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미래의 흑막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라고 말씀하셨지, 에리든 폰 체리아든께서는.”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원작에서는 한 기사가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며 백성들의 금품을 갈취했을 때 그를 물리친 후 바리다스가 남긴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뭐라고 했더라, 너에겐 기사의 자격이 없다?
어우, 오글거려.
내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바리다스의 시선이 아주 잠깐 나에게 향했다.
“황녀님의 말에는 나도 동의하네. 오로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무력을 행사하는 기사는 내 기사단에 필요가 없군.”
바리다스는 칠드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따지고 보면 저 소년도 백성이니 말이야.”
바리다스의 말에 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얼굴에는 핏기 없이 새하얘져 있었다.
그 모습이 퍽 한심해 보여 나는 피식 웃었다. 내 말에는 꿈쩍도 안 하고 덤비던 사람이 그의 몇 마디에 저렇게까지 태도가 변하다니.
“죄송합니다, 공작님, 모두 저의 잘못입니다.”
강약약강의 표본이군. 토마가 그에게 배운 것이 검술뿐이라 다행이야.
바리다스는 아무런 말이 없이 류를 내려다보았고 그의 눈치를 보던 류가 고개를 들려는 순간 렌과 토마가 동시에 외쳤다.
“왜 황녀님께는 사과를 안 하는 거예요?”
두 아이의 말에 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개미가 기어가는 정도의 소리로 내게 말했다.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황녀님.”
그가 내게 사과하자 아이들은 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아이들의 웃음에 화답하듯 미소 지은 뒤 류를 돌아봤다. 내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자 내가 그렇게 화가 많이 안 났다고 생각한 듯 류의 표정이 잠깐 밝아졌다.
웃으면서 화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 사과, 받을게요. 다만, 일곱 살 아이도 아는 사과라는 것을 모른다는 건. 어른으로서 부끄러운 것이니 한 번 배우는 것을 추천해요.”
쟤가 나한테 뭐라고 했더라…… 그래.
류의 말을 떠올린 나는 아까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그런 기초적인 것도 모른다는 건 원숭이와 다름없는 사람일 뿐이니까요.”
내가 말을 마치자 뒤에서 풉,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칠드런이 웃음을 터트린 것이었다.
칠드런의 웃음에 갈 곳 잃은 류의 분노는 그를 향했고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류의 모습에 칠드런은 큭큭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킥. 죄송합니다.”
웃음을 숨길 생각도 없는 그의 모습에 류의 얼굴은 더욱더 붉게 달아올랐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붉어질 수도 있구나, 그의 얼굴은 정말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난, 오빠 머리카락만큼 얼굴이 붉은 사람 처음 봐.”
그 말에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렌의 말을 들은 토마는 소리쳤다.
“내 머리 색을 왜 저런 거랑 비교해!”
한순간에 ‘저런 거’가 되어버린 류는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렌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류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속도로 렌에게 달려가고 있었고, 바리다스와 나는 렌과 완전히 반대 방향에 있었다.
“어린 계집애가 감히…! 감히!!!”
바리다스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류와 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늦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다리는 이미 렌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주먹이 렌에게 닿으려는 순간, 커다란 소리가 나며 렌의 눈앞에서 류가 쓰러졌다. 그가 쓰러진 자리에 렌은 멀쩡히 서 있었다.
렌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나와 바리다스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류는 기절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렌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렌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토마가 그녀를 달래 주려는 듯 다가갔지만 렌은 그를 보지 못한 채 내게 달려왔다. 그녀는 내 품에 안겨 눈물을 터트렸고 나는 렌을 품에 안은 채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무서울 만도 했겠지. 렌의 입장에선 자기 키의 3배쯤 되는 거구가 주먹을 들고 뛰어오는 것이었으니까.
오늘만 해도 렌이 벌써 두 번이나 울었다. 그 사실 만으로도 속상해진 나는 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때 내 눈에 토마가 들어왔다. 그는 분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토마가 왜 저러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바리다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내 동생을 구해줘서 고맙군.”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닌데요, 저보단 공자님이 더 대단하시죠. 그 짧은 순간에 공녀님을 뒤로 당겨 류에게 깔릴 뻔한 것을 막았으니까요.”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기사인 류에게 반말하며 칠드런은 그의 등을 발로 강하게 밟았다.
그도 쌓인 것이 꽤나 많은 모양이었다. 두세 번을 더 밟은 뒤에야 만족한 듯 그의 등에서 발을 뗐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충격에 깬 류는 눈을 떴다가 바로 감았다.
그를 내려다보는 두 쌍의 붉은 눈동자 때문이었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바리다스는 장갑을 벗고 토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잘했다. 토마.”
그는 토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줬고 그 모습에 토마의 얼굴이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하지만 그의 손과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자 토마의 표정은 다시 굳어갔다. 그때 내 품에서 내려간 렌이 토마에게 다가갔다.
“구해줘서 고마워, 오빠.”
렌의 말에 토마의 표정이 한층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러다가도 다시 굳어졌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저건 분노였다. 렌을 구하지 못한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분노.
“내가 아니라 저 기사가 널 구한걸.”
그렇게 말하며 토마는 렌의 시선을 피했고 그런 그의 모습에 렌의 표정이 부루퉁해졌다.
“아니, 오빠와 기사님이 함께 날 구한 거야. 맞죠?”
렌은 동의를 구하는 듯이 칠드런을 바라봤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공녀님께선 저 돼지의 몸에 깔렸을 것입니다.”
“들었지? 오빠, 그리고 기사님. 구해줘서 고마워요.”
렌의 인사에 칠드런은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화답했고 토마는 기분이 나아진 듯 작게 웃었다.
그때 기절한 척하는 돼지, 아니 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마 칠드런이 한 돼지 소리에 화가 나서 그런 것이겠지.
그것을 목격한 바리다스는 그의 목 옆에 칼을 꽂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잘라 버리겠다.”
그의 말에 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를 내려다보며 바리다스는 말했다.
“원하시는 처벌이 있으십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벌, 처벌이라.
그때 칠드런이 그를 돼지라고 부른 것을 떠올린 내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사악하게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폭력을 멋대로 휘두르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가축과 다름없을 뿐이니, 3일간 옷을 모두 벗긴 뒤 돼지우리에 가둬 네 발로 생활하게 하죠.”
나는 양손으로 렌의 귀를 막은 뒤 말했다. 신박하지만 잔인한 형벌에 뒤에서 구경하던 기사들의 입이 벌어졌고 바리다스는 작게 웃었다.
“그러죠, 그렇다면 3일 뒤에는?”
뭐 죽이기라도 해? 아니, 그건 좀 그래. 저 정도면 충분히 반성했겠지 뭐.
그냥 풀어주죠. 라고 말하려는 순간 렌이 왜 귀를 막냐고 물어보는 듯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런 렌을 다치게 하려고 하다니, 쉽게는 용서 못 한다.
“3일은 취소할게요. 30일. 그 뒤에는 풀어줘도 될 것 같아요.”
“그래요, 그렇게 해드리죠.”
바리다스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리고 내 손에서 렌을 빼앗아 자신의 품에 안았고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아이들에게 관심 없는 것 아니었나?
갑자기 높아진 시야에 렌은 놀란 듯 눈이 커졌다.
하지만 나라고 생각한 것인지 안심한 렌은 바리다스의 가슴에 기댔고 평소와는 다른 딱딱함에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불편한가?”
그런 렌의 행동이 불편했기 때문이라 생각한 바리다스가 물었고 그제야 자신을 안은 것이 바리다스인 것을 확인한 렌의 눈이 아까보다 더 커졌다. 렌은 바리다스의 말을 부정하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그 모습에 바리다스는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러면 이제 손 좀 떼 주었으면 하는데.”
그의 말에 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바리다스는 그녀가 어색해한다고 생각하며 직접 렌의 손을 떼어 자신의 목에 감아주었다.
“…미안해요.”
얼굴까지 붉게 달아오른 렌이 작은 목소리로 사과하자 바리다스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다. 오히려 사과해야 할 쪽은 내 쪽이니까.”
그의 사과에 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이유든 기사단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내 책임이다. 기사단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몰랐다는 점과, 오늘 두 번씩이나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은 어찌 보면 내 잘못이다. 미안하구나.”
그의 말에 렌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휴, 대체 왜 우리 집안 남자들은 다 이리 고지식한지.”
렌의 말에 토마는 사레가 들린 듯 쿨럭거리기 시작했고 칠드런은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당사자인 바리다스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렌을 바라봤다.
나는 빙의한 이후로 바리다스의 표정이 저렇게 흔들리는 것을 처음 봤다.
“오라버니 잘못 아니에요. 저건 다 돼지가 마음대로 한 짓이잖아요? 저 남자는 성인이고 스스로 한 일에 책임을 질 의무가 있어요. 그러니 오라버니가 그를 대신해 그의 잘못을 책임지고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방금까지 수줍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렌이 말했다. 하지만 저건 이제 여덟 살이 된 아이의 입에서는 절대 나올 소리가 아니었다. 바리다스도 당황한 것인지 그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떨렸다.
흔들리는 그의 동공을 본 렌도 본 것인지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오라버니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대신해 저희를 돌봐 줄 필요가 없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렌은 바리다스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꽤나 높은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착지한 렌은 바리다스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오라버니의 잘못 아니에요. 그러니까, 사과 안 하셔도 괜찮아요.”
렌의 말에 바리다스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착한 아이구나. 네 말이 맞아. 내가 너희를 돌봐 줄 필요는 없어.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동생인 너희를 무시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바리다스의 말에 렌의 눈이 커졌다.
“내가 너희들을 사랑해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고 성인이 될 때까지는 내가 너희들의 보호자고 책임을 질 의무가 있어.”
“저희를 미워하는 거 아니셨나요?”
바리다스는 반대 팔로 토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혀.”
그의 대답에 아이들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그들의 오해가 조금은 풀린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