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8)화 (18/207)

17. 아이들의 무도회

연회장 앞에 도착한 나는 감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앞에는 마치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꽃과 보석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에서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내려 몇 배는 더 화려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정말, 화려하다는 말 말고는 이 광경을 표현할 수 없었다.

아니 이 정도의 규모였어? 

많아야 사십 명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사람이 아니라 마차가 사십 대 이상으로 보였다. 

뒤따라 내린 아이들도 연회장을 보며 감탄했다.

“이렇게 불이 켜지는 건물이었구나!”

“완전 이뻐여!”

레몬과 자스민은 입을 벌리고 연회장을 바라봤다. 

뒤이어 도착한 마차에서 그린과 렌, 토마가 내렸다. 그들도 화려한 불빛으로 번쩍이는 연회장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아이들이 내린 지금 나는 이제 연회장에서 시선을 돌려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들이 모두 마차에서 내린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들어갈까?”

내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하지만 누가 말괄량이 아니랄까 봐 자스민은 이미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안아 들어 렌의 옆에 내려놓았다. 

나에게 제지당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자스민에게 미움을 받은 것 같아 조금 속상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길을 잃어버리면 큰일이니까.

“자 다들 나란히 서서 손잡고.”

내 말에 쌍둥이들이 서로 손을 잡았고, 자스민과 렌이 손을 잡았다. 

내가 혼자 가만히 있던 토마에게 손을 내밀자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내 손을 잡았다. 그의 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귀여워 작게 웃은 나는 옆을 돌아봤다.

아이들이 한 줄로 손을 잡은 것을 확인한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다들 잘 잡았으면 올라갈까?”

나는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드레스와 머리 장식 등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한시라도 빨리 들어가고 싶은 것인지 발을 동동 구르며 내 손을 이끌었다.

“어서 들어가요!”

“빨리, 빨리!!”

그런 그들의 모습이 귀여워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아이들과 함께 올라가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아이들과 나를 알아본 것인지 길을 비켜 주었고 무릎을 굽히거나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내게 인사했다.

예법을 잘 알지 못하는 나는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다행히도 몸에 습관이 남아 있는 것인지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뒤를 바라보자 아이들도 능숙하게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우아한 행동과 차일드 가의 상징인 붉은 눈동자, 그리고 아이들의 화려한 외모는 가만히 있어도 그들이 차일드 가의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한눈에 봐도 귀티가 나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대체 원작에서는 왜 아이들을 반푼이라고 무시한 거지?

장담컨대 이곳에 모인 그 어떤 귀족보다 아이들이 더 우아하고 고상했다.

미래의 아이들은 다른 귀족들에 비해 늦은 데뷔당트를 치르게 되고 그로 인해 사교계에서 알게 모르게 무시를 받는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귀족들에게 인사 받는 아이들을 보며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역시 데려오길 잘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계단을 모두 오르자 커다란 문이 눈앞에 들어왔다. 성인 남성 둘 이상이 가로로 서야 문의 끝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문을 어떻게 열어야 하나 고민하던 그 순간 한 명의 기사가 다가와 문을 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소리쳤다.

“데이먼 황녀 전하와 차일드 가의 자제분들께서 입장하십니다!!”

문이 완전히 열렸고 작게 들리던 음악 소리가 커져 웅장하게 주변을 채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노래가 끊겼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닿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많은 시선에 나는 떨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드레스 자락을 붙잡았다. 그때 반대 손에서 느껴진 힘에 나는 깜짝 놀라 옆을 바라봤다. 내가 떨고 있는 것을 느낀 것인지 토마가 나와 잡은 손에 힘을 준 것이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에 비해 그의 눈과 손도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고마워 토마.”

대답하는 것처럼 토마의 손을 강하게 한 번 쥔 나는 연회장 안으로 한 발짝 걸어 들어갔다. 긴장 따위 할 필요 없었다. 나는 소설 속의 악녀 피오라이며 데이먼 제국의 황녀였고 차일드 공작의 약혼녀였다.

꿀릴 거 없어, 이예린.

심호흡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이 제국에서 가장 귀한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까. 

나와 아이들이 모두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자 노래가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다.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과 함께 연회장의 중심으로 향했다.

길게 서 있기 힘든 아이들을 배려한 것인지 연회장의 구석에는 아이들의 의자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아이들을 그곳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토마가 내 손을 놓았고 렌과 레몬이 내 등을 떠밀었다.

“저희끼리 갈 테니까, 연회를 즐기셔도 괜찮아요.”

아니 난 연회 즐기기 싫은데? 나 너희랑 같이 있을래.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나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이들은 내가 연회를 즐기는데 자신들이 방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딱히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도 다른 귀족들과 인사를 나눌 필요가 있었고 그들의 배려심이 기특했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아이들의 배려를 받기로 했다.

“그렇게 할게. 고마워.”

아이들이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주위로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내게 이름과 직위를 말하며 자신을 소개했고 나도 최대한 그들에게 맞춰주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 누구에게도 길게 곁을 내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게 인사를 한 것을 확인한 나는 목을 뒤로 젖혔다.

뻐근해.

어찌나 많이 인사를 했는지 무릎과 목이 아파 왔다. 나는 목에 손을 얹고 강하게 눌렀다. 그러자 뚜둑 소리가 났다. 다행히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은 듯했지만 나는 내 목을 놓을 수 없었다.

순간 망했음을 느꼈다. 고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수험생 시절 수도 없이 겪어왔던 이 증상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담 왔다.

나는 목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더 힘을 주었다. 목걸이에 달린 자잘한 보석들이 손에 닿아 따끔거렸다. 토마가 선물한 목걸이가 초커 형태의 목걸이였기 때문에 목을 주무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분명 목과 손에 보석 모양으로 자국이 남을 터였다.

젠장, 나는 목에 손을 얹고 있는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보이길 바랐다. 그럴 리 없을 태지만 말이다. 

제발, 아무도 말 걸지 말아라. 

나는 최대한 목걸이를 피해 가며 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때 한 귀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차 라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뇨, 인사 까먹어도 괜찮으니까. 오지 마세요!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당연하게도 그럴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아마도 그녀는 상당히 눈치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목에 손을 얹고 있는 내게 다가올 리가 없었으니까.

“안녕하세요 황녀님.”

그녀가 내게 인사를 건넨 순간, 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인사를 안 하고 목을 지키고 예의를 잃을 것인지, 아니면 인사를 해 예의를 지키고 목을 잃을 것인지. 하지만 나는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유교 사상이 박혀 있는 유교 걸이였다. 목 정도야 부러져도 다시 붙이면 되는 거지. 차마 인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무언가 내 목에 닿았다. 순식간에 목에 통증이 사라지고 목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닿은 부분에서부터 시원하고 은은하게 퍼지는 이 느낌은 마치 파스를 붙인 것만 같았다. 그것도 아주 잘 드는 파스.

그녀에게 인사를 한 뒤 나는 목을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그 무언가가 내 목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덥석.

그 무언가를 붙잡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것이 사람 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남자의 손.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되었다. 이걸 함부로 몸에 손댄 것을 뭐라 해야 할지, 아니면 도움을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망설이던 나는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언제 온 것인지 모를 바리다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졌다고 딱히 뭐라고 하기도 애매한 인물의 등장에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바리다스의 손을 붙잡은 채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손을 잡은 거 따위에는 개의치 않는 듯, 손을 잡은 그대로 내 팔을 원래 자리로 내려놓더니 나를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나는 반대 손으로 목을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시원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방금 그건 마법인가? 

나는 바리다스를 살짝 바라보며 생각했다.

남주 버프가 이런 건가 눈치가 엄청나네. 눈치 빠른 사람 최고.

그의 눈치는 지금 내게 사막의 오아시스, 북극의 모닥불 같았다. 내 목을 살려 준 은인.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손이 내 목에 다시 한번 닿았다. 그는 내 목 주변을 한두 번 누르더니 입을 열었다.

“운동을 조금 더 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목이 많이 뭉친 걸 보니.”

그는 근육을 풀어주는 일이 익숙한지 몇 번 내 목을 꾹꾹 눌렀다. 그의 손이 닿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이 마사지를 받은 것처럼 시원해져 있었다. 그의 손이 떨어졌을 땐 조금 남아 있던 통증마저 온전히 사라진 뒤였다.

나는 바리다스의 손이 마치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봤다.

만능 손….

그리고 바리다스와 함께 단상으로 향하던 도중,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사람들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바리다스까지 왔으니, 아까보다 더 시선을 느꼈으면 느꼈지, 안 느끼진 않았을 텐데.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의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귀족들의 시선은 나와 바리다스가 아닌 다른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을 바라보니, 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렌과 토마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레몬은 책을 읽는 그린의 어깨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리고 자스민은 케이크를 산처럼 쌓아 먹고 있었다.

양 볼을 부풀리고 케이크를 먹는 그녀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나 말고도 다른 귀족들도 그 사실을 느낀 것인지 모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스민을 보고 있었다.

저렇게 귀여운데 당연히 보고 싶지.

그 모습에 나는 무언가 뿌듯함을 느꼈다. 수많은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인지 자스민은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케이크를 다 먹은 그녀는 새 케이크를 가져와 포크로 자른 뒤 찍어 렌에게 내밀었다. 

“온니, 아!”

피식 웃은 렌은 케이크를 먹은 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스민은 졸고 있는 레몬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에게 케이크를 먹여 주었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듯 환하게 웃었다.

“자스민이 줘서 더 마싯찌?”

그 모습에 자식이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은 심장을 부여잡았다. 연회장에 온 모든 귀족들이 자스민에게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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