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8)화 (8/207)

7. 미래의 흑막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내가 공작가에 온 지도 어느새 삼 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토마는 그날 이후로 나와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날 의심하지는 않는 듯했다.

토마를 제외한 아이들과는 제법 친해졌다. 우리는 자주 정원을 산책하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래도 가끔씩 전생의 생각이 나, 조금 서글퍼졌다. 

하지만 그곳에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더 생각을 해봤자 의미가 없을 것을 알기에 나는 최대한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걸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안정적인 일자리인데….

공작부인은 매우 좋은 위치지만 직업으로는 아니었다. 게다가 레리아가 나타나는 순간 잃게 될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이들의 마음을 얻어 공작가의 가정교사가 되는 것이 내게 가장 좋은 방향이었다. 나의 적성과도 맞고 수입도 좋고 안정적인 직업이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아이들을 잘 가르쳐야겠지.

나는 서랍을 열어 이곳에 온 첫날 생각을 정리해놓았던 공책을 꺼내 펼쳤다.

맨 첫 페이지에 칠드런 그리고 그레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미래의 흑막이 될 예정인 두 사람은 어제 수도에서 공작가로 내려와 있었다.

정확히는 그레이만 흑막이지만 원작에서의 칠드런이 날 죽이고 후반에는 흑화까지 하는 서브 남주이기 때문에 그냥 흑막이라고 써놨다.

다시 죽는 건 사절이야. 

심지어 목이 잘려서 죽는다니 상상만 해도 뒷목이 서늘해지는 것 같아 나는 내 목을 어루만졌다.

이번 생은 반드시 오래 살 것이다. 그러니 칠드런과 그레이 둘 모두 포섭을 해 놔야만 했다. 아이들의 꽃길과 나의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위해.

차일드 가의 기사단을 이그나이트라고 했었나.

기사단이 있는 대부분의 귀족 가문에는 두 가지 종류의 기사단이 있었는데 가문이 이름을 내려주는 정식 기사단과 가주와 가족들의 호위를 담당하는 기사단이 있었다. 그런 호위들을 통틀어 가디언이라 부르는 모양이었다.

그레이는 이그나이트의 기사 단장이었고, 칠드런은 견습 기사로 둘 모두 지금은 흑막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부터 어떻게 잘 구슬리면 될 텐데,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칠드런이 흑화하는 것은 나, 피오라 때문이었다. 그리고 흑화하는 이유도 명확했다. 내가 그를 구해준 레리아를 다치게 하고 죽이려고 해서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레이 쪽은….

그레이를 떠올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흑막이 된 것은 순전히 피오라의 협박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어떤 방법, 어떤 말로 그를 협박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힌트를 조금이라도 얻으면 기억날 것 같은데.

이마를 짚은 나는 다시 칠드런의 이름이 적힌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작에서 스무 살이었으니 아마 올해로 열일곱 살. 칠드런은 귀족이었다면 바로 황실 소속 기사가 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가 평민이었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기사가 귀족이나 그들의 자제들로 이뤄진 기사단에서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평민이라는 이유 하나로 무시당하고 핍박받아왔다. 하지만 기사들도 모르던 사실이 있었는데 그건 칠드런이 마나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의 마나는 마법과 같은 여러 능력을 쓸 수 있는 에너지였다.

이곳은 모든 사람이 마나라는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다만 그것의 양과 순도, 그리고 마나 운용에서 차이가 날 뿐이었다. 이 세 조건이 모두 충족해야 마나를 다룰 수 있으므로 마나를 다루는 능력은 가장 훌륭한 재능 중 하나로 손꼽혔다. 그리고 그들 중 검에 마나를 담을 수 있는 존재는 많아야 한 세대에 다섯 명 정도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칠드런은 그 모든 면에서 타고난 천재였다. 다만 자신이 마나를 다룬다는 사실을, 당사자인 칠드런 조차 알지 못했을 뿐.

그런 그가 각성하는 계기가 바로 레리아였다. 

바로 나 때문에! 원작에서 피오라가 레리아를 죽이려 하는 그 순간에 각성해서 뺨! 하고 등장한 칠드런이 레리아를 뺨! 하고 구하고 내 목도 뺨! 하고 잘리겠지.

피오라가 지은 죄가 있으니, 이해가 가는 결말이긴 했지만 나는 처형 당하기는 싫다고.

그러니 칠드런을 포섭하자. 

나는 빠르게 결론 내렸다. 칠드런은 지금 차일드 가의 기사단 소속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지금 호위를 맡아 줄 기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그를 내 기사로 쓰면 되는 거지. 이거야말로 가장 좋은 방법 아닐까. 내 호위를 맡게 된다면 그가 평민이라고 우습게 보는 사람도 줄게 될 거고 내 적도 한 명 줄어드는 거니까. 나쁘지 않아.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조금 뿌듯해졌다. 그러기 위해선 바리다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으음, 허락해 주겠지?

그리고 나에겐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가 이제 17살 먹은 견습 기사를 왜 쓰냐고 물으면서 다른 기사를 붙여주면 할 말 없겠지만 바리다스는 내가 어떤 기사를 쓰는 것까지 관심을 가질 것 같지 않았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르라고 했었지?

내가 공작가에 온 첫날 크림슨이 한 말이 떠올랐고, 나는 곧바로 방에 있는 줄을 당겼다. 그러자 로나와 레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황녀님.”

나는 방금까지 쓰고 있던 공책을 덮고 펜과 함께 책상 아래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나는 아래층으로 가서 크림슨을 불러 줘, 그리고 레나는 머리 묶는 걸 좀 도와줘.”

내 명령에 로나는 방 밖으로 나갔고 나는 레나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묶기 시작했다.

머리를 묶는 데 도움을 받다니. 전생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머리가 어지간히 길어야 말이지.

나는 허리까지 오는 은빛 머리카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편의를 생각하면 자르고 싶었지만 내 머리카락이 아닌데다가 전생에서는 단발밖에 해보지 않은 나였기에 아깝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에게 땋은 머리를 해주고 싶었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얼마나 귀엽고 예쁜데, 어린이집 선생님으로 있으면서 아이들 머리를 질리도록 땋아본 나는 결심했다. 

아이들의 머리를 땋아 주겠다고 말이다.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레나의 손에 의해 내 머리는 예쁘게 묶여있었다. 

“고생했어, 레나.”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크림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등장에 허리 숙여 인사한 그는 입을 열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수도에서 기사단이 올라온다고 들었는데 혹시 제 전용 호위 기사로 한 명 데려올 수 있을까요?” 

다행히도 내 말에 크림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공작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곧 기사들이 도착할 테니. 황녀님께서 원하시는 기사를 뽑아 가디언으로 채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바리다스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기사도 붙여주려 하고 챙겨는 주는구나.

“알겠어요. 공작님께 감사하다는 인사 전해주세요.”

내가 크림슨의 안내를 받아 기사들이 있는 연무장으로 가려는 순간이었다. 급한 발소리와 함께 렌이 뛰어 내려왔다.

그녀는 헉헉거리다가 숨을 골랐다.

“연무장 가시는 거면 저도 같이 갈래요.”

“토마를 보러 가는 거니?”

내 질문에 렌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검술에 흥미가 생겨서요.”

렌의 말에 내 눈이 커졌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원작에서의 렌은 움직이는 것보다 책을 읽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더 좋아했는데. 심지어 음악 쪽으로는 절대 음감이라 불리는 재능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지만, 그렇다고 꼭 재능을 따라갈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여러 가지 일에 흥미를 가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그것 참 멋지구나.” 

내 대답에 렌의 얼굴은 귀까지 붉어졌다. 마치 잘 익은 방울토마토 같은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렌의 손을 잡고 그녀와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 도착하자 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칼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금속을 긁는 그 소리가 거슬릴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렌은 그런 기색 없이 편안한 표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안쪽에서 토마가 뛰어나왔다. 그의 머리와 온몸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렌! 황녀님!”

꽤나 큰 토마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시선이 쏠렸고 렌도 그것을 느낀 것인지 내 등 뒤로 모습을 숨겼다. 

연습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입은 옷이나 그에게 붙어있는 훈장으로 보아 꽤나 서열이 높은 기사로 보였다. 

그는 내게로 다가와 허리 숙여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황녀님, 공녀님. 이그나이트의 기사단장 그레이 러너라고 합니다.”

그의 인사에 내 눈이 커졌다. 

찾았다. 

“네, 반가워요.”

“전속 가디언을 찾기 위해 연무장에 방문하신다고 들었는데, 맞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훈련을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는 기사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아직 준비가 다 되지 않은 듯하여, 황녀님께 가디언을 소개해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안쪽에 작은 방이 있으니 거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럴게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허리 숙여 인사한 뒤 그레이는 토마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토마가 자리를 비웠다고 혼내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기사가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나와 렌에게 인사를 한 뒤 우리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그 기사가 덩치가 꽤나 큰 탓인지 렌은 내 팔에 꼭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매우 잘 정돈된 응접실이 나왔고 곧이어 시녀들이 차와 쿠키를 가지고 나왔다. 

“저도 기사를 뽑는 걸, 구경해도 될까요?”

자신의 전속 기사가 있다는 것은 굉장한 영예이자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영애들의 꿈이었다. 렌 또한 그런 것인지 양 볼을 붉히고 있었다.

“나는 기사가 아니라 내 전용 호위인 가디언을 뽑는 것이지만 얼마든지.”

“좋아요!”

내가 렌과 가디언에 대해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그레이와 토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서 공녀님과 황녀님께 연무장을 안내해주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의 말에 토마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저는 분명 렌에게만 안내해준다고 했습니다.”

“그런가요?”

그레이는 능청스럽게 빠져나갔고 토마는 이제 귀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모습이 귀여워 나는 내적 비명을 지르며 옆에 있는 쿠션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렌을 안내해주는 김에 해드린다고 말한 거니까.”

츤츤거리는 것까지, 어쩜 저렇게 귀여울까.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도 그의 안내를 받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토마와 렌이 연무장을 구경하러 나간다면 방 안에는 나와 그레이만 남게 된다. 이건 그레이와 단둘이 대화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마음만 같아선 흑막이고 나발이고 당장 토마에게 연무장을 안내받고 싶었지만 아이들과 나의 편안한 미래를 위해서 참아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