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아이들의 무도회
마지막 차례는 렌이었다. 그녀는 토마와 그린과 연속으로 춤을 춰 조금 지친 것인지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렌의 체력이 가장 약하다고 했지.
쉬는 것이 나을 거 같은데.
“힘들어 보이는데 조금 쉴래?”
하지만 렌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괜, 찮아요… 헉, 더 출 수 있어요.”
하지만 그녀는 지금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그때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렌을 안아 들었다. 한 팔로 그녀의 다리를 지탱하고 남은 한쪽 팔로 렌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추면 되지 않을까?”
나와 렌의 키가 비슷해져 그녀와 내 시선이 바로 맞닿았다. 그것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인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너무 좋아요.”
“안 불편하니?”
“네, 괜찮아요.”
렌이 붉어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춤이라고 하기에는 내가 렌을 안은 상태로 돌고 있는 정도였지만 렌은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연회는 재미있었니?”
내 말에 렌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얼굴은 근래 본 렌의 미소 중 가장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양팔로 내 목을 끌어안았다.
“기대했던 것 보다, 더 화려하고 재밌어요. 데려와 주셔서 감사해요.”
렌의 행동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나를 끌어안은 렌의 등을 토닥여 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데려온 것도 아니고, 네가 즐거웠다면 그걸로 충분한걸.”
처음으로 내가 피오라에 빙의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를 돌봐 주고 지켜 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이렇게 해줄 수 있으니.
너희의 상처가 더 깊어지기 전에 내가 너희를 만난 걸 난 감사하게 여겨, 정말로.
그때 내 목에서 팔을 땐 렌이 웃으며 날 마주 봤다.
“황녀님이 오라버니와 결혼하는 것이 저는 너무 좋아요. 그러면 저희가 가족이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맘 편히 웃을 수 없었다. 나는 렌이 말하는 가족이 바리다스와의 결혼으로 묶인 가족이라면 나는 그녀의 진짜 가족이 되어 줄 수 없을 테니까.
내게서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날 잡은 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에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꼭 가족이라는 이름이 있어야 아이들의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당연히 가족이 되는 거지.”
내 말에 렌은 웃으며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와 너희가 모두 편안하게 지낼 수 있으면서 내가 너희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이 많아지는 날이었다.
렌을 안은 채, 바리다스에게로 다가가자 언제 깬 것인지 레몬이 바리다스의 팔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큰오빠, 나랑 춤출래요?”
말이 권유였지 그녀의 행동은 거의 강제였지만 말이다. 렌도 바리다스와 춤을 추고 싶은 것인지, 그녀가 그곳을 빤히 바라봤다.
그때 내 쪽으로 다가온 바리다스가 자신이 렌을 안겠다는 것처럼 팔을 내밀었다.
“이리 오렴.”
렌의 귀가 붉어졌다. 그녀가 팔을 내밀자 바리다스는 조심스럽게 렌을 안아 들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렌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체력을 조금 기르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괜찮아요, 그니까 저도 오라버니랑 춤출래요.”
렌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바리다스의 손이 렌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예상하지 못한 그의 행동에 렌의 눈이 커졌다.
“다음번에 추면 되니, 오늘은 쉬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는 지금 다음번에 열리는 연회에도 아이들을 데려와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바리다스가 빈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있어 그 ‘다음’이라는 말은, 바리다스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가치가 있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토마였다.
“다음번에도, 참가할 수 있는 거예요?”
토마의 말에 바리다스의 눈동자가 잠깐이지만 동요했다. 그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나조차도 눈치채기 힘을 정도로 아주, 잠깐의 찰나였다.
그는 다시 표정을 관리하며 미소 지었다.
“너희가 참가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바리다스의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바리다스는 레몬과 함께 춤을 추러 가기 위해 렌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바리다스의 손이 그녀에게서 떨어지기 전, 렌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다음에 꼭, 같이 춤추는 거예요.”
“그래.”
바리다스는 레몬의 손을 잡고 아이들과 멀어져갔다. 그의 모습이 사람들 사이로 온전히 사라졌을 때, 그린이 입을 열었다.
“형아, 큰 형아가 우리 안 싫어하나 봐.”
“내가 말했지, 형님은 우리 안 싫어한다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토마의 표정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바리다스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그의 양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자스민이 두 눈을 비비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안아 달라는 것처럼 내 드레스를 잡아당겼다.
내가 그녀를 안아 들자 내 목에 얼굴을 묻은 채 입을 열었다.
“황녀밈, 큰오빠 어디 갔어여?”
여기서 레몬과 춤을 추러 갔다는 얘기를 하면, 분명 그녀는 자신도 가겠다고 하며 조를 터였다. 시간은 9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평소의 자스민이라면 잠이 들 시간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아이들에게 눈짓하며 입을 열었다.
“잠깐 어디 가셨어, 금방 돌아오실 거야.”
내 말에 자스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잠들면 휴게실로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한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생김새와 눈동자 색, 그리고 검을 다루는 것까지 바리다스와 대부분을 닮은 토마이지만, 그는 바리다스에게서 단 하나를 닮지 못했는데, 바로 인생을 살면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눈치를 쏙 빼놓았던 것이다.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토마는 입을 열었다.
“레몬이랑 춤추러 가셨는데?”
그의 말에 렌과 그린이 그의 옆구리를 한 번씩 찔렀고 토마는 동생들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한 듯했다. 그의 말에 눈을 번쩍 뜬 자스민이 소리치기 전까지 말이다.
“나도 큰오빠야랑 춤출래!!”
그들의 주위에서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이 모두 돌아볼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내 품에서 뛰어내린 자스민은 바리다스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막 둘러보더니 연회장 한가운데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것을 렌이 제지하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도 큰오빠야랑… 춤추고 싶은데….”
자스민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고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토마는 쩔쩔매며 나를 올려다봤다.
울먹이는 자스민의 눈동자와 당황한 토마의 붉은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향했다.
아니, 나도 어떡할 방법이 있는 건 아니라고. 바리다스는 언제 오는 거야?
나는 바리다스가 사라진 방향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그의 잘못이 아닌 걸 알지만 말이다.
“미안해. 자스민, 오빠랑 먼저 추러 갈까?”
토마의 말에 자스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소리쳤다.
“시러! 난 큰오빠야랑 출 고야!!”
금방이라도 자스민이 눈물을 터트릴 것 같아, 나는 그녀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라스로 나가는 게 났겠어.
연회에서 차일드 가의 막내가 눈물이 흘렸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나는 자스민의 등을 토닥여 주며 내 뒤를 따라오는 토마에게 속삭였다.
“괜찮으니, 기다리고 있으렴.”
사람들 사이를 지나 커튼이 쳐진 테라스로 몸을 피했다. 다행히 자스민은 더 이상 칭얼거리지 않았다.
봄이지만 밤이라 그런 것인지, 테라스는 내 생각보다 더 쌀쌀했다.
나는 두르고 있던 숄을 벗어 자스민에게 둘러 주었다. 그녀는 울먹이는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자 자스민은 내 손에 얼굴을 비볐다.
“이제 좀 괜찮니?”
내 질문에 자스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 아니 오빠랑 그렇게 춤이 추고 싶었어?”
“춤 가튼 건 딱히 간심 업서. 근데 춤을 추면 큰오빠랑 같이 있을 수 이짜나.”
알고는 있었지만, 아이들은 내 생각보다 바리다스를 훨씬 더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나눈… 큰오빠랑 치내지고 싶어.”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자스민에게 현재 바리다스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일 터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 안에 남은 유일한 어른, 그것이 바리다스였으니 말이다.
“큰오빠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오늘은 자스민이 자고 있어서 깨울까 봐 같이 못 간 거지. 오빠도 너랑 친해지고 싶을걸?”
내 말에 자스민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가 금방 표정을 굳혔다. 시무룩해진 그녀는 내 품을 파고들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근데 큰오빠야는 한 번도 안 안아 주던데….”
바리다스가 잘못했네. 이렇게 귀여운데 어떻게 한 번을 안 안아 줘.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그건 다 표현을 못 해서 그래.”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자스민이 어느새 내 품 안에서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네, 작게 중얼거린 나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를 숄로 다시 한번 덮어준 뒤 연회장으로 가려고 뒤를 돌자 테라스의 커튼이 걷어졌다.
“여기 계십니까, 황녀님?”
바리다스였다.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당황한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내 품 안에서 편안한 표정으로 잠든 자스민을 바라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은 다 저택으로 돌려보냈으니 그대도 원한다면 돌아가도 괜찮습니다.”
알겠다고 대답을 하려는 순간, 내 입에서는 대답 대신 재채기가 나왔다. 테라스가 너무 추운 탓이었다.
내 숄을 자스민이 두르고 있는 것을 본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겉옷을 벗어 내게 덮어주었다.
“아니, 먼저 들어가도록 하시죠.”
딱히 사양할 생각도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조심해서 들어오세요.”
“그러죠. 아이들을 잘 돌봐줘서 고맙군요.”
조심하라는 나의 말에 미소 지으며,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갑작스런 스킨쉽에 놀란 나는 두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오랜만이라, 무언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 * *
내가 저택에 돌아왔을 땐 이미 아이들은 잠에 빠져든 뒤였다. 나는 자스민을 그녀의 방에 데려다준 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 아까 아이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족이라….”
나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행복해지길 바랐다. 그 사실은 확실했다.
다만, 내 모든 감정과 시간을 헌신하면서까지 아이들을 위할 순 없었다. 나도 이제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야만 했다. 바리다스와 파혼하게 된 뒤에도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고, 나도 내가 살아갈 곳이 필요했다. 데이먼 제국에서 파혼하고 돌아온 황녀를 받아 줄 리도 만무했고 말이다.
앞으로의 미래를 고민하던 그때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왜 나는 당연히 파혼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지?
원작에서 피오라가 바리다스와 파혼하게 되는 계기는 그녀가 아이들을 괴롭혔다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와 바리다스의 약혼은 양측의 사적인 감정이 아닌 가문 간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변심과 사랑, 그런 이유로 파혼이 가능할 리 만무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여주가 오기 전까지 아무런 문제를 안 일으키면 되는 거 아닌가?
…공작가 안주인이라는 평생직장 정도면 나쁘지 않잖아.
애초에 나는 딱히 누군가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니 말이다.
왜 꼭 원작대로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지. 이미 내가 많은 것을 바꿨는데.
내가 가장 우선시하고 싶은 것은 이곳에서의 내 삶과 행복이었고 그리고 아이들이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인가 미래는 언제나 바뀔 수 있는 것인데. 나는 그냥 원작이고 나발이고 내 맘대로 살면 되는 거였다.
바리다스가 여주가 좋아 죽겠다고 하면 그냥 죽으라 하지 뭐.
생각 정리를 마친 나는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니까, 나와 아이들의 행복만 생각할래. 굳이 내가 다른 사람들의 미래까지 걱정해 줄 필요는 없잖아?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안 주는 선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