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5)화 (15/207)

14. 그 악녀의 행복이론

소년이 알려준 의상실로 들어가자 한 점원이 우리를 상냥하게 맞이해 주었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자 차와 디저트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차 한 잔을 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자가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황녀님, 저는 마담 리스라고 해요.”

내 소개를 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어쩐지 유명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민망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반가워. 피오라 티아네 드 데이먼이네.”

내가 소개를 마치자 마담 리스는 ‘역시’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무슨 일로 방문하신 건가요?”

그녀의 말에 그제야 방문 목적을 떠올린 나는 입을 열었다. 

“어린아이들이 입을 연회 드레스와 정장을 보고 싶은데 볼 수 있을까?”

“아이들의 사이즈는 어떻게 되나요?”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이들의 사이즈를 알지 못했다. 아이들 나이가 9살, 8살, 6살, 3살 정도이고 대부분 평균보다 조금 큰 편 같기는 한데. 아무래도 정확한 사이즈가 아니면 연회가 열리는 날에 맞춰 입을 수 없어 곤란했다. 

하지만 마담 리스는 내 생각보다 눈치도 빠르고 장사 수완도 좋은 사람이었다. 또한, 그녀는 수도에서 꽤나 유명한 디자이너의 제자였다. 그 덕에 한때는 매우 돈을 잘 벌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무도회 시즌도 아니었고 기껏 있던 손님들마저 새로 열린 의상실에 뺏긴 뒤였다. 

마담 리스는 이런 와중에 자신의 의상실을 방문한 피오라에게서 대박의 기운을 느꼈다. 그녀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 모르셔도, 제가 사이즈는 구해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자신이 아는 디자이너가 며칠 전 차일드 가의 공자님과 공녀님의 옷들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럼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

내 허락이 떨어지자 마담 리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디자인이 실린 노트를 가져오더니 내 앞에 펼쳐놓았다. 모두 예쁜 디자인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어떤 스타일의 옷을 원하시나요?”

내 드레스의 디자인을 떠올린 나는 그 옷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리스에게 말했다.

“만들기엔 시간이 촉박하지만, 이 옷과 한 세트같이 보였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내 말에 리스는 손사래 치며 소리쳤다.

“삼일이면 충분해요!”

사일 뒤 연회가 열리니 삼일이라는 말은 내가 왜 드레스를 주문하는지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야, 내가 왜 드레스를 주문하는지도 알고 있어? 이 언니. 진짜 크게 될 사람이네. 돈 벌 줄 알아.

“그렇다면 부탁하지.”

“저 옷과 최대한 비슷한 느낌을 내달라는 말씀이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가격은 어느 정도로 맞춰드릴까요?”

시세가 어떻게 되려나. 알 턱이 없는 나는 금화가 가득 담긴 주머니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 주머니의 정체를 확인한 리스의 눈이 커졌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

그녀의 두 뺨은 붉게 물들었으며 시선은 이미 돈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내 손에서 돈주머니를 채가듯 양손으로 받아 간 그녀는 소리쳤다.

“네, 맡겨만 주세요!!”

살롱에서 나오자마자 칠드런은 내게 덜컥 화를 냈다. 그가 나에게 무어라 소리치는 것은 처음이라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너무 많이 주신 것 아닙니까?”

칠드런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내가 돈을 정말 많이 주긴 한 모양이었다. 머쓱해진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아직 크레센트의 시세는 잘 몰라서.”

내 말에 칠드런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화의 가치가 비슷하고 시세도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방금 그 양은 너무 많았어요.”

조금 공부를 하고 올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으음, 이미 쓴 돈이니까. 어쩔 수 없지.”

내 말에 칠드런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다시 시내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때 내 눈에 한 음식점이 들어왔다. 

‘리슐레’ 대한민국의 한 음식점을 모방해서 이름을 만든 것 같은 저 음식점을 나는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되게 맛있다고 소개되는 음식점이었다.

아직 저녁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긴 했으나, 가게는 열려 있었다. 손님도 많이 없었고 말이다. 점심도 거르고 온 나는 배도 고팠던 터라, 망설이지 않고 음식점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녀님?”

엥, 학부형 님.

순간적으로 소리 내서 말할 뻔했다. 입을 바로 다문 나는 조금 느린 박자로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생각해 보니 원작을 대충 읽은 내가 알 정도면 꽤나 자주 언급되었다는 거고, 그렇다는 건 여주나 남주가 자주 왔다는 거잖아…?

하, 괜히 왔어. 

나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이른 시간인데 벌써 저녁을 먹으러 오신 겁니까?”

그러면 당신은 이른 시간에 하필 왜 여기 있나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목까지 올라온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고 그러자 바리다스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만났는데, 합석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긍정의 의미를 담아 그의 손을 잡았다. 어차피 사람도 많이 없으니 빨리 먹고 돌아가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음식이 나온 뒤부터였다. 인기 있는 음식점답게 하나둘씩 늘어난 사람들이 어느새 음식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바리다스를 알아본 것인지 그와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어머 저분이 바로 그…”

“차일드 공작님과 데이먼 제국의 황녀님 아니신가.”

숨 막혀.

이렇게 집중을 받으며 밥을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주위에서 우리 얘기를 하며 숙덕거리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도 않고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바리다스를 바라봤다. 

역시 얼굴이 두꺼워야 남주를 하는 건가. 

그는 저런 시선에는 이미 익숙한 것인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그쪽이 불편해서요. 라고는 대답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한 뒤 어색하게 웃으며 스테이크를 썰어 입안에 넣었다. 

확실히 맛있다. 맛있었지만 나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없었다. 나는 불편한 티가 나지 않기 위해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며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스테이크가 불편해 보였나 보다.

“입에 맞지 않는 겁니까?”

그러니 이런 질문을 하지. 스테이크가 아니라, 그쪽이요. 스테이크는 입에 맞는데. 그쪽이 나한테 안 맞아요. 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아뇨, 맛있어요.”

“다행이군요.”

다행이라니, 난 불편한데. 

하지만 그 생각은 다음으로 나온 디저트를 먹자마자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디저트는 오렌지로 만든 타르트였는데, 정말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바삭한 파이, 달콤하게 절인 잼. 그리고 겉면에 살짝 발린 초콜릿이 환상의 조화를 이루었다. 

와, 와, 와.

나는 속으로 계속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실 이 파이를 먹기 위해 이 세계에 떨어진 것이 아닐까? 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너무 맛있었다.

“입에 맞으시나 봅니다.”

다 티가 난 모양이었다. 나는 입을 가리며 머쓱하게 웃었다.

“맛…있네요….”

아이들도 좋아할 것 같은데.

디저트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따로 주문한 다음 포장해 갈까. 

망설이던 나는 입을 열었다.

“혹시 이거 포장해 갈 수 있나요?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내 말에 바리다스는 고민도 없이 벨을 눌렀다. 그가 아이들 것을 따로 포장해주는 건가 기대하던 나는 이어진 그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디저트를 만든 파티쉐가 누구지?”

그의 말에 식당의 지배인이 한걸음에 뛰어나왔고 둘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연봉이라는 단어가 들렸고 나는 생각했다. 

설마… 돈 X랄을 하려는 건가?

막, 내 약혼녀가 마음에 들어 하는 군, 이 타르트를 만든 파티쉐를 공작가로 데려가겠어. 이런 거냐고. 물론 나 때문에 데려가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전 말리지 않아요. 남이 돈 쓰는 거 구경하는 건 좋아하는 편이라. 이런 걸 누가 싫어해. 공작가로 데려와서 하루에 이 파이 백 개씩 만들게 해 버려! 역시 남 돈 쓰는 거 구경하는 게 최고! 

나는 흥미진진하게 그와 지점장의 대화를 엿들었다. 어느새 연봉 협상까지 마친 것인지 그는 바리다스에게 인사하며 내일부터 공작가로 출근하겠다고 말했다.

이게 바로 재벌 3세인가, 남주인공 최고. 내가 살면서 언제 이런 돈 X랄을 구경해 보겠어. 물론 나도 아까 드레스를 좀 비싼 돈 주고 사긴 했지만. 그건 그냥 쇼핑이고 이런 게 진짜 돈 X랄이지.

나는 속으로 바리다스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나와 바리다스는 밖으로 나가 마차를 기다렸다. 잠시후, 바리다스의 마차가 도착했다. 내가 타고 온 마차는 칠드런과 함께 이미 공작가로 돌아간 듯했다. 나는 먼저 돌아간 칠드런에게 주기 위해 포장한 초콜릿 마들렌을 소중히 품에 안고 마차에 올랐다.)

내가 탄 뒤에 바리다스도 마차에 올라탔고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그제야 내가 산 마들렌을 발견한 것인지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그건 뭡니까?”

나는 상자를 살짝 열어 그에게 안을 보여주었다.

“마들렌이요.”

“아이들에게 주려고 사셨나 보군요.”

“아뇨, 칠드런에게 줄 건데요.”

내 말에 그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 내가 뭐 말실수라도 했나? 싶었지만 딱히 실수한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니, 나라도 싫을 거 같긴 했다. 서로 감정이 없는 것은 팩트였지만 그래도 그는 나의 약혼자였다. 아무리 어린 남자지만 그의 앞에서 대놓고 선물해 준다고 하는 것은 기분이 상할 만하다고 생각한 나는 덧붙였다. 

“제가 아이들을 챙기는 것을 좋아해서요.”

약혼자겸 학부형님. 돈 워리. 칠드런은 나한테 남자로 안 보여요. 응애라고 응애. 바람 안 필게. 파혼하고 합법적으로 만날게. 알았지? 

하지만 내 말에 바리다스의 표정은 더 굳어갔다.

뭐야, 대체 왜 이래. 

이유를 고민하던 나는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맞다. 얘 원래 인상 더러웠지. 위로 솟은 그의 눈썹과 강한 눈매는 안 그래도 더럽, 아니 강렬한 그의 인상을 더 무서워 보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단것을 매우 좋아했다. 사나운 인상에 그렇지 못한 입맛. 그런 느낌이었던가. 

바리다스는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아마도 먹고 싶은 것 같았다. 이 초콜릿 마들렌을.

“좀 드실래요?”

나는 그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먹고 싶은 것인지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선물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생각해 보니, 애들은 잘 시간이네요.”

시간은 이제 8시를 겨우 넘어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고민 없이 마들렌 상자를 까 하나를 입안에 넣은 뒤 하나를 더 들어 바리다스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작중 그의 나이가 23살이었나. 아직 애지 뭐. 참고로 23살이면 전생의 나보다 두 살 어렸다. 물론 여기서는 내가 그보다 어렸지만.

헉. 그럼 오빠라고 해도 되는 부분인가. 

근데 그건 너무 양심 없는 것 같았다. 딱히 쟤한테 오빠라고 하고 싶지도 않고. 예상대로 마들렌은 맛있었다, 다만 혼자 오해해 바리다스에게 쓸데없는 변명을 덧붙인 것이 조금 민망했다.

아까 표정을 구긴 것의 의미가 설마 ‘어쩌라고’였던건가.

너무나,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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