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비 공작부인의 미래 계획은 공작가 가정교사.
상상 이상으로 너무 귀여운 아이들 때문에 내가 처한 상황은 까맣게 잊은 채 작은 손에 이끌려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때 가장 어려 보이는 아이가 내 드레스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안아조….”
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가장 어린아이. 이 아이가 자스민일 것이다.
나는 허리를 숙여 자스민을 안아 들었다. 그러자 자스민은 몸에 힘을 풀고 내게 기대었다.
“자스민, 그러면 못 써! 손님이시잖아!”
제일 나이가 많고 의젓해 보이는 남자 아이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남자아이는 그래도 미안했는지 잠이 든 자스민을 살짝 노려보았다. 그리고 내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인사가 늦었네요, 둘째인 토마 차일드라고 합니다.”
그를 시작으로 저택으로 향하는 동안 아이들은 한 명씩 자신을 소개했다.
“셋째 렌 차일드에요.”
“넷째 레몬이라고 해요!”
“뭐래, 내가 넷째거든. 넷째 그린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사한 쌍둥이, 레몬과 그린이 서로 자신이 먼저 태어났다고 주장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귀여운 아이들을 보며 웃고 있는데 셋째 렌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내 품에서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말했다.
“그리고 막내 자스민이에요.”
렌의 웃음에 나는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지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미소 지었다.
“그렇구나, 반가워.”
하나같이 귀여운 아이들의 소개를 받으며 저택에 거의 도착한 그 순간이었다. 앞장서서 나를 안내해주던 아이들의 표정이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순식간에 굳어갔다.
고개를 돌려 내 등 뒤를 바라보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첫눈에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소설에 나온 것처럼 칠흑같이 검은 머리에 차일드 가의 상징인 붉은 눈동자를 한 미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싸늘하게 아이들을 바라봤다. 내 품에 안긴 자스민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의 눈빛에 눈치 빠른 시녀 한 명이 내게서 자스민을 받아 갔다.
“우웅….”
자스민은 내게서 떨어지기 싫은 것처럼 옷깃을 붙잡았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시녀의 표정에 나는 자스민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내 품에서 자스민이 사라지자 바리다스는 내게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내 손을 붙잡고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맨살에 입술이 닿는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라 순간적으로 그가 닿은 곳에 열기가 올랐다.
“처음 뵙겠습니다. 바리다스 차일드라고 합니다.”
그의 인사에 나는 아차 싶어, 한 손으로 치마를 들어 올리며 그에게 인사했다.
“피오라 티아네…… 드 데이먼이라고 합니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피오라의 풀 네임을 말했다. 안 틀려야 할 텐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한 손을 잡았다.
“마중에 늦어 죄송합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괜찮아요. 동생분들이 매우 귀엽네요.”
나는 그의 등장에 아이들이 기가 죽은 것을 알고 웃으며 말했다. 내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아이들을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분명, 내가 오늘 중요한 손님이 있으니 나오지 말아 달라고 말했을 텐데.”
그의 목소리와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당사자가 아닌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면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위압감은 더할 것이다.
바리다스의 행동에 주눅 든 아이들이 보였다. 아무리 약속을 어겼다고 해도 아직 어린아이들일 뿐이었다.
내가 아이들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늦는다고 해서, 저희가 대신 황녀님을 맞이한…거예요….”
바리다스의 눈빛에 기가 죽은 것인지 뒤로 갈수록 렌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렌의 말이 끝나자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며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내 말을 어겨도 되는 건 아니지.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거라.”
아까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단호했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들인데 조금만 더 친절하게 대해주면 좋을 텐데.
그의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이어 그들은 동시에 “네”라고 대답한 뒤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인사했다.
“두 분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나는 인사하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미소 지었다.
“너희도 좋은 하루 보내렴.”
내 인사에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이라도 밝아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은 곧 서로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원에는 몇 명의 사용인들과 나 그리고 바리다스만 남았다. 나와 그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앉았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들어가시죠.”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은 처음이라 매우 어색했다. 그의 팔에 어색하게 팔짱을 낀 채 공작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앞에 서자 문이 저절로 열렸고, 안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사용인이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수많은 사람들에 놀랐지만, 나는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저택의 실내를 보게 된 나는 더는 표정 연기를 할 수 없었다.
제국의 역사를 함께한 가문답게 저택 내부는 무척이나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벽마다 장식된 조각품과 그림들, 거기에 우아한 벽지와 화려하게 장식된 천장까지. 저택 전체가 마치 박물관 같았다.
나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음에 드십니까?”
내 표정에서 그렇게 티가 났나?
그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나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노력하며 대답했다.
“네, 매우 아름답네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바리다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미소를 보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남주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바리다스에게 저택을 소개받은 뒤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내가 준비된 자리에 앉자 어디선가 시녀들이 나와 화려한 디저트들을 내 앞에 놓았다.
순식간에 여러 가지 디저트들과 차가 내 앞에 세팅되었다.
나는 감탄하며 그녀들이 준비한 마들렌을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다.
담백하면서도 상큼한 오렌지 향이 느껴지는 맛에 저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함께 나온 홍차 역시 진하며 부드러웠다.
고급진 맛이라는 게 이런 건가?
“입맛에 맞으시나 보군요.”
바리다스는 왠지 비웃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속으로 감탄한 줄 알았는데 다 티 났나 보네.
아무렇지 않게 호호 웃었지만 부끄러움에 내 얼굴에 열이 올랐다.
생각해보면 바리다스와 피오라는 처음부터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둘은 서로의 목적을 위해 약혼을 한 것이었고, 둘의 약혼은 빠른 시일 내에 결혼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피오라는 바리다스의 생각보다 멍청하고 허영심이 강했다. 게다가 차일드 가의 이름을 등에 업고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녔다.
그러니 그가 결혼을 하지 않고 약혼만 한 채 3년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낸 것이겠지.
아이들이 나오는 부분 외에 원작을 설렁설렁 읽은 나는 자세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확실히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원작이 시작되기 전 시점이었고, 여자 주인공이 처음 등장하는 건 바리다스와 피오라가 약혼을 하고 3년이 지난 뒤였다. 그 부분은 거의 초반에 등장하기에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최대한 결혼을 미루다가 여주가 오면 약혼녀 자리에서 은근슬쩍 빠진 다음에 아이들 가정교사가 되면 되는 거지!
정말, 다시 생각해도 완벽한 계획이었다.
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아이들을 떠올리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내가 아이들을 생각하며 히죽이고 있던 그때 바리다스가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약혼식은 한 달 뒤에 치러질 예정입니다. 오늘은 이만하고 방으로 돌아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일부터는 제 집사에게 안내를 받으시면 됩니다. 업무가 바빠 끝까지 에스코트하지 못하는 점 사과드립니다. 황녀님.”
당연히 바쁘겠지. 공작이 된 지 얼마 안 지났을 테니까.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와 가는 것보다 집사랑 가는 게 편할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은근슬쩍 아이들과 함께하기도 쉽고 말이지.
“비록 필요에 의해 진행된 약혼이긴 하나, 제가 부족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선생으로서 부족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좋게 봐주세요. 학부형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바리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나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어졌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저택을 안내해줄 집사에게 시키시면 됩니다. 웬만한 것은 그가 금방 처리해 줄 것입니다.”
말을 마친 바리다스가 방을 나가려는 순간 나는 그를 붙잡았다. 내가 자신을 잡을 것을 예상하지 못한 바리다스의 붉은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그의 시선이 내가 붙잡고 있는 소매를 향했다가 나에게 옮겨졌다.
그의 소매에서 손을 뗀 나는 그의 눈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공작님의 동생분들과 대화를 해도 될까요?”
내 질문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지웠다.
“그건 아이들이 결정할 일이지,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바리다스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긴 했다. 어리다고 해서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보호자한테 허락을 받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어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무언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들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의 질문에 아까 본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러자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을 정말, 정말 많이 좋아한다는 의미를 담아.
“네.”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군요.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리다스는 내게 인사한 뒤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런 걸 물어본 거지? 설마, 내가 동생들에게 나쁜 목적으로 접근하거나 괴롭힐까 봐 그런 건가.
원작에서의 피오라가 한 짓을 떠올리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학부형님. 저는 선량한 선생님이니까요. 학부형님은 전적으로 저를 믿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