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 악녀의 행복이론
이런 미친,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저건 뭐야. 고문 기구인가.
가슴부터 허리까지 밖에 없는 흰색 마네킹이 입고 있는 것을 본 내 얼굴이 사색이 되어갔다. 내가 목격한 것은 코르셋이라 불리는 고문 기구였다. 저것을 현실에서 본 것은 딱 한 번이었다.
전생에서 친구가 남친과 데이트를 하는데 너무 살이 쪘다며 내게 묶어달라고 부탁할 때. 단 한 번.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허리 상하니까 다이어트나 하라고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며 코르셋을 입는 그 친구의 모습은 정말, 숨이 막혀 보였다.
심지어 저건 친구가 입었던 것보다 두 배는 더 두껍고 단단해 보였다.
저걸 입게 되면 분명 허리가 반으로 구겨질 거야. 숨을 쉬는 게 자연스럽게 되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쉬는 게 돼버릴걸?
당연히 숨은 살기 위해 쉬는 것이지만, 그만큼 끔찍하다는 뜻이었다. 입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코르셋과 치열하게 눈싸움을 하고 있던 그때 레나가 방 안으로 드레스 한 벌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 드레스를 보는 순간 내 입은 떡 벌어졌다. 이 드레스를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돈을 입었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였다.
이게, 다 얼마야. 마차만 봤을 때도 피오라의 사치가 엄청나다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드레스까지 이 정도일 줄이야.
이전 생에서 연예인들이 입은 옷을 팔면 자동차 한 대는 나오겠다는 말을 나는 체감하고 있었다.
아니, 저건 자동차로 안 끝나. 저택은 살 수 있을 거 같아.
이 옷을 입으면 빛이 번쩍거려 밤길을 걸을 때 절대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닌가, 보석을 이렇게 주렁주렁 달고 다니니까 그 반대인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드레스를 구경하던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드레스도 구경하고 싶어! 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레나를 돌아봤다.
“아이들 드레스도 볼 수 있을까?”
내 말에 그녀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공자님과 공녀님의 드레스는 따로 전달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내 눈에 불이 켜졌다. 연회까지는 단 삼 일밖에 남지 않은 지금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은 것은 아이들의 드레스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새 드레스가 없다니. 당연히 아이들 것도 준비해주는 거 아니었어?
고심하던 나는 결정을 내렸다. 안 되겠다. 내가 사다 주는 수밖에.
“레나는 내 외출 준비를 돕고. 로나는 칠드런을 불러와 줘.”
이후 내가 할 행동이 너무 뻔해 보였는지 둘은 탐탁지 않아 보였지만, 그녀들은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들이 방을 나가고 나는 따로 챙겨온 보석함을 열었다. 피오라의 짐에는 그녀의 보석들 그리고 금화가 들어 있었는데 그 금화의 양도 상당했다. 내가 이쪽 화폐의 값어치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적은 양이 아님은 분명했다.
데이먼이라는 문자가 쓰여진 것을 보아 크레센트 제국의 돈이 아닌 데이먼 제국의 돈인 것 같지만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황녀님.”
뒤를 돌아보자 칠드런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 외출은 차일드 가의 이름을 빌리는 공식적인 외출에 속하는 모양인지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
그동안 나는 칠드런과 꽤나 친해졌다. 원작이 시작되기 전의 그는 달콤한 간식과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17살 소년일 뿐이었다.
역시 모든 악의 근원은 나인가 싶어, 조금 속상하긴 했지만.
그리고 나는 며칠 전부터 그에게 애칭을 허락받아 칠이라고 부르곤 했다. 정확히는 그가 편하게 불러 달라고 말한 것이지만.
“이거 먹을래, 칠?”
지난번에 아이들에게 받은 초콜릿을 주자 칠드런은 환하게 웃으며 간식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그의 감사 인사를 기분 좋게 받으며 나는 문을 열고 아래로 내려갔다.
칠드런의 에스코트를 받아 정원으로 내려가자 차일드 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좋아, 이제 출발해 볼까. 참, 맞다. 나는 칠드런에게 데이먼 제국의 금화를 내밀며 물었다.
“이거 여기서 사용할 수 있어?”
금화의 종류를 확인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먼의 금화는 크레센트의 금화와 값어치가 같아 대부분의 곳에서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귀찮게 은행까지 갈 수고를 덜었네.
“금화 하나는 얼마 정도야?”
“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빵 한 덩이가 1론 입니다.”
론이라, 여기서는 돈을 론이라고 하는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이어서 설명을 했다.
“1골드가 100실버이구요. 1실버가 10론 입니다.”
딱, 봐도 론이 가장 낮은 돈으로 보였다. 그러면 충분하겠네, 나는 대충 봐도 100개는 가볍게 넘어 보이는 주머니를 짤랑거렸다.
“그럼 출발하자.”
나는 칠드런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이 우는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덜컹, 덜컹.
숲속 길이라 그런 것인지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마차 의자에 기대어 뭘 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고 내 가디언으로 호위를 맡은 칠드런은 마차 옆 조수석에 앉아 내게 질문했다.
“근데 갑자기 시내엔 왜 가시는 겁니까?”
“아이들 드레스를 좀 사려고.”
그에게 대답한 나는 오랜만에 하는 외출에 풍경을 구경하기 위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일드 가의 숲은 소설 속 묘사 그대로 아름다웠다. 넓은 호수가 유리처럼 반짝였고 크고 작은 나무들, 그리고 화사하게 핀 봄꽃이 보였다.
예쁘다.
소설에서도 읽었지만 차일드 공작가는 실제로 보니 훨씬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중 가문의 숲은 엄청나게 큰 점과 더불어 예전 차일드 공작가가 생기기 전부터 온갖 소문과 신비로운 일들이 많이 생겼다고 했다.
그에 관심을 가진 초대 차일드 가의 가주가 이 숲에 성을 지은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게다가 그는 뛰어난 실력을 지닌 마법사였는데 장난치기를 좋아해 숲에 무언가를 자주 숨겨놓았다고 했다.
예전 댓글들 중 ‘이 정도면 작가님도 숲의 비밀을 다 모른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고 쓴 댓글이 메인에 장식될 정도로 숲의 비중은 꽤나 컸다. 물론 나는 대충 읽어서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지는 모른다. 소설에 들어올 때마다 보이는 베스트 댓글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읽었을 뿐.
차일드 공작가의 소유인 숲 밖으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 창밖을 내다본 나는 낮게 탄식을 내뱉었다. 마치 그림 속이나, 과거 유럽의 마을을 보는 것 같은 도시가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뒤 알게 된 건 이 세계는 도시도 매우 예쁘지만 공기 또한 매우 맑다는 것이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나는 미소를 지었다.
숲속이 아니라 마을인데도 미세먼지 하나 없는 이런 공기라니. 머리가 개운해진 것 같았다. 물론 방금도 공기가 매우 좋을 수밖에 없는 숲속에 위치한 저택에 있었지만 말이다.
마차 앞에서 칠드런이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안내해드릴까요?”
중세 시대 배경을 닮은 곳, 연예인을 보듯 나를 힐끗거리는 사람들, 내게 손을 내미는 전속 기사. 정말로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미묘해졌다.
아쉽게도 나는 주인공이 아닌 악녀였지만 말이다.
뭐 어때, 나는 지금이 좋은데.
나는 칠드런이 내민 손을 잡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원래 관광의 묘미는 길 찾기인 법이니까.”
내 말에 칠드런은 피식 웃었다.
원래 여행의 로망은 길을 물어보며 찾는 거지만, 이 귀엽고 예쁜 마을을 조금 더 구경하고 싶었기에 천천히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마을의 중심으로 보이는 시계탑 아래에는 분수대가 있었다.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치자 흰색 새들이 하늘로 날아갔다. 그 모습에 나는 내적 환호를 내질렀다.
그래, 이게 영화고 소설이지! 낭만 미쳤다, 진짜.
지금 만큼은 악녀고 뭐고 다 상관없었다. 영화에서 꼭 나올 법한 연출에 나는 한껏 분위기에 취해 버렸다.
그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말이다.
“이런 도둑놈이!!!!!”
사나운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봤다. 누더기를 입은 한 소년이 앞치마를 두른 남자의 손에 붙들려 엉엉 울고 있었다. 그의 어린 손에는 두 개의 빵이 들려 있었다. 앙상한 두 팔로 남자에게 어떻게든 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쥐고 있었다. 그런 소년의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남자는 아이를 때리려는 것처럼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아무리 도둑질이 잘못된 일은 맞지만 저 깡마른 몸으로 그에게 맞는다면 소년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무슨 일이죠?”
내 말에 그는 손을 아래로 내리고 내 쪽을 돌아봤다. 딱 봐도 귀족으로 보이는 내 모습에 그가 살짝 떠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이고 마님. 별일 아닙니다.”
그는 아이를 바닥에 툭 던졌고 소년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엉금엉금 기어 내 쪽으로 도망쳤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바라보기도 힘들었다.
나는 주먹에 힘을 주고 남자를 바라봤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요?”
한숨을 내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타박할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귀족 아가씨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그때 소년이 내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붙잡았다. 그의 행동에 남자가 기겁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소년이 내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쿨럭이며 입을 열었다.
“도… 와주세요…….”
말할 힘도 없어 보이는 그 소년을 나는 양손으로 안아 들었다. 오래 씻지 못한 것인지 아이에게서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난 그대로 남자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빵 좀 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나는 아이들에게 줄 크림빵 다섯 개와 바게트 그리고 식빵 두 줄을 주문한 뒤 여러 종류의 빵 열 개를 더 샀다.
그리고 남자에게 금화 두 개를 쥐여 주었다.
금화 두 개면 내가 산 빵의 값을 초월하는 정도로 많은 돈이었다. 이건 아이가 도둑질을 한 것을 넘어가 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자 부탁이었다.
나는 종이봉투 하나에 아이들을 위한 크림빵과 바게트, 식빵을 담았고 다른 하나의 종이봉투에는 남은 빵을 모두 담았다.
그리고 그 봉투를 아이에게 내밀었다.
“받으렴.”
아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내가 내민 봉투를 받아들었다. 봉투 안에서 빵 하나를 집어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아이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아이의 인사에 미소 지으며,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얼굴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보답으로 의상실의 위치를 알려 줄 수 있을까?”
내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아이가 가리킨 방향에는 여러 가지 상점들이 많이 보였다.
“저기서 오른쪽 골목, 두 번째 건물이에요.”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