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공작가의 새 바람
늦은 새벽. 나는 품으로 파고드는 온기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뭐지?
잠에서 덜 깬 내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이불을 들어 올리자, 품 안에서 꼬물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달빛에 희미하게 빛나는 보랏빛 머리가 보였다.
자스민?
이상한 물체가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는 것도 잠시, 나는 곧 의아함을 느꼈다.
왜 자스민이 여기 있는 거지?
“엄마… 왜 이제 와써?”
멍하니 자스민을 바라보던 나는 아이의 작은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내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전대 공작부인들이 사용하던 방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 자신의 어머니와 나를 착각한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가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자 자스민은 더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이미 아이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안아조, 빨리… 안아조.”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 때문에 나는 자스민을 안아 주었다. 그러자 자스민이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나는 그런 아이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천천히 거닐며 등을 토닥여주자, 금세 그녀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대체 언제 온 거지?
나는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내 품에 안긴 자스민을 조용히 바라보다 작은 두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외로웠구나.
“괜찮아, 이제 내가 있잖아.”
나는 자스민의 등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그러자 자스민의 헐떡임이 잦아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그 옆으로 누웠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이번에는 누구지?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내 질문에 아직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셨다면 정말로 죄송해요. 혹시, 들어가도 될까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방문이 열렸고 잠옷 차림의 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나를 끌어안고 잠든 자스민을 발견하자 안도한 표정이었다.
“역시 여기 있었네요.”
렌은 자스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붉은 눈은 나이답지 않게 슬퍼 보였다.
“죄송합니다.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네요.”
어른스럽게 말하며 내 앞으로 다가온 렌은 자스민을 자신에게 달라는 듯 팔을 벌렸다.
“제가 방에 데려다주고 올게요.”
그 말을 하는 렌은 나이답지 않게 너무 의젓해 보였다.
이건, 일찍 철이 들어도 너무 들었는데.
아이가 일찍 철이 들었다는 건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괜찮아, 나도 자스민이랑 자고 싶은걸. 혹시 자스민과 함께 자도 될까?”
내 말에 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 높게 팔을 벌려왔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 완강해서 더 걱정이 되었다. 저건 절대, 어린아이가 지을 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에요.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의 말에 나는 반대 팔로 렌을 끌어안았다.
“렌, 너도 아직 여덟 살이야. 너도 아직 어린이라고 조금 더 어른한테 의지해도 괜찮아.”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내 품에서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침대에 앉은 뒤 내 옆자리를 두드렸다.
내 방의 침대는 꽤나 커 어른 셋도 누울 수 있을 정도였다.
“아직 날이 춥단다. 이리 와, 렌.”
렌은 내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서서 머뭇거렸다. 내가 다시 한번 침대를 두드리자 그녀는 조심스레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녀의 팔을 당기자 렌은 쭈뼛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그 모습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한 팔로는 자스민을 안고 반대 손으로는 렌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그렇지, 이제 자자. 렌.”
“…네.”
* * *
창문으로 노란 아침 햇살이 비쳐 들었다. 잠에서 깬 나는 내 옆에서 곤히 잠든 자스민과 렌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고 주전자를 든 로나가 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내 옆에 누워있는 두 소녀를 보고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내가 손가락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자 고개를 끄덕였다.
“주전자는 두고 가 줘.”
내가 입 모양으로 말하자 그녀는 주전자를 내려놓고 커튼을 친 뒤, 내게 인사하고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두 아이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고르게 숨을 내쉬며 잠든 아이들은 마치 천사 같았다.
그때, 렌이 눈을 떴다. 그녀와 내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고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그 모습이 마치 토마토 같아 나는 미소 지었다.
“좋은 아침, 렌.”
내가 인사하자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을 이불로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물을 따라 주었다. 적당히 미지근한 물이었다.
렌이 물을 다 마신 것을 확인한 나는 그녀를 보고 팔을 하늘로 쭉 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아이들을 낮잠 재운 뒤에 기지개를 켜게 하는 것은 내가 선생님으로 있던 어린이집의 규칙이었다. 렌은 내가 기지개를 피자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멀뚱히 날 바라봤다.
“따라 해봐,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하면 키가 빨리 자란단다?”
내 말에 렌은 어정쩡하게 양팔을 하늘로 올렸다. 그 모습에 나는 그녀의 양팔을 잡아 쭈욱 당겨 주었다.
“더 쭉, 더 강하게!”
팔을 내린 렌은 기지개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준 나는 말했다.
“잘했어.”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마침 잠에서 깬 건지 옆에서 꾸물거리던 자스민이 내게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눈을 뜬 그녀는 날 바라봤다.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고 고개를 갸웃거린 자스민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엄마가… 아니어써…”
순식간이었다. 나와 렌이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눈물을 쏟아내며 저택에 떠나갈 듯 울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아!!”
그 소리에 자스민과 렌을 찾던 시녀들이 노크를 하며 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지끈대는 머리를 짚었다. 이 정도의 목소리라면 아마 바로 옆방에 있을 바리다스에게도 들렸을 것이었다.
자스민의 전담 시녀로 보이는 사람이 그녀를 안고 어르고 달랬지만 자스민의 눈물을 멈출 줄 몰랐다.
시녀의 얼굴에 곤란한 빛이 스쳐 지나갔고 고민하던 나는 그녀에게서 자스민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순순히 내게 자스민을 넘겼다. 안아주는 사람이 바뀌자 자스민은 잠시 울음을 멈추고 내 얼굴을 확인했다.
나 또한 엄마가 아닌 것을 확인하자 그녀는 지치지도 않는지 엄마를 부르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 방법이 먹힐지 모르겠는데.
엄마를 찾는 아이에게 조금 잔인한 방법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얼굴을 낮춰 자스민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꾸 울면, 좀 이따가 간식 안 준다.”
내 말에 자스민은 순식간에 눈물을 그쳤다.
어린이집에서 쓰던 방법이었는데 여기서도 통하는구나. 역시 어린아이에게는 간식이 최고인 모양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나는 시녀들이 들고 있는 스프와 빵을 발견했다. 귀족들은 빵과 스프와 같은 간단한 걸로 아침을 때운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성장기 아이에게 아침은 중요하단 말이지.
고민하던 나는 아직 울먹이고 있는 자스민의 등을 토닥여주며 렌의 손을 잡았다.
“우리 아침 같이 먹을까?”
“네!”
렌의 대답에 나는 다시 시녀들에게 시선을 돌려 로나와 레나를 찾았다. 그녀들은 먼발치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나, 레나. 너희는 내 옷이랑 애들 옷 좀 가져다줘. 그리고 식당에 음식을 준비해주고 한 명만 아이들의 옷을 가져다 줘, 다른 사람들은 돌아가서 할 일 해도 괜찮아.”
내 말을 들은 시녀들은 해산되었고 로나와 레나는 내게 차분해 보이는 푸른색 드레스를 가져왔다. 드레스에 그렇게 많은 장식이 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입은 것 보다 백만 배쯤 편한 드레스였다.
그리고 아이들의 옷을 한 벌씩 가져와 입혀주었다.
아이들도 옷을 다 갈아입은 것을 확인한 나는 렌과 자스민의 손을 양손에 하나씩 잡았다.
“밥 먹으러 가자.”
식당으로 내려가자 세 개의 접시 위에 소시지 그리고 달걀 프라이가 잘 구워져 있었다. 거기에 스프와 빵, 샐러드도 나와 있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아침 식사라고 부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자리에 앉자 아이들도 나를 따라서 식탁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게씁미다.”
두 아이는 차례대로 인사한 뒤 숟가락과 포크를 들고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렌과 소소한 대화를 하며 식사를 했는데, 렌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의젓한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나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나를 부른 뒤 아이들에게 물었다.
“디저트는 뭐로 할래?”
내 말에 두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렌은 사과 타르트를 자스민은 푸딩을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로나에게 부탁해 두 가지 음식을 가져와 달라고 했다.
디저트까지 배불리 먹고 난 뒤, 산책을 하고 싶다는 자스민에 말에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막 정원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예상치 못한 인물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바리다스였다. 그는 정원 입구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나에게서 아이들에게로 움직였다.
차가운 그의 붉은 눈동자에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