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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155화 (155/166)

155화

천신의 성녀는 지금 이곳, 마도 제국의 수도로 오고 있다.

<책>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차후에 만나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상어의 애착이 향하는 곳은 영혼이니까.

그가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애교를 떨고 싶어진다면. 가증스럽게 굴며 조금이라도 눈길을 더 받고 싶어진다면.

그쪽이 진짜다.

대체 어쩌다가 라흰이 드리블랴네 저택에 있고 플로린이 신성 제국에 가게 된 건지는 몰라도 상관없었다.

플로린이 더는 플로린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하게 되더라도, 일곱 번 고쳐 죽어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리하여 종래엔 그가 아는 플로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남자로 태어나게 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영혼을 사랑한다는 건 그런 거였다.

‘오히려 이건 기회지. 이번에야말로 잃은 점수를 회복할 때야.’

유리의 우아한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토독토독 두드렸다.

단테 드리블랴네, 뇌에 근육만 찬 그 멍청이는 악신의 성녀 근처에서 열심히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놈이 개처럼 굴며 라흰의 옆에 있는 동안 유리는 최대한 예쁘게 차려입고 플로린을 맞이하러 나갈 것이다.

신성 제국에서 오는 성녀를 황태자가 맞이하는 건 당연한 예우 아니겠는가?

‘놓치지 않아, 누나.’

이내 책을 덮은 유리는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요즈음,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 *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흐윽. 가, 감사합니다. 성녀님.”

“별것 아니야. 무릎 상하니 일어나.”

마도 제국으로 가는 여행은 나날이 괴로움만 더해졌다.

날씨라도 좋았으면 모르겠는데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니 땅이 패여 마차의 흔들림이 더 심해졌던 것이다.

어찌나 힘들었던지 나는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마차 안에서는 동물화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더는 흰 담비가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동물화도 할 수 없었고.

‘난 내가 원한을 잘 갖지 않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냥 잡아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나는 상대가 지금까지 없었을 뿐.

나는 끝도 없이 줄을 선 환자들을 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당겨 올렸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을 하나만 꼽자면 라흰이 최악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쓰레기였다는 것이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피곤한 탓에 예민하게 굴어도 놀랍게도 모두가 나를 칭찬했다.

“플로린 님이 저렇게나 잘 버티시다니……. 물건이 아무것도 안 깨졌어…….”

“아직 아무도 머리를 안 뜯겼어요. 이건 기적 아닐까요? 역시 신께서 보살피신 겁니다!”

“과거의 스스로를 반성하고 개심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인데 그걸 해내다니. 멋지십니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주십시오.”

그간 조금 친해진 신관들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잘한다, 잘한다 하며 박수를 쳤다.

참다 참다 못해 까칠하게 굴기 시작한 지 사흘은 된 것 같은데도 말이다.

‘내가 살다가 물건 안 깨트렸다는 거랑 다른 사람 머리 안 뜯었다고 칭찬을 받아보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튼 신관들이 호의적으로 나와 주었기에 나름대로 버티고 있는 거였다.

물론 아직도 나를 굉장히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 여행의 기간이 늘어날수록 그 또한 조금씩 완화되었다.

내가 백성들에게 잘 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서일 것이다.

“다음 마을이 마지막이니까 조금만 더 힘내세요! 우리 성녀님 파이팅!”

샌디가 내게 저녁 식사를 가져다주며 그렇게 외쳤다.

찐 감자 두 덩이와 보리빵 하나. 짠맛이 나는 절임 채소류가 고작인 식사지만 나는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아 들었다.

이건 우리가 거쳐온 마을에서 주민들이 내어준 식량이었다.

신성 제국은 마도 제국과 달리 기근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제 입에 넣을 것도 모자란 게 백성들일 텐데 감사하다며 준 식량 아닌가.

그 의미를 생각하자면 불만을 가질 수가 없었다.

‘교황도 똑같은 걸 먹기도 하고.’

찐 감자 한 덩이를 오래 꼭꼭 씹어 삼킨 나는 물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오는 길에 너무 목이 말라서 다 마셔버렸기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 물 뜨러 가야겠네.’

샌디가 내 시중을 이것저것 들어주기는 하지만 하녀는 아니다.

게다가 신관들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했기에 샌디는 몹시 바빴다.

지금도 야영을 할 막사를 펼치고 있는걸.

라흰이라면 그러든가 말든가 설거지하는 김에 물도 좀 떠오라며 안 그래도 바쁜 애를 불렀겠지만 나는 차마 그러진 못했다.

‘저쪽에 우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보통은 마을에서 묵었지만 오늘은 아니다.

이미 일정이 꽤 지체되었으니 내일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노숙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도 마을에서 만들어 둔 여행객용 우물도 있고, 어느 정도 그늘이 지는 풀숲 자리라 그런지 노숙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우물에 도착하자 거기엔 선객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깜찍하고 조그마한 다람쥐 수인이 말이다.

귀와 꼬리를 아직 다 감추지 못한 어린아이였는데, 한눈에 사정을 알 수 있으리만치 남루한 차림이었다.

‘목이 다 늘어난 포대 자루 같은 옷에 신발은 없고 머리는 감지 못한 지 오래된 상태야.’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겁을 먹은 채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발을 헛디뎠는지 쿵 하고 넘어졌는데 그러고는 다시 일어나지를 못했다.

“저런, 괜찮니?”

저건 힘이 없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거다.

물로 곯은 배를 채운 게 하루 이틀 있었던 일은 아닐 테지.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 시선을 맞추었다.

“안녕. 나는 플로린이라고 해.”

“……아, 아아. 아.”

“잠시 내가 손을 댈 거야. 때리는 것도 아니고 혼을 내는 것도 아니니까 조금만 참아 주겠니? 다친 걸 치료해 주고 싶어서 그래.”

아이의 몸에는 생채기가 많았다.

간지러워서 긁어댔는지 피딱지가 앉은 목이며 살짝 이상하게 꺾여있는 발목 같은 게 눈에 밟혔다.

“아으. 아.”

여자아이일까, 남자아이일까.

정돈되지 않아 빗자루처럼 뻣뻣해진 머리카락이 온 얼굴을 뒤덮고 있어 잘 알 수가 없었다.

실어증인지 말조차 제대로 못 하니까 물어볼 수도 없고.

“자, 다 됐다.”

하지만 육신의 상처는 내가 치료할 수 있어도 마음의 상처는 낫게 할 수 없었다.

조금 잘해준다고 해서 실어증이 나아질 수는 없겠지.

“이제 안 아프지?”

아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제 몸을 더듬었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도 통증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 아아!”

“좋으니?”

“우, 우.”

자세히 보니 적갈색 눈동자가 도토리처럼 귀엽기도 하고.

나는 일단 우물의 물을 떠서 내 물주머니를 채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람쥐 아이는 내 옆을 떠나지 않았다.

‘음. 내가 지금 남을 챙길 처지가 되나…….’

조금 고민하던 나는 물을 한 바가지 더 펐다.

그러고는 소매 깃을 물에 적셔 아이의 얼굴을 조심조심 닦아주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치렁치렁한 소매가 불편해서 죽을 것 같았는데 잘 됐지, 뭐.’

이걸 이런 용도로 쓸 수 있다니, 소매는 제 할 일을 다 했다.

“브, 우브븝!”

“괜찮아, 괜찮아. 코는 닦아야지.”

아이의 얼굴은 정말이지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부르튼 건 그렇다 치고 짓무른 눈가며 콧물이 말라붙은 자국까지.

아무리 닦아줘도 끝이 나질 않아서 결국은 양쪽 소매를 다 쓰게 됐다.

“좋아. 이 정도면 말끔하네.”

“우…….”

“기분이 이상하니? 시원하지? 그런 걸 보고 씻는다고 하는 거야.”

“우……?”

“나랑 같이 가자. 너 하나 재울 곳은 있겠지.”

나는 요즘 배당받은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먹어봐야 멀미 때문에 다 토하기 때문에 배 속을 비워놓는 게 차라리 나았던 것이다.

‘먹을 건 내 걸 나눠주겠다고 하고, 내 마차에 태워서 나와 같이 자겠다고 하면 아무도 뭐라 못 하겠지.’

마도 제국의 수도까지만 데려가면 된다. 그러면 단테가 운영하는 곳에 맡길 수 있다.

만약 거기서 적응을 못 한다면 이안의 마을로 보내면 되고.

“엥. 성녀님, 그 애는 누구예요?”

“다람쥐 수인이네. 고아인가요?”

“어디서 주우셨어요?”

다시 야영지로 돌아가자 막사 세우기를 끝낸 신관들이 내게 모여들었다.

갑자기 키 큰 어른들이 다가오자 겁을 먹었는지 아이가 딸꾹질을 하더니 내 다리에 달라붙었다.

“어머나, 얘. 성녀님께 그러면 못 써.”

어느 신관 한 명이 아이를 떼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달라붙는 힘은 강해질 뿐이었다.

나는 버둥거리며 도리질을 치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둬. 내가 데려갈 테니. 신경 쓰지도 말고.”

“네? 하지만 성녀님. 마도 제국에 가는 길인데 이런 아이는…….”

“여기 근처에 고아원이 있어?”

“구, 국경 지대니까 아무래도 없지요.”

“그럼 얘를 그냥 여기 버려두고 갈까?”

까칠하게 눈썹을 추켜세우자 신관들이 서로를 돌아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데려갔다가 데려오는 거 외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너, 이름이 있니?”

그렇게 묻자 아이가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알아듣지 못하는 투였다.

“그러면 내가 지어줘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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