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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162화 (162/166)

162화

예상치도 못한 말에 사람들이 깜짝 놀랐고, 나도 놀랐다.

아버님이 여기에? 정말로?

하지만 어디에도 그 대단한 존재감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마법으로 모습을 숨긴 채 나를 주시하고 계신 듯했다.

“바쁜 일이 끝나고 저녁이 되면 모습을 드러내실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그, 그렇군.”

이안의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말에 가주들이 움찔하며 물러섰다.

그걸 지켜보던 나는 조금 눈물이 날 뻔했다.

‘역시 멋있어. 이안이 저렇게 침착하니까 나도 불안이 가라앉아.’

이안에게는 빈틈이 없었다.

물론 이안이 할아버님처럼 상대의 숨통을 어금니로 물어 찍어 누르는 듯한 위압감을 주는 건 아니었다. 아버님처럼 냉랭함을 뿜어내며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이안은 이안만의 처세술이 있었고, 그건 앞으로의 시대에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날을 세우는 모습이 아니라 산들바람처럼 유한 모습으로 단호함이 표출되니 꼬투리를 잡을 것이 없다.

강함보단 유함을, 무력보다는 요령을.

그게 나와 이안이 공유하고 있는 드리블랴네의 미래였다.

‘아, 이안의 옆에 가서 서고 싶어.’

갑자기 목이 타서 나는 아무 잔이나 잡고 음료를 들이켰다.

딸기 향이 나는 단맛이 입안에 가득 들어차자 정신이 번쩍 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그래서…… 아버님이 지금 나를 판단하고 계시다는 거지. 그렇다면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거야. 분명 유의미한 변화가 있을 거라고 믿어.’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아버님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지.

이안이 한 말을 믿지 않으시면?

나더러 가짜라고 하시면?

‘……아냐. 온 마음을 다해 믿기만 해도 모자라잖아. 너무 걱정하지 말자.’

그렇게 아버님을 믿는다고 다짐해 놓고도 막상 이때가 다가오자 긴장감에 피부가 따끔따끔했다.

아랫배가 차가워지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연회장 곳곳의 빈틈마다 간절한 시선을 보내며 잔을 꾹 움켜쥐었다.

어디에 계실지 모를 아버님이 나를 알아봐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어서 원위치로 돌아가고 싶었다.

* * *

저녁이 되자 연회장에는 인원이 낮 대비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시골에서 올라온 귀족들까지 입성을 마치자 드넓은 홀은 물론이고 테라스와 야외 정원까지도 사람으로 우글거렸던 것이다.

혹시 아버님이 내게 은밀하게 말을 걸어주실까 싶어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결국 피곤해진 나는 신성 제국 측에 제공된 휴게실에 틀어박혀 한참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다.

그런 뒤, 해가 지고 나서야 연회장에 다시 발을 들였는데 이번에는 내가 나타나자마자 입구에서부터 호기심 어린 적막이 흘렀다.

‘하아. 황제 폐하가 기선 제압을 제대로 하시네.’

눈치껏 아직도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았음을 알아차린 나는 내게 쏟아지는 부담스러운 시선들을 묵묵히 받아냈다.

‘황제 폐하, 아까 오실 줄 알았는데.’

교황도 와 있으니 당연히 예의상 얼굴을 비칠 줄 알았는데, 웬걸.

라흰도, 유리도, 황제 폐하도 아직까지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건 확실히 무례였다.

교황을 무시하는 처사니까.

‘교황이 화라도 내게 하고 싶으셨나?’

하지만 연회장 내 어디에도 교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니 설핏 불안감이 들었다.

“성녀님. 괜찮으세요? 어휴, 창백하신 것 좀 봐!”

손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하고 있자니 샌디가 내게 다가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더니 내 귓가에 대고 빠르게 속삭였다.

“근데 성녀님. 왜 화를 안 내세요?”

“화? 내가 왜?”

“아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답답하세요! 저쪽 성녀는 지금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요! 솔직히 저도 화가 나는데 성녀님이 길길이 날뛰지 않으니까 이상해요.”

아, 황제 폐하의 목적이 혹시 그건가?

‘신성 제국의 성녀’가 선을 넘도록 부추긴 다음 구속하려고?

그렇다면 훌륭한 작전이긴 했다.

라흰이라면 아마 열이 뻗쳐서 호흡곤란까지 왔을 테니까.

“솔직히 성녀님이 화 좀 안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또 반대예요. 지금 이게 몇 시간째인지!”

“음.”

“밥도 다 먹었고 할 것도 없는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귀족들은 왜 이런 짓을 하지요? 이 나라 주인이 코빼기도 안 내비치는 것도 이해가 안 돼요! 성녀님이 구경거리가 되신 기분이란 말이에요.”

나는 나를 위해 분통을 터트리는 샌디를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샌디와 내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려 보자면 참 큰 발전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마음씨 좋은 친구를 라흰 옆에 감정 쓰레기통으로 세워두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가 과거처럼 돌아간다면, 샌디.”

“네? 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 그리고 갈 곳이 없다면 마도 제국의 드리블랴네 가문에 도움을 청해.”

“네???”

샌디가 ‘미치셨어요?’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면 레티나가 널 찾아올 거야. 너 외에 다른 신관들도 갈 곳이 필요하다면 드리블랴네에 와서 이름을 말해. 국경 지대에서 드리블랴네의 이름을 외쳐도 돼. 거기에도 가문의 사람이 늘 상주해 있으니까.”

“무슨 말씀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갑자기 드리블랴네가 왜 나와요?”

샌디가 대경실색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나는 그런 샌디의 어깨를 살짝 쥐고는 진지하게 말을 마쳤다.

“기억해 둬. 언젠가 갈 곳이 없어지면 그러라는 거야.”

“그거 참 이상한데 구체적인 말씀이네요…….”

샌디가 의구심 어린 표정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뭘 더 말해준들 믿을 리 없으니 나는 이쯤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연회장 앞쪽에서 소형 돌풍이나 다름없는 소란이 일었다.

하도 시끄러워서 나는 라흰이 등장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물론 라흰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 이난나 님까지……!’

처음엔 그리운 얼굴을 보느라 라흰의 꼴을 눈치채지 못했다.

눈물이 핑 돌아서 나는 억지로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참았다.

그러다 잠시 뒤.

“……!”

증오스러운 라흰과 사상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나는 기함하고야 말았다.

어수룩하게 놀람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뭐랄까. 현기증이 나.

‘너 그렇게 치장하느라 늦게 나온 거지?’

솔직히 라흰은 그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잔뜩 부풀린 치맛자락이 시야에 확 박혀들었다.

그다음에는 분홍색 다이아몬드가 박힌 큼지막한 티아라와 귀걸이 세트. 목걸이와 반지가 너무 눈이 부셔서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적당히 해야 세련되고 예쁜데 모든 물건을 주렁주렁 달고 있으니 차마 뭐라 할 말이 없어.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라흰’은 그런 장신구를 압도할 만한 키나 체형, 얼굴도 아니란 거였다.

보석에 파묻혀 있는 꼴이 보기 좋을 리가 있나.

‘저거 다…… 다 내 평판인데.’

그러나 나를 쳐다보는 라흰의 눈에는 우월감이 가득했다.

‘어때? 내가 너보다 낫지?’라고 말하는 것 같아 기가 탁 막혔지만 동시에 맥이 풀리기도 했다.

‘정말 별 볼 일 없는 애구나, 너.’

고작 그런 게 갖고 싶어서 내 자리를 탐했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정식으로 20대 안주인이 되면 내가 하려고 생각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넌 그런 것 따위 알 바 아니겠지.

짐승처럼 먹고 자고 놀고 소비하고 누리기만 하면 될 테니까.

그게 화가 났다.

풍요로움을 누리기만 하고 책임도 의무도 무엇도 지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가.

만약 라흰이 내 자리에 앉아서 제대로 뭔가를 했더라면 이렇게 분노하진 않았으리라.

“그래, 이렇게 처음 만나게 되는군요.”

나와 라흰 사이의 신경전을 끊으며 이난나 님이 나를 향해 자상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난나 님의 목소리가 평소에 내게 들려주곤 하던 것보다 차갑다는 것을.

“아직 여독이 다 풀리지도 않았을 텐데 연회는 충분히 즐겼나 모르겠네요.”

탐색하는 듯한 눈빛이 내 전신을 훑어 내렸다.

나는 이난나 님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신성 제국에는 먹을 만한 것도 없었을 텐데 마도 제국을 보니 어떠하냐는 의미겠지.’

돌아온 게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요, 이난나 님.

그런 말은 애써 삼키며 나는 공손한 자세로 인사를 했다.

“가내는 평안하신지요? 신성 제국에서 온 플로린이라 합니다.”

라흰이 거기에 있는데 평온할 리가 없다.

나는 라흰이 집안을 엉망으로 헤집었을 거라고 확신하고 이렇게 푹 찌른 거였다.

이난나 님은 약 3초간 침묵한 뒤 미소를 지었다.

“성녀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아뇨, 그건 라흰이 저지른 짓이에요. 제가 아니라요.

비록 할 수 없는 말이지만 나는 속으로나마 진실 된 대답을 해보았다. 그러면서 내 입은 착실하게 해야 할 말을 뱉고 있었다.

“요즘 제가 천사 같아졌다는 소문을 들으셨나 봐요.”

생긋 웃으며 그렇게 대꾸하자 라흰이 모두가 들으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따님.”

그에 양어머니가 뒤에서 나직이 주의를 주었다.

나였다면. 내가 원래 내 자리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저렇게 주의를 주실 필요도 없었을 텐데.

이난나 님과 양어머니는 그저 나를 자랑스러워만 하실 수 있었으리라.

“흥. 천사는 무슨.”

라흰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

정말이지 예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행위에 은근히 나를 견제하던 이난나 님도 약간은 미안한 기색을 비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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