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9)화 (9/207)

8. 미래의 흑막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그럼 둘이 다녀와.”

내 말에 토마의 눈이 커졌고, 렌은 함께 가고 싶은 것인지 내 한쪽 팔을 잡았다. 

나는 맘이 약해질 것 같아 그녀의 손을 붙잡아 내 팔에서 떼어 냈다. 그러자 렌은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미래를 위해 인내해야 했다.

“지금은 좀 쉬고 싶어서. 조금 있다가 가디언을 뽑을 때는 같이 있자, 렌.”

내 말에 토마는 렌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나를 쏘아봤다. 

“둘이 가면 되는 거지, 뭘 고민해.”

그대로 렌은 토마에 손에 이끌려 응접실 밖으로 나갔고 방 안에는 나와 그레이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레이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단둘이 얘기 좀 해 보죠. 흑막 씨. 그런데, 뭐라고 말해야 하지? 

피오라는 분명 그레이의 약점을 건드렸을 것이었다. 

약점, 약점이라. 어떻게 해야 약점을 알 수 있을지. 망설이던 나는 입을 열었다.

“…얼굴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해 보이네요.”

“네?”

그의 되물음에 나는 생각했다.

망했다. 

민망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운을 띄운 이상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일명, 도를 아시나요. 간다!

“제가 관상을 좀 보거든요. 좋지 않은 기운이 주위에 맴돌고 있어요.”

내 말에 그의 두 눈이 커졌다.

“어떻게…그걸…?”

그의 순진함에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다. 왜 이게 먹혀…? 라고 말이다. 하지만 통한 김에 쭉 밀고 나가자고 나는 생각했다. 

속이는 건 미안하지만 나쁜 일은 아니에요, 그레이. 그러니 부디 낚여주길. 

나는 더듬거리며 생각나는 대사를 머릿속에서 꺼내 대충 읊어나갔다.

“아무도 모르지만… 제가 신기가 있거든요. 말씀해보세요.”

내 말에 그레이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두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황녀님께선 신력을 가지신 분이셨군요?”

아닌데요? 근데 이게 왜 먹혀.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순진한 사람을 속이는 것 같아 양심이 찔려왔다.

“대단한 정도는 아니니 비밀로 해주세요. 그러니 말씀해보세요. 무슨 고민이죠?”

내 말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정을 내린 듯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어머니의 병세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피오라가 그레이를 회유한 방법을 떠올 릴 수 있었다. 피오라는 그의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 주겠다는 거짓말로 그레이를 꾀어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의 병은 불치병에 가까운 당뇨였다. 그녀의 말에 넘어간 그레이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피오라 얘 정말 나쁜 애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이 소설에 악역은 피오라 뿐이냐고. …하지만 그 피오라가 지금은 나지.

왜 다 원인이 나야. 왜 나냐고!

그레이는 흑막이 아닌 피오라에게 속은 피해자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아직 그의 어머니의 병이 깊은 정도는 아니니 원인은 알려 줘야겠지.

“어머니께서 단 음식을 좋아하시죠?”

내 말에 그의 눈이 커졌다. 역시 내 기억이 맞았다.

“그게 원인이에요. 단 음식을 줄이고 물을 많이 마셔야 해요.”

내 단호한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감사하다 인사했다. 이 모습을 보니 그가 피오라에게 속은 것도 조금은 납득이 갔다. 

기사 단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정말 순진하네. 

이번에는 흑막이 될 일도 없으니 그의 어머니가 빨리 건강을 회복하길 바랐다. 

그럼 그레이 쪽은 해결이 된 것 같고 칠드런을 보고 싶은데.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아이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렌이 쪼르르 달려오더니 내 품에 안겼고 그 모습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토마도 내 쪽으로 다가왔다.

“벌써 다 구경한 거니?”

내 질문에 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녀님이 없으니까. 재미가 없어요,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렌은 똘망거리는 붉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렌에게 꽤나 시달린 것인지 토마는 질린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같이 가시죠.”

토마의 말에 렌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날 바라봤다. 

그런 두 아이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레이 쪽은 이제 해결도 됐고 칠드런을 만날 때까지 할 것도 없으니, 아이들이랑 놀아도 되는 거겠지.

“그래.”

나는 웃으며 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렌은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토마에게 반대 손을 내밀자 그는 잠깐 질색하는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내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레이는 방문을 열어준 뒤 인사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님. 잠시 뒤 뵙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응접실 밖으로 나가자 다른 기사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고 나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토마가 입을 열었다.

“저는 어린애가 아닙니다.”

이미 잡아 놓고 투덜거리는 토마가 귀여워 그와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그의 표정이 조금 더 굳었다. 내 눈에는 아직 그가 어린애지만 그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가 어떻게 해야 거부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어린이들만 손을 잡는 건 아니야. 손을 잡는다는 건, 그 사람이랑 친하다는 증거야.”

“저는 황녀님이랑 안 친한데요.”

토마는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나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게 좋아서인지 아니면 내가 상처를 입을까 봐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의 한쪽 귀가 붉게 물들어 있기도 했고 말이다.

“저는 황녀님이랑 더 친해질 거예요.”

렌은 웃으며 말했고, 나는 그런 렌이 귀여워 땅바닥을 다섯 번쯤 내려치고 싶었다. 

“당연하지, 렌.”

“기뻐요, 황녀님.”

내 대답에 렌은 배시시 웃으며 나를 불렀다. 귀여운 그녀의 미소에 나는 속으로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느꼈다.

왜 황녀님이야, 다 좋은데 왜 황녀님이냐고! 

귀여워! 귀여운데! 슬퍼! 얘들아 선생님이라 불러주면 안 될까?

자신를 주체하지 못한 내가 선생님이라고 불러 달라 말하려는 순간 토마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 덕에 나는 다행히 속마음을 숨길 수 있었다.

토마가 멈춘 곳엔 작은 문이 있었는데 안쪽에서는 기합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렌, 검을 잡아보고 싶다고 했지? 이곳은 신입 기사들이 연습을 하는 곳이야. 단장님께 부탁드려 놨으니까 아마 너도 연습 할 수 있을 거야.”

토마의 말에 렌의 표정이 환해졌다. 

노크를 하자 문이 열리고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그 남자의 덩치가 커서 무서웠던 것인지 렌은 내 등 뒤로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고 그를 바라봤다.

남자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신입 기사들을 가르치고 있는 류 라고 합니다. 안쪽으로 들어오시죠.”

류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들이 보였다. 우리가 구경을 하는 동안 토마는 뒤쪽에 있는 창고로 향해 두 개의 목검을 가져왔다.

“해 볼래?”

그렇게 말하며 그는 렌에게 하나의 검을 내밀었다. 렌은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그가 내민 검을 받아 들었다. 렌이 검을 잡고 어정쩡하게 허수아비 앞에 서자 토마가 그녀에게 다가가 자세를 잡아주었다.

“손에 힘을 풀고 발은 어깨너비로.”

하지만 렌은 목검을 드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토마의 지시하에 허수아비를 때리던 렌의 이마에 땀방울이 하나둘씩 맺혔다. 그녀의 모습을 보던 토마가 검을 들었다. 그는 자세를 잡더니 숨을 골랐다. 

“힘을 풀고 부드럽게.” 

순식간이었다. 

부드럽게 마치 바람이 부는 것처럼. 토마의 검이 허수아비를 향하자 렌이 아무리 내리쳐도 꿈쩍도 않던 허수아비가 두 동강이 났다.

“이렇게.”

참 쉽죠? 라는 듯 말하는 토마는 마치 밥 아저씨 같았다. 하는 사람은 쉽게 하는데 우리가 정작 하면 어려운 그런 느낌. 확실히 토마가 천재가 맞긴 했나 보다.

그의 말에 렌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토마에게 목검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그를 쏘아봤다.

“안 해! 난 그렇게 못해.”

“아니, 왜? 쉬워!”

자기는 나름대로 열심히 알려 준 것인데, 렌에게 미움받은 것이 억울한 토마는 도와달라는 듯 류를 바라봤다. 그러자 류는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 천재들은 가르치는 것을 잘 못 하는 법이지요.”

“오빠가 천재가 맞긴 해. 천하에서 제일 재수 없어.”

새침하게 말하는 렌의 말에 토마와 류의 눈이 동그래졌고 나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저 말장난 오랜만에 듣네. 어릴 때 나도 자주 저러고 놀았는데. 하지만 토마는 자신이 동생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이 충격인 양.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 어디서 그런 말 배웠어!”

“몰라.”

렌은 토마의 손에서 떨어진 목검을 들고 총총거리며 다른 검들이 모여 있는 창고로 향했고 토마는 멀어져가는 렌의 뒷모습을 억울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모습이 귀여워 바라보던 그때 류가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앉으시죠.”

“감사해요.”

마침 다리가 아팠기에 나는 그의 성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토마는 다시 검을 가져와 허수아비를 툭툭 치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구경했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렌은 돌아오지 않았다.

“렌이 왜 이리 안 오지?”

걱정이 된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류가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훈련장에서 나가는 문은 하나뿐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때 기사들의 준비가 다 된 것인지 한 명의 기사가 훈련장 안으로 들어와 나와 아이들을 불렀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렌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렌이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데리러 가야겠네.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토마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그의 귓불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렌, 데리러 갈 거면 같이 가죠.” 

“그래 고마워.”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고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덜컹.

커다란 나무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이 열리고 어두운 창고에 햇빛이 비쳤다. 그 순간 내 눈에는 피투성이가 된 렌의 모습이 들어왔다. 

* * *

그 시각, 바리다스의 집무실.

그의 앞으로 올라온 하나의 서류에는 피오라의 가디언 시험을 보게 될 기사 열 명이 쓰여 있었다. 

서류를 확인하며 바리다스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가디언이라….”

가 볼까.

그래도 일국의 황녀인데 아무나 가디언으로 뽑아 쓰게 할 순 없었다.

괜찮은 기사를 직접 뽑아줄 걸 그랬나. 

그녀가 괜찮은 기사를 보는 눈이 있을 리 없었기에 바리다스는 신경이 쓰였다. 

괜히 가디언을 직접 뽑게 만들었다고 후회하며 고민하던 바리다스는 결국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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