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19)화 (19/207)

18. 아이들의 무도회

하지만 자스민의 사랑스러움도 연회장을 오래 점령하지 못했다. 바리다스가 단상에 오르자마자, 모두가 그를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사람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케이크에 정신 팔린 자스민도 꾸벅꾸벅 졸던 레몬도 어느샌가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시선에 아무런 의식도 되지 않는 것인지 무표정하게 귀족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다들 참가해줘서 고맙군, 예상했겠지만 오늘 이 연회를 연 것은 나와 약혼을 하게 될 데이먼 황녀를 그대들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서다.”

내 예상이 맞았다.

바리다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를 따라 무표정을 최대한 유지하며, 드레스 한쪽을 들며 귀족들에게 인사했다.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니, 그에 준하는 존중과 예의를 갖추도록.”

아니 그건 안 될 건데요.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도망을 가려는 것과 거리 두기, 그 두 가지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망갈 수 없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에게서 두 발짝이나 물러났는데 그가 손을 계속 잡고 있어 무언가 이상한 자세가 되어 버렸다. 바리다스는 그럼에도 개의치 않는 듯 말을 마쳤다.

“모두 즐겁게 연회를 즐기다 가길 바라네.”

그 말을 끝으로 바리다스는 단상에서 내려왔다.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로 말이다. 

우리 비즈니스 아니었나요? 이거 좀 놔봐. 

하지만 바리다스의 눈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당신을 환영하는 연회이니 첫 춤은 함께 추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그…렇죠…?”

내 속을 꿰뚫어 본 바리다스의 말에 나는 침을 삼켰다. 

귀신인가? 도망가려는 거 어떻게 알았지?

…이 남자, 내가 도망가려는 거 알고 일부러 손 안 놔준 거구나.

소름 돋는 눈치였다. 

아니, 근데 왜 이 눈치를 가지고 왜 아이들이 학대당하는 건 몰랐던 거야? 작가님 이거 설붕 아닌가요? 아니면 차일드 가의 사용인들이 다 오스카 상 수상자인가? 그러지 않고서야 이 귀신같은 남자한테 어떻게 숨겨.

“제가 눈치가 빠른 게 아니라, 당신 표정이 너무 솔직한 겁니다.”

그랬구나… 저 남자가 귀신인 게 아니라, 내가 바보인 거였어. 

깨달음과 함께 몰려온 민망함에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 내 모습 때문에 웃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바리다스의 입꼬리가 살짝, 아주 살짝 올라가 있었다.

“손을.”

바리다스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노래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바리다스는 부드럽게 나를 리드하기 시작했고, 춤이 피오라의 몸에 배어 있는 덕인지 나는 별 무리 없이 그를 따라갈 수 있었다.

몸치라고 놀림 받던 내가 이렇게 출 수 있다니, 피오라의 몸 덕분이긴 했지만 왜인지 뿌듯했다. 

그렇게 춤을 추던 도중 나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에게 살짝 미소를 짓자 아이들도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과도 춤을 춰도 될까요?”

“원한다면.”

‘네’라고 대답하며, 바리다스에게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스텝이 꼬여 드레스를 밟고 말았다. 피오라의 몸에 춤이 익어있었고 또 능숙하다고 해도, 역시나 지금 춤을 추고 있는 것은 나였다. 춤이라고는 중학교 때 플래시몹으로 춘 것이 마지막인 몸치 이예린이란 말이다.

춤에 집중하지 않고 딴짓한 것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내 몸은 바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의 힘이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덕에 넘어지진 않겠지만 뒤로 넘어가겠지. 상상만 해도 민망했다. 내 몸이 뒤로 젖혀지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딴짓하지 말걸.

그 순간, 무언가 내 허리를 붙잡았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바리다스의 손이었다. 덕분에 나는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나를 다시 똑바로 새워 준 바리다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아이들과 춤을 추는 것은 안 될 것 같군요,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당신을 받아 줄 수 없을 테니.”

…팩트라 반박할 수 없었다.

저렇게 말하는 그가 얄밉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원래 바리다스가 저렇게 장난을 치는 성격이었나.

원작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 학부형님이랑 친해져서 나쁠 거 없으니까. 

순간이었지만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생긴 남자와 춤추다가 넘어졌는데, 그 남자가 허리를 잡고 받아 주다니. 이런 게 낭만 아닐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내 대답에 바리다스는 작게 웃으며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별거 아닙니다, 그대가 도와준 거에 비하면.”

바리다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말하는 거지?

아, 아이들 드레스를 맞춰 줘서 그런 건가. 근데 그건 내 드레스로 퉁 치기로 한 거 아니었나?

어차피 그에게 무언가를 더 받는 것도 부담스러웠던 나는 이걸로 그와의 빚을 청산하기로 했다.

“그럼 이걸로 쌤쌤이네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웃으니까, 진짜 잘생겼네.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아.

내가 그의 얼굴을 넋 놓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 바리다스가 나를 바라봤고, 순간적으로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랐지만, 다행히도 바리다스는 내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 못 챈 듯했다.

“아뇨, 부족합니다. 비겼다고 하기엔 그대에게 너무 신세를 졌으니 나중에 더 좋은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부담스러운데요. 

비겼다는 표현 말고 다른 뜻으로 알려 줄 걸, 아주 잠깐 후회가 되었다.

“알겠어요.”

내 말과 동시에 노래가 끝났다. 드디어 그와 손을 놓을 수 있나 했는데, 그는 내 손을 놓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왜 안 놓냐는 의미를 담아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내 손을 자신의 팔에 올려놓았다. 에스코트를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어차피 아이들한테 가려는 것 아닙니까? 함께 가죠.”

이건 아이들과 바리다스의 사이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 아닌가? 그치, 같이 연회에 참가했으면 춤도 추고 그래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리다스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좋아요.”

바리다스와 함께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내가 아닌, 바리다스를 말이다. 

아직도 친형을 이기기엔 무리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인사만 그에게 먼저 했을 뿐이지 잠든 레몬과 졸고 있는 자스민을 제외한 아이들은 곧바로 내게 달려와 조잘거리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연회의 케이크가 맛이 있다는 둥, 사람들 옷이 예쁘다는 둥. 아이들답게 순수한 대화였다.

“안아조.”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그때, 눈을 비비며 다가온 자스민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내가 그녀를 안기 위해 팔을 뻗은 순간, 바리다스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금방 바닥에 넘어질 것처럼 고개를 까딱거리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 레몬까지 안더니 바로 옆에 준비된 의자에 걸터앉았다.

“동생들은 제가 돌볼 테니 그대는 편하게 연회를 즐기도록 해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린이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그린은 바리다스가 나를 에스코트 할 때처럼 내 손을 자신의 팔에 끼더니 씩 웃었다.

“그럼 저랑 춤추실래요?”

아니, 이 집 유전자가 너무 위험하네. 심하게 잘생기고 우월해서 위험해.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렌도 소리쳤다.

“저도, 저도 출래요!”

“…원하신다면 저도 춰 드릴 수 있어요.”

그들의 말에 웃음을 터트린 나는 렌과 그린의 손을 잡고 연회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가장 늦게 말해 내 손을 잡지 못한 토마가 신경 쓰인 것인지 렌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토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앞으로 향한 틈을 타, 나는 뒤를 돌아 바리다스에게 입 모양으로 소곤거렸다. 

“자스민과 레몬을 봐 주셨으니, 이걸로 진짜 쌤쌤이에요.”

그리곤 다시 앞을 돌아보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런 내 뒤에서 작게 웃음을 터트린 바리다스가 잠든 레몬과 자스민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중얼거렸다.

“아니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니. 오히려 내가 보답을 더 해야지.”

나와 가장 먼저 춤을 추는 것은 제일 처음 말을 꺼낸 그린이었다. 그다음으로 토마, 마지막으로 렌과 춤추기로 했다. 렌은 자신이 기다리는 동안 누구와 춤을 춰도 상관없지만, 그린과 토마가 같이 춤을 출 리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도 키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린과 춤을 추기는 조금 힘들었다. 그와 높이를 맞춰 열심히 춤을 추고 있던 그때, 그린이 말했다.

“저는 황녀님이 저희 형님이랑 약혼하게 돼서 좋아요.”

그린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작게 웃었다. 그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너희를 만나서 기뻐.”

내 말에 그린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들과 형아가 밝아진 것은 전부 황녀님 덕분이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떠나지 말아요.”

나를 잡은 그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느낌에 그린을 안아 주고 싶어졌다.

그린의 말에 감동을 받음과 동시에 그들이 안타까웠다. 어린 나이에 가족을 모두 잃고 무관심 속에서 살아온 아이들이.

“…당연하지.”

아이들의 모습에서 나의 과거가 떠올라 아주 조금, 슬퍼졌다. 노래가 끝났고 나는 마지막으로 그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희를 떠나지 않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 그러니까, 너희도 그 웃음을 잃지 말아줘.

다음 차례는 토마였다. 그린보다는 키가 훨 큰 그였기에 나는 아까보다 편하게 춤을 출 수 있었다.

“연미복, 잘 어울리네.”

“당연하죠.”

내 말에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짓는 토마 때문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준비해 준 옷인데.”

이어진 토마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의 시선은 내가 선물해 준 장미 브로치를 향해 있었으니 말이다.

저거 고맙다는 말이지? 그치? 

원작 대표 츤데레 다운 표현이었다.

“내 안목이 좀 뛰어나긴 해.”

“모델이 뛰어난 덕분 아닐까요?”

아, 진짜 너무 귀엽네. 그래, 네가 다 해. 꼬마 도련님. 

나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어느새 노래는 끝나가고 있었다.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토마는 내 손을 놓고 입을 열었다.

“황녀님은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아요.”

…!

얼마 전 그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가 진심을 알아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토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너희들은 사랑받을 만한, 아니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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