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어머, 세상에. 두 분…… 꼭 한 쌍처럼 잘 어울리지 않나요?”
“맞아요. 무척이나 잘 어울려요.”
마도 제국 황태자의 외양이야 이미 사교계에서 유명한 것이었다.
그의 매너나 화술, 댄스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또한 티 테이블의 주 화젯거리였으므로 황태자가 춤을 끝내주게 잘 춘다고 해서 그다지 놀라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신성 제국 성녀에 관한 건 모두들 굉장히 놀라워했다.
마도 제국 귀족들로서는 아무래도 신성 제국에 대한 편견이 꽤 많았다.
고루하고 제대로 놀 줄 모르며 원칙주의자에 융통성이라곤 좁쌀만큼도 없는 자들.
그러니 신성 제국의 성녀가 무도회 춤을 출 수나 있겠는가.
플로린이 유리의 손을 잡았을 때 그렇게 빈정거리는 자들이 반 이상이었다.
그런데 그 빈정거림은 춤이 시작되자 쑥 들어가고 말았다.
고풍스러운 멋은 있지만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성녀복인데도 플로린의 움직임에 따라 달리 보였다.
화려한 겉치장이 없어도 평생 사교댄스를 배워 온 사람처럼 동작이 정확하고 매끄러웠기에 시선이 한 번 더 갔다.
“황태자 전하도 아주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요즘 기분이 썩 안 좋으셨잖소. 다행이지요.”
“그런데 신성 제국도 우리 마도 제국 사교계와 같은 춤을 추던가요?”
“어머, 그러네요……?”
교과서나 다름없는 춤을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노부인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갸웃했다.
때마침 음악이 서서히 느려졌다.
이제 마무리인 것이다.
* * *
유리와의 춤은 몹시 즐거웠다.
우리는 마치 서로 호흡을 맞춰본 적 있는 것처럼 움직였고 가까이 닿아 있는 내내 서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냈다.
지켜보는 이들이 결코 내용을 유추할 수 없게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가 나이를 더 먹고, 우리 사이에 아무 사감이 없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정치 파트너가 될 수 있을 텐데.’
유리가 순순히 약을 마셔줄까?
약을 마시고도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어쩌지.
“이건 친구 이야기입니다만, 상담해 주시겠습니까?”
“좋아요.”
친구 이야기라고 하면 보통 본인의 이야기던데.
우리는 느린 박자에 맞추어 밀착한 채 천천히 움직였다.
유리는 나를 내려다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친구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가 말하길…… 친구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요?”
“네. 하지만 사랑과 집착이 무엇이 다르겠어요? 사랑하면 집착하고 싶고, 독점하고 싶고 다 그런 것 아닌가요?”
맞잖아, 자기 이야기.
나는 약간 심란해졌다.
마침 한 바퀴 돌다가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단테와 시선이 스치는 바람에 더욱 그랬다.
“친구는 자신이 선택받지 못할까 봐 가슴이 아프다고 해요. 왜일까요? 어디가 모자란 친구도 아닌데 말이에요.”
“음…….”
나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집착과 독점욕도 사랑이라면 사랑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와는 다른 것 같아요.”
“그래요?”
“네. 아마 친구분의 그 여성분도…… 그렇지 않을까 해요. 사랑의 정의가 서로 다른 거지요. 쉽게 말하자면 가슴에 품은 사랑의 모양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어려운 개념이네요.”
유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나 역시 그를 따라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제가 아는 사랑은 저 자신보다 상대가 먼저인 사랑이에요. 독점하고 싶고 소유욕이 일더라도 상대를 위해 참는 거지요.”
“그건…… 조금 이해가 안 가기도 하고요.”
유리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나는 키득거리고는 이내 유리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이안이 있었다.
내가 유리와 춤을 추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며 와인으로 목을 축이는 그는…… 솔직히 너무나 여유롭고 느긋해 보였다.
‘내가 사랑하는 모습이지.’
어른스럽고 성숙하고.
항상 나보다 한발 먼저 나아가 있는 모습 말이야.
“친구가…… 모자라거나 부족해서 선택받지 못하는 건 아니라는 거군요.”
내 눈길이 향하는 곳을 알아차렸는지 맞잡고 있던 유리의 손에 힘이 약간 들어갔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전하.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틀 안에 구겨 넣지 않고, 상대가 생긴 모양 그대로 사랑하는 것. 그게 중요한 사람도 세상에는 존재하니까요.”
“…….”
“세상에선 그런 마음을 일컬어 존중이라 부르기로 했어요.”
사실 황제가 될 유리가 알 필요는 없는 개념이었다.
그가 오직 ‘황제’이기만 할 거라면야.
허나 내 연인은 존중하는 법을 아는 이여야만 했다.
나를 제멋대로 다루려고 하거나, 한계를 정해놓고 거기에 따르라고 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나를 꾸미려 드는 건 딱 질색이었다.
아니, 질색 정도가 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마침 음악이 완전히 멎었다.
그러나 유리는 내 손을 쥔 채로 놓지 않았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그 예쁜 눈으로 나를 직시하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면…… 내가 그 약을 먹고도 널 여전히 사랑하면.”
“!”
“그 존중이라는 걸 배울 수 있게 될까.”
유리의 눈이 슬픔으로 가득했다.
나는 차마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상어의 애착을 끊는 약을 찾고 있다는 걸 눈치챘구나.’
존중을 배워보겠다는 유리에게 나쁜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을 때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난 네가 있는 힘껏 행복해지기를 바라.”
“그 행복에 네가 포함되지는 않겠지만?”
“애착은 네가 원해서 생긴 게 아니니까. 그게 끊기고 나면 너는 좀 더 자유로워질 거야.”
“그러기를 바라는 거겠지.”
다소 시니컬하게 대꾸하던 유리는 허리를 바르게 펴고 내게서 두 발짝 물러났다.
예의 바르게 마무리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 나 역시 무릎을 살짝 굽혀 알맞은 인사를 했다.
돌아서는 유리의 등이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 * *
마법이란 굉장히 오묘한 힘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눈앞에서 폭죽이 터지고 커다란 현상이 일어나 충격을 주는 것만이 마법이라 여긴다.
한때는 그랬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키락서스가 쓰는 마법은 보다 은밀하고 교묘했다.
그는 북적이는 인파를 싫어했고 낯선 타인과 살갗이 닿는 것을 혐오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들러붙는 연회장 같은 곳은 딱 질색이었다.
그리하여 키락서스는 꼭 참석해야 하는 연회만 참석했고 그마저도 잠깐 얼굴을 내비친 뒤엔 곧장 마탑에 가버리고는 했다.
그럼 만약 절대 중간에 빠질 수 없는 경우가 생기면 어떡하냐고?
그럴 때를 대비해 키락서스가 만든 마법이 있었다.
일명, 일시적 존재 소거 배리어.
연회장 내에서 가장 쉬기 좋은 장소를 골라 배리어를 치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공간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분명 연회장 내의 한 공간이 텅텅 비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근처를 스쳐 지나가기만 했다.
물론 그 빈 공간 속에 키락서스가 있다는 건 당연히 눈치채지 못했다.
“네 말이 맞구나.”
보통 혼자만 사용하는 그 공간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건 아주 이례적인 경우였다.
키락서스는 붉은 머리칼의 젊은 사내를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저쪽이 진짜라는 거지.”
“네.”
“진짜라고 생각한 이쪽이 가짜라는 거고.”
키락서스가 분홍색 다이아몬드로 온몸을 치장하고 있는 라흰을 훑어봤다.
자신이 목숨을 내어줄 만큼 아끼는 아이라면 어떤 모습을 하든, 또 어떤 치장을 하든 그저 예쁘기만 했다.
그 아이를 이상하다고 손가락질하는 놈이 있다면 직접 찾아가 열 손가락을 모조리 부러트릴 테니까.
하지만 그건 주관적인 생각이고.
객관적으로 라흰의 차림은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대단히 과했다.
꼭 오래전, 그를 향해 거만하고 질척한 눈빛을 보내던 그 여자처럼.
이안의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잠깐 배리어를 풀었던 키락서스는 ‘라흰’의 광기 어린 눈빛에서 ‘그 여자’를 보았다.
이 정도면 자신이 가짜인 걸 알아봐 달라고 광고하는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가짜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가둬두는 게 어떨지요?”
“진짜와 가짜를 다시 원래대로 돌릴 방법이야 있다마는, 확실히 하기 위해 진짜와 대화를 해봐야겠구나. 한 마디만 나눠봐야겠다.”
방법이 있다는 말에 이안은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했다.
키락서스는 마침 춤이 끝나 마실 것을 찾는 ‘플로린’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그래서 그때 죽일 수 없었던 건가.’
익숙한 걸음걸이, 익숙한 손짓, 익숙한 표정이다.
크고 둥근 눈과 동글동글한 얼굴형이 아주 눈에 익었다.
‘성녀복보다는…… 최고급 드레스를 입어야 할 것 같군.’
또한, 저 흔한 머리 색보다 끝으로 갈수록 붉어지는 은발이 어울릴 것 같았다.
샴페인이나 와인이 아니라 주스 잔을 쥐는 모습에 실소한 키락서스는 배리어를 거두어들였다.
“아버님!!!”
그러자마자 왼쪽에서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셔서 깜짝 놀랐어요. 언제 오셨어요?”
은발을 지닌 ‘라흰’이 그에게 팔랑팔랑 다가와 스윽 하고 팔짱을 꼈다. 탐욕스러운 붉은 눈이 번들거리며 이안을 스쳤지만 그건 정말 잠깐일 뿐.
곧 키락서스에게 집중한 ‘라흰’이 만족스레 웃었다.
그 순간, ‘플로린’이 그를 보았다.
‘아.’
한 마디.
단 한 마디조차 필요가 없었다.
‘진짜’를 확신하는 것에는.
키락서스는 저를 향하는 둘의 눈빛에서 답을 내렸다.
“꺄악!”
그러자마자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제 팔에 달라붙어 있는 ‘라흰’을 밀쳐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