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아이들의 무도회
“황녀님! 일어나세요!!!”
“으음.”
로나와 레나의 목소리에 깨어난 나는 눈을 비볐다.
오늘은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들이닥친 그녀들은 내 잠옷을 벗기고 나를 욕조에 집어넣었다.
그녀들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어제 일을 떠올렸다.
결국 토마는 해가 저물도록 오지 않았다. 끼니도 거른 채 하루 종일 연무장에 있었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그래서 시녀를 통해 그에게 옷을 전달했다.
사이즈가 맞아야 할 텐데.
토마에 대해 생각하던 그때 머릿속에서 무언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토마가 준 선물 아직 안 열어봤지.
아이들 드레스랑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씻고 나가서 열어 봐야겠어.
나는 내 몸을 씻겨주고 있는 레나와 로나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이 날 씻겨준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는데, 조금 익숙해진 지금은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페셔널한 그녀들의 손길은 내 몸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하, 이런 거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평생 내가 공작가에서 살 것도 아니고, 호사에 물들어 버리면 나중에 적응하기 힘들 터였다.
그래도 거부하기엔 너무 시원하고 편한걸.
결국 나는 그녀들의 손길에 의지한 채 샤워를 마쳤다.
고통의 코르셋 시간이 끝난 뒤, 그녀들은 화장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나를 화장대 앞으로 끌고 갔다.
거울을 보자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은빛 도는 흰 머리, 보석 같은 푸른 눈. 예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정도의 외모.
여기서 더 예뻐질 수가 있나? 충분히 예쁜 것 같은데.
도끼병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내 얼굴도 아니고 진짜 예쁜 걸 어떡해.
하지만 나는 그녀들의 실력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손길은 안 그래도 예쁜 얼굴을 정말 미치게 아름다운 얼굴로 만들었다.
진짜로 이건 미친 외모였다.
“…미친, 왜 이렇게 예뻐?”
순간적으로 내 얼굴인 것을 잊고 한 말에 로나와 레나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내게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아니… 저런 소리를 듣게 해서 내가 미안하지.
정말 도끼병 환자가 된 것 같았다. 민망함과 갑자기 몰려오는 더위에 나는 머리를 넘기고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때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던 토마의 선물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맞다, 열어 보려고 했었지.
상자를 든 나는 조심스럽게 포장을 벗겼다. 그의 선물은 무려 두 겹으로 포장이 되어 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나는 레나와 로나와 함께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안에 든 것은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목걸이였다. 푸른색 보석 옆에 자잘하게 달린 흰 보석들이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딱 봐도 매우 비싸 보였다.
무슨 여덟 살짜리가 이런 목걸이를 선물해 줘? 집이 잘 사나?
잘 사는구나.
그가 제국 유일 공작가의 자손인 것이 떠올라 금방 납득하고 말았다.
아니, 이걸 납득해도 되는 건가. 선물은 고맙지만, 이건 조금 부담스러운걸.
하지만 그걸 모르는 로나와 레나는 내 드레스와 잘 어울린다며, 어서 착용해 보라고 권유했다. 거절하는 것도 그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 나중에 다른 선물을 사 줘야겠다 다짐했다.
“진짜 아름다우세요. 황녀님.”
토마가 선물해준 목걸이와 맞춰 귀걸이와 머리 장식을 마친 날 보며 로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조금 과한 칭찬을 해주는 그녀들을 보며 작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더 예쁠 텐데.
치장한 아이들을 빨리 보고 싶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어제 보지 못한 토마부터 보러 가야겠어. 내가 선물해 준 옷이 잘 맞을지도 궁금하고 말이야.
나는 토마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토마의 방에는 나보다 더 빨리 도착한 손님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모습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공작님?”
그 말에 나를 돌아본 바리다스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도 연미복을 입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평소보다 몇 배는 잘생겨 보였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잘생겼지? 남주님. 혼자 그렇게 생겨 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는 건가요.
내가 바리다스의 외모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던 그때 토마가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는 내가 선물한 턱시도가 아닌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심지어 바지도 정장 바지가 아닌 기사단 훈련복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건가, 조금 속이 상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에게 인사하자 토마도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황녀님.”
그의 시선은 내 목에 향해 있었다. 기쁜 듯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을 보자 서운하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귀여운 그의 모습에 작게 웃은 나는 입을 열었다.
“선물 고마워, 토마.”
“별것 아닙니다.”
아니, 별거야. 엄청 별거. 나중에 꼭 보답할게 토마.
나는 속으로 대답하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왜 준비를 안 했니?”
“준비한 옷이 모두 맞지 않아서요.”
아, 그래서 내가 선물한 옷을 안 입은 거구나. 맞을 줄 알았는데, 이를 어쩌지.
곤란해진 내 표정에 토마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기사단 정복이 있으니 괜찮아요.”
토마에 말에 나는 속상해졌다.
다른 아이들은 다 세트로 입었는데 너만 안 입으면 좀 그렇잖아.
아무리 당사자인 토마가 괜찮다 해도 그들의 사교계 첫 진출이었다.
나는 원작처럼 아이들이 반푼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길 원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사러 가면 늦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다, 토마. 의상실에 가자.”
그 순간 벌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크림슨이 헉헉거리며 들어왔다. 그는 작은 턱시도 여러 벌을 들고 있었다.
“사 왔습니다.”
그의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림슨이 토마에게 턱시도를 내밀었다. 무려 다섯 벌씩이나 말이다. 그는 마치 이 중에서 너에게 맞는 거 한 벌은 있겠지. 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게 귀족의 삶인가, 나는 감탄했다.
다행히 그가 사 온 것 중에 토마에게 맞는 턱시도가 있었다.
그 옷에 마담 리스가 만들어 준 장식들 중 다른 것을 다 제외하고 보석으로 만들어진 붉은 장미 브로치 하나만 달아 주었다. 다행히도 그것이 토마의 차분한 이미지와 오히려 더 잘 어울렸다. 아이들과 나름 세트로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잘 어울리네.”
내 말에 쑥스러운 듯 토마는 볼을 붉혔다. 그와 꽤 많이 친해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혹, 준비를 마쳤다면 아이들을 봐줄 수 있습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근데 왜 바리다스가 여기 있는 거지? 토마에게 맞는 옷이 없어서 찾아온 건가?
그러기에는 그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하지만 내 의문은 오래 갈 수 없었다. 토마가 내 팔을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저도 갈래요.”
네, 같이 가죠.
그의 귀여운 모습에 나는 의문 따위 날려 버린 채 그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나갔다.
* * *
한편 피오라가 나간 방 안에는 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방문이 열리더니 시녀와 시종들이 몰려 들어왔다.
다 모인 건가?
인원을 대충 파악하려는 듯 바리다스의 붉은 눈동자가 그들을 전체적으로 한 번 쓸어 보았다. 다 모인 것 같다는 크림슨의 말에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주도자가 누구지?”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머리를 조아린 채 덜덜 떨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으득, 조용한 방 안 이가 갈리는 소리가 살벌했다.
“다시 한번 묻지. 주도자가 누구지?”
하지만 아무도 섣부르게 입을 열지 않았다.
참다못한 바리다스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한 시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애처롭게 보일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에도 바리다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말하면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하, 라고 어이가 없다는 듯 낮게 숨을 내뱉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리다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녀는 주저하더니 손가락으로 한 여자를 가리켰다. 그녀는 바리다스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퀘이트 시녀장님께서….”
시녀의 말에 바리다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한층 더 강해진 위압감에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차일드 가에는 시녀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차일드 공작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크림슨이 맡아서 처리했기에 공작가에는 시녀장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시녀들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계급이 존재했다. 그 가장 우위에 있는 사람은 퀘이트라는 시녀였다.
퀘이트는 차일드 가에서 가장 오래 일한 사람 중 한 명으로 바리다스가 공작위에 오르기 전 시녀장을 맡고 있던 사람이었다. 바리다스가 공작위에 올라간 뒤 시녀장이 사라져 그녀도 자동으로 평범한 시녀가 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다른 시녀들은 그녀를 시녀장으로 대우해 주는 듯했다.
바리다스는 퀘이트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나오라는 듯 손짓한 그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입을 열었다.
“왜 공자와, 공녀들에게 가는 예산을 빼돌린 것이지?”
바리다스의 말에 퀘이트는 이를 으득 갈더니 소리쳤다. 그녀의 태도에 바리다스의 주먹이 쥐어졌다.
“그런 반푼이들이, 왜 차일드 가의 일원인 겁니까! 그들에게 가는 것 보다. 저희가 사용하는 게 더 차일드 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뭐가 그리도 당당한 것인지 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럼에도 바리다스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들을 가치도 없는 헛소리군.”
하지만 바리다스의 말에도 퀘이트는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대 공작과 공작부인의 이름을 들먹이며 궤변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바리다스에게는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었다.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인지 퀘이트는 소리쳤다.
“저는 그들을 차일드의 인원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누가 너의 인정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건…!”
퀘이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바리다스는 시선을 퀘이트에게서 다른 모든 사용인들에게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아이들은 차일드 가의 일원이다. 그리고 그건 너희들 따위의 인정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바리다스는 다시 퀘이트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가 아주 어릴 때부터 봐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생들에게 해를 끼친 이상 그는 더 이상 그녀를 공작가에 둘 생각이 없었다.
“너는 그동안 봐온 정이 있으니, 해고하는 선에서 끝내도록 하지.”
그의 말에 그녀는 억울한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흐느꼈다. 항상 차분하게 정리되어 있던 그녀의 머리는 이미 산발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제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저는 도련님을 어릴 때부터 모신 사람입니다!! 전대 공작님조차도 제겐 이렇게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 사실이 오히려 자신에게 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퀘이트였다. 바리다스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이군, 나는 네 도련님이 아니라, 공작인데 말이야.”
그의 모습은 퀘이트가 알고 있던 어린 바리다스가 아니었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흐느끼며 그의 바지를 붙들었다.
여기서 일한 게 몇 년인데, 이렇게 쫓겨 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바리다스는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옆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에게 끌고 가라는 듯 손짓했다.
퀘이트는 그들의 손에 끌려 방 밖으로 나가는 순간까지 억울하다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죄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 하지만 다시 내 동생들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 누구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바리다스의 말에 시종들은 머리 숙여 인사했다.
사용인들이 모두 나간 방 안, 바리다스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는 아이들이 이렇게 빠르게 자라는지도, 이렇게 무시당하고 자라는지도 몰랐다.
그때도 무시했던 사람들이니 어련할까. 애초에 다 해고해 버렸어야 했다. 자신의 실수였다. 바리다스는 이를 갈았다.
아이들을 사랑하진 않았지만,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이들이 어떤 것에도 부족함 없이 자라길 원했다. 토마에게 맞는 턱시도를 찾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보다 빠르게 자란다는 사실을 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피오라가 선물한 옷까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들었고 그는 최대한 비슷한 디자인의 턱시도를 주문하기 위해 그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토마의 방 안으로 들어간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토마의 방은 어엿한 귀족 공자의 방이라 하기 민망할 만큼 텅 비어있었다. 조사를 한 결과 토마에게 가야 할 돈을 누군가가 빼돌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반년 동안 말이다.
혹시나 하여 확인해보니 그건 토마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 감정은 자신이 아이들을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아, 그런 취급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극에 달했다.
그것은 자기혐오였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아이들에게 잘해줬어야 했다.
바리다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정이 어쨌든 아이들이 이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피오라 덕분이었다. 그가 토마에게 턱시도를 선물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맞지도 않는 옷을 입은 채, 연회에 참가했겠지. 만약에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아이들이 받을 상처는 상당할 터였다.
신세를 졌군.
그는 피오라에게 무엇이 되었든 꼭 좋은 것으로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연회에 참가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