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 악녀의 행복이론
“연회가 열리는 거예요?”
레몬의 질문에 나는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아이들의 앞에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 대답에 레몬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녀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참석해도 될까요?”
이게 무슨 의미지 싶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문에서 열리는 연회인데 아이들을 참여시키지 않을 리가. 설마, 바리다스가 연회도 참석하지 못하게 한 거야?
내 속에서 무언가 끓어올랐다. 그것을 억누르며 나는 레몬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연히 참여해야지.”
이 학부형님, 악질이었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표정을 구겼다.
“저도 갈래요!”
렌이 소리쳤고 그에 질세라 그린과 자스민도 가고 싶다고 소리쳤다. 난 모두에게 알았다고 대답을 했고 내 말에 아이들은 환하게 웃었다.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연회 이야기로 수다를 떨던 아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공부할 시간이 되었다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도 아이들을 놀아주며 꽤나 지쳤기에 쉬기 위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근데 연회에 아이들을 데려가도 되나?
생각해보니 연회를 여는 것은 바리다스였다. 내가 아무리 아이들을 데려가 주겠다고 말해 봤자 공작저의 주인인 바리다스가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역시 허락을 받긴 해야겠지. 결정을 내린 나는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쇠뿔도 단숨에 빼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니 나도 바로 간다!
방에서 나가기 전 나는 초콜릿을 하나 입에 물었다. 기분 좋은 달콤함이 입안에 퍼져나갔다. 초콜릿을 오물거리며 공작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원작 소설에서 그는 훈련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을 집무실에서 보낸다고 쓰여 있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공작 저를 돌아다녔다.
바리다스의 집무실이 어디였더라? 나와 같은 층이었던 것은 기억하는데. 딱히 주의 깊게 듣지 않았던 탓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쓸데없이 뭐 이리 넓은 거야.
투덜대며 걷던 나는 결국 내 방 앞으로 돌아왔다. 원점으로 돌아온 나는 내 방문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심지어, 돌아다니는 동안 사용인 한 명도 마주친 적이 없어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나는 짜증이 나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내 방 바로 옆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진하고 시원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은 그런 향이었다.
민트? 박하?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바리다스의 방에는 민트 향이 가득하다고 쓰여 있었는데. 그제야 나는 그의 방이 바로 내 옆방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저택을 한 바퀴나 돈 게 허무하면서도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바리다스는 없는 건가?
주위를 대충 둘러본 나는 한 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주인이 없는 방에 맘대로 들어와도 되려나.
으음, 어차피 같은 저택에 사는데 앉아서 기다리는 것 정도는 실례되지 않겠지.
나는 편하게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그의 방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의 방은 내 방과 크기는 비슷했지만 훨씬 더 수수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내 방에 있는 화려한 분위기의 장식품보다는 우아한 느낌의 장식품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방 구경을 마친 내가 멍하니 열린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던 나는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사락거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반짝거리는 전등 때문에 표정이 저절로 구겨졌다. 이후 두세 번 눈을 비빈 뒤에야 완전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완전히 깨고 나니 눈앞에 서류를 넘기고 있는 바리다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제야 잠들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툭 소리와 함께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소리에 바닥을 바라보자 검은색 겉옷이 떨어져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떨어진 바리다스의 옷과 그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도 옷이 떨어진 소리를 들은 것인지 날 보고 있었는데, 화가 난 것인지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더니, 바닥에 떨어진 겉옷을 집어 툭툭 털었다.
말도 없이 그의 방에 찾아와 잠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려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어른이 된 이후 이렇게 민망했던 적은 오랜만인 것 같았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겉옷을 다시 내 어깨에 둘러 주더니 내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이야, 이게 로맨스 소설 남주인가. 처음 겪어보는 배려에 나는 민망함도 잊고 감탄했다.
“괜찮아요, 다만 앞으로는 방문할 때 미리 언질해 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에 다시 민망해진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끄덕였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아, 맞다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였지. 그제야 본론을 떠올린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열리는 연회에 아이들을 데려가도 될까요?”
나는 최대한 간절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그걸 왜 자신에게 물어보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아이들이 가고 싶다고 한 겁니까?”
혹시 허락해 주는 건가?
“네!”
강하게 긍정하는 내 대답에 바리다스는 당황한 것인지 아주 잠시 멈칫했다.
“아이들이 연회에 가고 싶다고 그대를 곤란하게 한 것도 아니고?”
와, 미친. 그대라니, 저런 오글거리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역시 소설은 소설이구나. 감탄도 잠시 나는 강하게 부정했다.
“절대, 아닙니다.”
아이들을 어떻게든 연회에 데려가겠다는 내 강한 의지에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입을 열었다.
“아이들이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것은 알고 계십니까.”
…? 그게 뭔데요.
로판이라고는 딱 한 권 밖에, 그것도 대충 읽은 나로서는 그 데뷔 뭐시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모른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알죠!”
하지만 내가 모른다는 것을 눈치를 챈 것인지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데이먼과 다르게, 이곳은 성인이 된 뒤에야 연회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성인이 된 뒤 첫 참가하는 연회를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참가하지 못한다는 거잖아. 섣부르게 아이들에게 기대를 품게 한 것이 미안해져 난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가문의 연회나 주최자의 허락 하에는 어린아이들도 참가할 수는 있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환하게 웃었다. 뭐야, 이 학부형님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그런데 어차피 허락해 줄 거면서 왜 이리 빙빙 돌리면서 말해.
“그럼 데려가도 되는 건가요?”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주인공인 연회니 마음대로.”
진짜 나 때문에 여는 연회였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의 입으로 저런 말을 들으니 조금 기분이 묘해졌다.
그래도 뭐, 허락받았으니까 된 거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나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바리다스에게 인사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피오라가 떠난 방 안. 바리다스는 혼자 남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크림슨이 그가 좋아하는 차를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곁눈질로 크림슨의 모습을 확인한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황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그의 질문에 크림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주인이 남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물어온 피오라에 대해 잠시 고민하던 크림슨은 입을 열었다.
“나쁘신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공자, 공녀님께서도 좋아하시고 말이죠.”
단 한 번에 말로 아이들을 진정시킨 피오라는 아이들 때문에 꽤나 고생해온 크림슨에게 구세주와 같았다.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피오라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어진 바리다스의 말에 크림슨의 눈이 커졌다.
“연회에 아이들을 초대하고 싶다고 말하더군.”
그는 피오라가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채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것과 공작가의 일은 별개였다.
아이들과 그녀의 자식이 공작가의 후계 자리를 두고 싸우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그의 기준에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서로에게 칼을 들이밀 수도 있는 사이인데 굳이 아이들을 부른다니.
그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여러 개 떠올랐다. 바리다스도 그것을 눈치챈듯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아이들을 잘 다루시는 것 같았습니다.”
크림슨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아이들이 조용해졌다는 것을 설명하자 바리다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동생들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절대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교적 얌전한 편인 토마와 렌은 그들의 요청으로 가정교사를 붙여 줬다. 하지만 그에 비해 쌍둥이들이 쫓아낸 보모와 가정교사들만 벌써 스무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토마와 렌은 그렇다 쳐도 남은 아이들까지 단기간에 따르게 만들었다고?
대단한데.
저 행동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아이들과 빨리 친해진 것은 피오라의 재능임이 분명했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바리다스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름답고 똑똑하지만 악독하고 잔인한 황실의 꽃, 사람들은 그녀를 가시꽃이라 불렀다.
확실히 그녀의 행동이 연기라면 그 별명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 그는 피오라가 딱히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만일이라는 것이 있으니, 조금 더 지켜봐야겠군.
“알겠다, 이만 나가봐.”
바리다스의 말에 크림슨은 그에게 인사를 한 뒤 방 밖으로 나갔다. 크림슨이 나간 것을 확인한 바리다스는 잡생각을 지운 뒤 책상 위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때 크림슨이 까먹고 닫지 않은 창문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창문을 닫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자 아이들과 함께 있는 피오라의 모습이 보였다. 노을이 지고 있는 정원을 뛰어다니며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바리다스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은 나와 그 사람을 닮지 말기를.”
평소와 다른, 조금 슬프게 중얼거린 그 말은 닿는 사람 하나 없이 허공에 흩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