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비 공작부인의 미래 계획은 공작가 가정교사
로나와 레나를 따라 내려가자 커다란 식탁 앞에 바리다스가 앉아 있었다. 내가 오기만을 기다린 듯 앞에는 아무 요리도 나와 있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귀여운 아이들과 식사를 할 생각에 계단을 내려오며 들떴던 마음이 폭삭 가라앉았다.
“앉으시죠.”
바리다스의 말에 레나가 의자를 당겨 주었고, 나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속삭이며 자리에 앉았다.
내가 식탁에 앉자 하나둘씩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스프와 스테이크가 나왔고 그것들을 위주로 여러 가지 요리가 세팅되었다.
바리다스는 나이프를 잡고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나는 어정쩡하게 나이프를 잡았고 동시에 걱정이 밀려왔다.
빙의 전 나는 요리에 재능이 없었는데, 그건 요리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앞에 있는 스테이크는 고사하고 분식점 돈가스도 똑바로 못 써는 사람이었다. 망설이던 나는 스테이크에 칼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내 손이 부드럽게 스테이크를 잘라냈다.
스테이크라 자르기 편한 건가? 라고 생각해 봤지만 아니었다. 고기는 부드럽다기보다는 단단하게 익어 있었다.
순간 깨달았다.
피오라의 기억은 내게 없었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행동이나 습관은 몸에 배어 있는 그대로 나온다는 것을. 그게 아니고서야 내가 이렇게 완벽하게 스테이크를 썰 수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오른손잡이였던 내가 지금은 왼손으로 칼을 들고 있었다.
그래도 신이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안도하며 잘 잘린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아주 부드럽고 맛있었다.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스테이크의 맛을 음미했다. 그런 나를 향해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저택은 좀 둘러보셨습니까?”
꿀꺽.
나는 미처 다 씹지 못한 스테이크를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고깃덩어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질질 짜다가 잤는데요. 라고 대답할 수 있을 리가. 고민하던 나는 흠흠 헛기침을 몇 번 뱉은 뒤 호호 웃으며 최대한 귀족적인 화법을 구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먼 길을 오느라, 몸이 좋지 않아서 아직 구경은 하지 못했답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아까는 너무 학부형 대하듯 했단 말이야. 다행히 그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듯했다. 무심하게 스테이크를 한 조각 더 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식사를 마친 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괜찮은데요. 남주 아니, 학부형님. 사양하고 싶어요.
속으로는 손사래에 고개도 젓고 입으로도 싫다고 다섯 번쯤 말했지만, 겉으로는 고맙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친절에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그렇게 정적이 가득한 식사가 계속되었다. 아마도 고독과 무음이 반찬인 것 같았다. 그래도 공작가의 요리는 매우 좋았다.
맨 처음 나온 스프와 스테이크도 훌륭했지만, 그 뒤로 나온 칠면조 구이나 샐러드도 매우 훌륭하고 맛있었다.
하지만 피오라는 내 생각보다 소식가였다. 얼마 먹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배가 불렀다. 나는 아쉽지만 조심스럽게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하인들이 여러 디저트를 내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감탄 할 수밖에 없었다.
크림이 가득 올라간 케이크와 싱싱한 과일로 장식된 타르트, 보기만 해도 달콤한 슈크림까지, 방금 배가 다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단짠은 언제나 진리지!
나는 조금 전 배가 부르다고 생각했던 사실도 잊고 딸기가 가득 올라간 케이크를 잘라 접시로 옮겼다.
그렇게 케이크를 두 조각이나 먹은 나는 마지막으로 딸기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그러자 달콤하고 상큼한 딸기의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우와, 이제 진짜 배불러.
내가 포크를 내려놓자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요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가의 요리들은 진짜로 맛있었다. 특히 딸기 케이크가 명품이었다. 두 조각밖에 못 먹은 것이 아쉬울 정도로 말이다.
“네, 맛있었어요.”
내 대답에 바리다스는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제 저택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잡으라고 하는 건가? 머뭇거리던 내가 바리다스의 손을 잡자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날 의자에서 일으켜 세워 주었다.
문제는 내가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높은 굽 때문에 균형을 잡지 못한 내 몸은 앞쪽으로 휘청거렸다. 다행히도 바리다스가 내 팔을 잡아줘 험한 꼴은 면할 수 있었다.
바리다스는 내가 휘청거릴 줄 몰랐던 것인지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구두 때문인데.
그의 표정을 보니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고마워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는 계단으로 향했고, 그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자 공작가 성 꼭대기에 있는 발코니가 나왔다.
그곳은 공작가의 정원과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와아…”
해가 저물어 달빛과 가로등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공작가의 정원은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정원이 넓어 길을 잃기 쉬우니, 당분간은 사용인과 동행하시고 조금 익숙해지시면 혼자 다니셔도 상관없습니다.”
확실히 공작가의 정원이 넓긴 했다. 당장 보이는 분수만 해도 두 개인 데다가, 화려하게 장식된 건물, 그리고 연무장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시선을 돌려 공작가의 숲을 바라봤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숲은 무언가 두려우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제국의 수도가 아닌 차일드 공작가의 영지에 있는 저택과 숲에서 주로 이뤄졌는데 소설의 주 배경이 되는 숲이 저곳일 것이었다.
직접 가서 눈으로 본다면 소설 내용이 조금은 기억날 것 같은데.
나는 조만간 숲에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바리다스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숲과, 저택 끝에 있는 탑에는 가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헉, 뭐야 어떻게 알았지? 깜짝 놀란 내가 제 발 저린 것처럼 그를 돌아봤고 그런 내 모습에 그는 작게 웃었다.
“맹수가 나오거든요. 정 가고 싶으시다면 기사와 동행하시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알았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내 시선은 공작가 숲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그때, 멀리서 바람이 불어왔다.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어깨를 스치는 바람의 온도는 차가웠다. 정원의 꽃들은 막 봉우리를 맺었으니 아직은 이른 봄인 듯했다.
내가 어깨를 조금 떨자 바리다스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실내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리다스는 내게 응접실과 집무실 위치를 차례로 알려줬다. 다음으로는 공작가 저택과 연결된 온실을 보여주었는데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꽃들과 처음 보는 여러 가지 꽃들이 은은한 조명 아래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온실 구경까지 모두 마친 그가 나를 내 방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솔직히 이렇게 넓은 저택에서 내 방까지 찾아갈 자신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우리가 막 방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어딘가에서 작은 두 개의 그림자가 튀어나와 내게 달려왔다.
그들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림자들은 잠옷으로 갈아입은 레몬과 그린이었기 때문이었다.
레몬은 손에 커다란 곰인형을, 그린은 커다란 책을 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여.”
아이들은 나를 보고 수줍은 듯 두 뺨을 붉게 붉히고 내게 인사했다. 내가 손을 흔드는 것으로 둘에게 화답하자 환하게 웃은 그들은 바리다스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형님.”
“큰오빠.”
레몬과 그린이 두 눈을 반짝이며 바리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두 아이의 기대와 달리 그들을 바라보는 바리다스의 눈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바리다스의 싸늘한 대답에 아이들은 한 발짝씩 뒷걸음질 쳤고, 난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속으로 아이들을 응원해 주었다. 그때 레몬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아까, 말씀 어겨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두 아이는 동시에 허리를 숙이고 입을 모아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 모습에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화 안 났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리고 그는 손으로 복도에 있는 커다란 조각상을 가리키며 나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너희들도 말이다.”
그러자 조각상 뒤에 숨어 있던 렌과 토마가 조심스럽게 바리다스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눈치를 보며 차례로 그린과 레몬 옆에 섰다.
내가 바리다스의 뒤쪽에서 두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자 둘의 표정이 밝아졌다.
“넷 모두, 잘 시간이 되었으니 그만 들어가서 자는 편이 좋겠구나.”
그의 말에 아이들은 표정이 환해졌다. 그들은 나와 바리다스에게 순서를 지켜 인사를 한 뒤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복도에는 나와 바리다스만이 남았다. 아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황녀님께서도, 이제 그만 주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바리다스는 내 손등에 입을 맞춘 뒤 바로 옆방으로 들어갔다. 공작부인이 사용하는 방이라 그런 것인지 공작인 그의 방이 바로 옆에 있었다. 말이 옆방이지 제법 떨어져 있었지만 말이다.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로나와 레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옷을 벗긴 뒤 욕조로 나를 안내했다.
금으로 장식된 욕조에는 장미 꽃잎이 가득 떠 있었다. 차마 목욕 시중까지 받을 수 없었던 나는 그녀들을 돌려보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욕조에 앉아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졌다.
멍하니 벽을 바라보던 내 머릿속으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잊고 있던 원작의 내용이었다. 원작에서 아이들과 바리다스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바리다스와 아이들은 그냥 형제가 아닌 이복형제이기 때문이었다.
바리다스의 어머니가 죽고 재혼을 한 대상이 아이들의 어머니였다. 그가 공작이 된 지 얼마 안 지났다고 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나는 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원작에서 그의 나이가 스물일곱이니, 아마 지금 그의 나이가 스물네 살. 공작이 되기에는 한참 어린 나이였다.
그런 그가 공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여행 도중 마차 전복 사고로 숨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는 어린 나이에 가문과 아버지가 남기고 간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다.
내내 차갑기 그지없었던 그의 태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그는 이미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책임져야 할 아이들도 다섯이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바리다스가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부모님을 모두 여읜 뒤 지금껏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서로만을 의지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나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앞으로는 내가 너희들을 사랑해줄게.
나는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