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6)화 (6/207)

5. 공작가의 새바람

나와 아이들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그때, 바리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황녀님.”

내게 인사하는 그의 표정과 눈동자는 아까보다 다정해져 있어,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나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마치 아이들이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그는 아이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두 아이의 표정은 가라앉았고 그것을 눈치챈 나는 아이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네요, 공작님.”

내가 인사를 받아주자 바리다스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렌을 잡고 있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렌은 순순히 내 손을 놓아주었고 그는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절대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은 감촉이 손등에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그는 내 손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야 아이들을 바라봤다. 

“너희들도 좋은 아침이구나.”

그제야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는 그가 생각보다 아이들을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리다스와 인사를 마친 렌은 내 손을 잡은 뒤 절대 안 놓겠다는 의지를 담는 것처럼 내 팔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스민은 내게 안아달라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두 동생의 모습을 본 바리다스의 눈동자가 커졌다가 점차 가라앉았다. 

“그새 아이들과 많이 친해지신 모양입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비꼰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마도 그는 진심으로 신기해서 한 말일 것이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참 착해요. 저를 잘 따르고요.”

내 대답에 바리다스는 내게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두 소녀를 바라봤다.

“그렇군요.”

그리고 바리다스는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산책을 하러 가는 것이라면, 저도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싫은데요! 수업 참관일은 오늘이 아닙니다. 학부형님!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아이들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저는 상관없지만 아이들이…”

나는 아이들의 결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두 아이는 그가 그렇게도 좋은 것인지 나를 바라보며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들의 눈빛을 본 이상 나는 수락 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는 것 같네요. 같이 가시죠.”

내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반면 내 마음은 근심으로 어두워졌다. 이미 양손에 아이들을 잡고 있는 내게 바리다스가 손을 내민 것이었다. 심지어 두 아이 모두 내 손을 놓기 싫은 것처럼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곤란하네. 

나는 내 앞에 내밀어진 바리다스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 그 순간 발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형님!”

뒤를 돌아보자 그린과 레몬이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와 아이들에게도 인사를 한 쌍둥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같이 산책 가는 건가요?”

그린이 질문했고 바리다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러자 두 쌍둥이의 눈이 반짝였다. 

“저희도 함께 가도 될까요?”

쌍둥이의 질문에 바리다스는 내 의사를 묻는 것처럼 날 바라봤다. 그러자 렌이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녀를 내려다보자 간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음, 같이 가고 싶다고 하는 거지? 나는 내 생각이 맞길 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히 내 생각이 맞는 듯 바리다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네 아이의 표정이 모두 환해졌다. 그때 레몬의 시선이 나와 렌, 자스민에게 고정되었다. 그녀는 맞잡고 있는 나와 아이들의 손을 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손을 다 잡아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처음으로 내 손이 두 개인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때였다. 바리다스가 레몬과 그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두 아이는 선뜻 그의 손을 잡지 못하고 망설였다. 

“잡고 싶은 거 아니었나?”

바리다스의 말에 그제야 아이들은 머뭇거리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역시 원작대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네. 

나는 그가 아이들의 손을 잡아준 것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정원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바리다스가 어색한 듯 그의 눈치를 살피며 산책을 했고, 나도 그가 어색해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불편한 산책이 계속되었다.

그런 분위기 속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리다스였다.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형식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배려 받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네, 마음에 들어요.”

내 말에 바리다스보다 아이들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신이 난 것인지 내 손을 잡은 자스민은 팔을 붕붕 돌리기 시작했다.

“황녀님은 떠나지 말구, 오래오래 있어야 해.”

자스민의 말에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 속에 담긴 아픔에,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웃을 뿐이었다.

“당연하지.”

내 말에 자스민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아무런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그저 나비를 본 자스민의 맑은 웃음소리만이 정원에 한 번 울려 퍼졌다.

조금 어두운 분위기 속, 우리가 정원을 반쯤 돌았을 때 한 남자가 바리다스에게 달려왔다. 그는 나와 아이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의 귀에 대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나와 아이들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저는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내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방금까지 그렇게 어색해해 놓고 또 막상 그가 가는 것은 서운한 것인지 바리다스의 뒷모습을 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시무룩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티 파티할까?"

내 말에 아이들의 눈이 커졌다. 방금까지 축 처져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아이들은 입을 모아 소리쳤다. 

“네!”

그 모습에 나는 풋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시녀들을 불러 티 파티를 준비시켰다.

잠시 후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예쁘게 구워진 쿠키와 케이크가 테이블 위에 차려졌고 시원한 홍차도 함께 나왔다. 

아이들은 두 눈을 반짝이며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바리다스의 이야기가 나왔고 그린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근데 형님은 역시 우리들을 싫어하시는 거겠지?”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모두가 침묵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어라 말 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너무 어른들의 사정이라 아이들이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들은 어머니가 다른 이복 남매였다. 조금 자란다면 왜 그가 자신들을 불편해했는지 알 수 있을 테지만 아직 어린아이들은 바리다스가 왜 자신들을 불편해하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자스민이 쿠키를 오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안야, 큰어빠 우리 안 시러해. 아까 손도 자바 젔자나.”

자스민에 말에 레몬과 그린이 웃었다. 그들은 막냇동생이 기특한 듯 한 손씩 내밀어 자스민의 양 볼을 꼬집었다. 하지만 쿠키를 먹는 도중에 볼이 꼬집힌 자스민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자스민 말이 맞아, 공작님은 너희를 싫어하지 않아. 그분의 위치에서 너희를 신경 써주고 계신 거야.”

“알고 있어요. 그게 아니라면 오라버니는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희를 내쫓았겠죠.”

상처받을 법도 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렌은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근데 난 속상해. 큰오빠 사정이 있다는 것도 알아. 우리가 곱게 보이진 않겠지. 어머니는 다르지만 그래도 가족인걸. 조금은 더 신경 써 주면 좋겠어.”

레몬의 말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래도 난 오라버니가 좋아.”

렌의 말에 아이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하동문.”

“자쭈민도!!”

아이들의 말에 레몬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는 큰 오빠의 동생들이고 차일드 가의 일원이니까.”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미소 지었다. 내 생각보다 아이들은 어른스러웠고, 강했다. 그래서 더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원작에서의 아이들은 레리아 덕분에 바리다스의 마음을 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계기였을 뿐, 아이들은 그 자체로 사랑스럽고 또 노력해왔기 때문에 그가 마음을 연 것이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아이들의 이야기 주제는 또 다른 것으로 바뀌었고 차를 반쯤 마셨을 때 레몬이 입을 열었다.

"우리 공주 놀이하자!"

그녀의 말에 그린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싫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레몬을 노려봤다.

“싫어.”

그린은 완고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린의 의견은 묵살한 채 놀이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각자의 컵에 차를 따르고 새끼손가락을 든 채 우아하게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어른스러워 보이려는 행동이 내 눈에는 한없이 깜찍해 보여 웃음이 나왔다.

"차가 참 맛있네요. 공주님."

"어머,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에요.“

렌과 레몬은 익숙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상황극을 시작했다. 

“막내 공주님도 반가워요.”

레몬이 자스민을 바라보며 말했고 자스민은 해맑게 웃으며 화답했다. 생각보다 잘 노는 아이들의 모습에 나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가요?"

그때 렌이 그린을 바라보며 말했고 능청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그의 표정은 한층 더 험악해졌다.

"저희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예요."

뻔뻔하게 말하는 레몬 때문에 나는 웃음이 나와 순간 차를 뿜을 뻔했다. 그린 쪽을 바라보자 그는 레몬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강렬한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레몬은 차를 홀짝였고 결국 참다못한 그린은 소리쳤다.

“내가 왜 강아진데?”

하지만 두 소녀는 그를 무시한 채 상황극을 이어 나갔다.

"어머, 훈련이 조금 더 필요하겠어요."

"저희 뽀삐가 아직 많이 부족해서요."

그들의 말에 결국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둘은 그런 식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그린을 놀렸고 다시 한번 그린은 소리쳤다. 

“나 안 해.”

남동생의 귀여운 반항에 두 누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워라, 나는 그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미안해.”

짓궂게 놀리던 렌이 자신 몫의 딸기 케이크를 그린에게 건네자 화가 풀린 것인지 그는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아 렌의 케이크를 먹었다.

평화롭네, 나는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떨며 노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때였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붉은 머리의 소년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토마.

바리다스를 똑 빼닮은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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