와 같이 단테는 라흰의 모든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어…… 그래도 벨라디한테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둘이 뭔가 싸울 만한 일이라도 있었나?
삽시간에 두 여자의 중간에 끼게 된 단테는 슬슬 이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거기다가 벨라디가 그를 좋아한다니?
그는 벨라디를 단 한 번도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라흰. 벨라디는 그냥 좋은 친구야.”
그래서였다. 단테가 점잖게 말을 꺼내며 말리려고 한 것은.
그러나 그는 결코, 진심으로 결단코 그 한 마디에 벨라디가 와르르 무너지듯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
“아, 운다! 우니까 진짜 못생겼다, 너!”
벨라디가 파르르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라흰이 손가락질을 하며 깔깔거렸다.
단테는 크게 당황한 채로 벨라디와 라흰을 번갈아 보았는데 사고가 마비되어서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실망이야.”
오랫동안 떨던 벨라디는 그렇게 한 마디를 툭 떨어트리고 몸을 홱 돌렸다.
참고 또 참고 참은 다음에야 내리친 그 짧은 문장이 어찌나 가슴 아프던지, 단테는 일어서서 벨라디를 쫓아가려 했다.
대신 사과하기라도 하려고.
“어디 가? 나 두고 가는 거야?”
하지만 그때, 라흰이 그의 손목을 탁 쥐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반짝이는 눈동자에 단테는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원래 라흰이 이런 눈을 했었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이런 식으로 보았던가.
머리가 지끈거린다. 불쾌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런 눈빛을 하는 여자를, 나는 모르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단테는 움직이지 못했다.
어쩌면 라흰이 그를 선택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끈질기게 발목을 잡은 탓이었다.
‘아, 너무 쉬워. 쉬워서 재미없어.’
그리고 라흰은 그런 단테를 손바닥에 올려 놓고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생글거리고 있지만 벌써 따분해진 라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키락서스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잖아. 역시 키락서스가 제일 멋있어.’
그런데 대체 어딜 간 거지?
여기저기에 키락서스의 행방을 물어봤지만 아무도 제대로 된 대답을 주지 못했다.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먼 곳에 가시지 않았겠느냐고 하거나 여행을 가신 것 아니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다들 그녀가 키락서스의 행방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라흰은 몰랐다.
플로린, 고 계집애라면 알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플로린은 자신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그 흔한 일기장 하나가 안 보였으니 답답할 노릇이지.
‘뭐, 됐어. 어차피 돌아올 테니까. 그 전까지는 남자애들이랑 놀고 있으면 돼.’
훌륭한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단테가 한 마디도 없이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지만 라흰은 다리를 꼰 채 제 손톱을 살폈다.
‘키락서스의 곁에 평생 있을 수 있는데, 키락서스는 나인 걸 모를 테고. 게다가 귀찮은 플로린은 키락서스가 제 손으로 죽여주겠지.’
아, 완벽한 계획이야!
속으로 깔깔거리며 웃은 라흰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제 집에 들어가면 향기로운 목욕을 하고 마사지를 받아야지. 그런 다음에 이안에게 연락을 취해야겠다.
‘셔츠만 입고 부르면 당황할까? 아니면 키스라도 해줄지도?’
플로린이 이전에 어디까지 진도를 뺐을지 궁금해서 몸이 달았다.
그런 라흰의 머릿속에는 이안이 만나자는 자신의 청을 거절할 거라는 건 전혀 없었다.
* * *
하지만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버려.”
이안은 제 침실 문에 끼워진 카드를 대충 발로 찼다.
한기가 느껴지는 냉랭한 명령에 이안의 가장 가까운 수족, 코드 네임 ‘어릿광대’는 지체 없이 카드를 주워 벽난로에 집어 던졌다.
명령은 의문을 갖지 않고 이행한다.
그 뒤에야 남자는 이안에게 질문을 했다.
그는 광대들 중 유일하게 마스터의 허락 없이 입을 열어도 되는 자였다.
“요즈음 라흰 님께서 다른 후보와 많이 가까워지신 듯했습니다.”
“아아.”
“훼방을 놓지 않아도 되는 건지 여쭙습니다.”
드리블랴네의 암살 집단이었던 조커는 이제 이안 개인의 소유가 되었다.
어릿광대든 그 밑의 광대들이든 바니든 간에 모두 이안의 명을 따른다. 이안이 이 거대한 가문의 주인이 되기를 바랐다.
거기에 방해가 되는 건 그들의 방식대로 ‘치워 버릴’ 뿐.
지금도 만약 마스터가 명령을 내리기만 한다면 그들은 몇 명이 죽어 나가든 반드시 단테 드리블랴네에게 죽음을 안길 것이다.
혹은 영구한 상처라도.
하지만 이안은 그걸 바라지 않았다.
그에게 단테는 경쟁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끼는 동생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그렇게 만든 건 다름 아닌 플로린…….
“……?”
방금, 누구의 이름을 생각했지?
이안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머저리가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면 그가 사랑하는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라흰이 아니라 방금 무심코 내뱉은 그 이름은 대체 무엇인지.
“알아볼 게 있다.”
“명령하십시오.”
벽난로에서 타들어가는 카드를 쏘아보던 이안은 마른세수를 했다.
이 초조함이 대체 어디서 기인하는 건지 모르겠다.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는데 그게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는 좌절감이 내내 그를 예민해지게 만들었다.
“마도 제국에서 온다는 성녀에 대해 알아내서 보고해.”
“존명.”
플로린은 분명 마도 제국의 성녀의 이름이다.
신전에 대해 조사했을 때 기록을 본 기억이 났다.
포악하고 성격이 못됐고 천성이 사악하다고 했나. 예의범절을 지킬 줄도 모르고 참을성도 없는 데다 제멋대로 군다고 했지.
‘그건…… 얼마 전부터 라흰이 하던 짓이 아닌가.’
그가 사랑한 이는 그렇지 않았다.
이안은 차분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던 입술을 기억했다.
수줍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선이나 그 끝에 묻어나는 달콤한 기대에 대해서도 기억했다.
티 하나 없이 맑고 순수한 그 눈빛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그녀를 품에 안고 멋대로 괴롭히고 울리고 싶은 충동은 늘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롯이 그를 믿고 있는 눈동자를 보면 그저 사랑스럽다, 그리 속삭이며 아껴주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건 확실히 지금의 라흰이 갖고 있지 않은 요소였다.
‘정확히는 선택의 날부터 달라졌어.’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이안은 융통성이 있었다. 사고를 유연하게 하지 않으면 죽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 나와야 하니 창의성이 필요했다.
기사의 덕목은 신뢰지만 암살자의 덕목은 의심이지.
단테와는 정반대의 속성을 지닌 그이기에 이안은 직감적으로 라흰이 그가 아는 라흰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그를 이 시간에 함부로 부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가 사랑하는 라흰은 그 정도로 분별력 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저게 가짜라면 진짜는 어디에 있지?’
문제는 그것이다.
진짜의 행방.
‘영혼이 바뀐 건가? 어떻게 해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나.’
이안은 이미 지금의 라흰이 가짜라고 확신했다.
다만 증거가 없었기에 그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확증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역시 그 날, 여행 갔을 때의 일을 물어보는 게 좋겠지.’
가짜와 단둘이 있고 싶지는 않으니 차후에 때를 봐서.
테이블을 짚은 그의 손등에 힘줄이 솟았다.
* * *
한편, 황궁.
어둑한 황태자의 집무실에서 유리가 비릿한 조소를 짓고 있었다.
‘별 같잖은 게 플로린 흉내를 다 내고.’
유리의 앞에는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성녀의 영혼을 추적하기 위해 천신이 부여한 힘.
거기엔 신성 제국의 성녀, 플로린이 ‘천신의 성녀’라고 똑똑히 명시되어 있었다.
즉, 지금 드리블랴네 저택에 도사리고 있는 저건 ‘악신의 성녀’가 되겠지.
‘하지만 내가 사랑한 건 천신의 성녀거든.’
입매를 비튼 그는 <책>의 마지막 기록에 눈길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