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작고 어린 생명체
“칠드런, 혹시 근처에 동물병원이 있니?”
내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물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곳을 말씀하시는 곳이라면… 아뇨. 그런 곳은 없습니다.”
그럼 어떡하지,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바리다스에게 부탁해야 하나. 아니. 분명, 미리 얘기해 달라고 했었지.
그때 뒤늦게 로나와 레나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녀들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입을 열었다.
“로나, 붕대와 수건을 가져와. 레나, 너는 공작님에게 부탁이 있다고 전해 주고 렌의 상태를 봐줄 주치의도 불러 줘.”
이 시간대라면 분명 집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터였다.
그녀들이 방 밖으로 나간 뒤 나는 다시 강아지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두 아이 모두 상처가 엄청나게 깊은 것은 아니었다. 상처보다는 탈수와 굶주림으로 이렇게 된 것 같았다.
그때 로나가 붕대를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에게서 붕대를 받아든 나는 입을 열었다.
“작은 주사기랑, 물… 그리고 닭가슴살을 삶은 다음에 곱게 갈아 줄 수 있을까?”
“네, 알겠습니다.”
로나가 방 밖으로 나가고 다시 강아지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상처가 작다고 하더라도 소독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수건으로 강아지들의 몸을 닦은 뒤 남은 소독약으로 천천히 그들의 몸을 닦아 주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것인지 반항은 하지 않았지만, 소독이 아픈 듯 끼잉거리기 시작했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처를 붕대로 감아준 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로나가 내가 부탁한 것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녀에게서 물건들을 받아 든 나는 주사기의 바늘을 제거한 뒤 물을 담아 강아지들에게 먹여 주었다. 그런 내 모습을 신기한 듯 로나와 칠드런이 바라봤다.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 한 마리는 삶아온 닭가슴살까지 모두 먹어 치우더니 잠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헥헥대는 남은 한 마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빨리 대답이 와야 할 텐데.
* * *
“무슨 일이지?”
나직한 목소리가 싸늘했다. 바리다스는 지금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아이들이 방치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했던 사용인들을 단체로 해고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피오라의 전속 시녀라는 이유로 해고당하지 않은 레나를 내려다보았다. 레나는 싸늘하게 빛나는 그의 붉은 눈에 살짝 움츠러들었다.
평소에도 몇 번 마주치긴 했었지만, 오늘따라 더 붉고 진하게 빛나는 눈은 아직 어린 레나가 마주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황녀님께서 부탁이 있으시…다고….”
그녀의 말에 바리다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풀렸다. 그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래, 무슨 일로?”
그의 눈이 한층 가라앉았다. 그 사실을 레나도 느낀 것인지 아까보다는 편하게 말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수의사를 불러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의사?
바리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가에서는 말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기르지 않는데, 말에게는 공작가에서 고용한 수의사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수의사를 불러 달라니, 숲에서 토끼라도 주워 온 건가. 아이들도 그러더니, 작은 것들을 좋아하나 보군.
바리다스는 본인 마음대로 피오라가 숲에서 토끼를 주워 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 수의사를 보내주지.”
그의 말에 레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집무실을 나갔다. 바리다스는 시종 한 명을 불러 최대한 빨리 수의사를 불러 달라 말한 뒤 피오라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피오라가 오기 전 들었던 소문에 대해 떠올렸다.
데이먼 제국의 황녀는 악행을 일삼고, 아랫사람에게 패악을 서슴없이 부리는 희대의 악녀라는 이야기였다. 소문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는 그이기에,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소문이 그렇게까지 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헛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많이 봐온 것은 아니지만 그가 지켜봐 온 그녀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또한 바리다스는 아직도 그녀가 한 첫 마디를 잊을 수 없었다.
아이들과 대화를 해도 되냐니. 곱게, 아니 귀하게 자란 황녀의 입에서 나올법한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만약 진짜로 나쁜 사람이었다면, 그런 질문을 할 필요도 없이 마음대로 했겠지.
하지만 그녀는 공작가에서 지원하는 돈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며 하루 종일 아이들을 돌봐 주고 있었다.
지금도 단순히 수의사 한 명을 부르는 일에 허락을 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간 봐왔던 귀족 영애들과 달라서일까. 아니면 자신을 대신해 아이들을 돌봐줘서 고마운 마음 때문에?
대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피오라에게 왜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 것인지 바리다스는 알 수 없었다.
피오라의 방으로 향하던 바리다스는 마침 나오던 레나와 마주쳤다.
“황녀가 여기 있나.”
그때 응접실 안에서 렌과 피오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오라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바리다스는 망설임 없이 응접실의 문을 두드렸다.
* * *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수의사가 온 건가?
나는 기대를 담고 방문을 바라봤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들어온 사람은 바리다스였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실망이 담긴 내 눈빛에 바리다스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지만, 나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내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을 한 바리다스는 담요에 돌돌 둘러싸여 있는 강아지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토끼일 줄 알았는데, 강아지였군.
숲을 정찰하던 기사들에게 숲속에 야생견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는 담요를 걷어 강아지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한 마리는 상처가 깊어 수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았지만 남은 한 마리는 금방 회복할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뻗어 강아지들의 상처를 훑었다. 그러자 그들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어떻게 한 거예요?”
“지난번에 그대에게 한 것과 같은 방법을 썼습니다.”
나는 며칠 전 위기에서 구해준 바리다스의 만능 손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의사만 불러 줘도 되는데, 직접 내려와 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감사해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의사도 금방 도착할 겁니다.”
그는 다시 강아지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바리다스는 강아지들을 관찰하듯이 훑어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을 크게 떴다.
“혹, 저 강아지들을 발견했을 때 근처에 다른 개는 없었습니까?”
지금 그걸 왜 묻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저 말은 원작에서 강아지를 발견한 아이들에게 바리다스가 했던 질문이었다. 그는 지금 어릴 적 키우던 시베리안 허스키, 엘리의 행방을 묻는 것이었다. 원작과 같이, 그는 눈치챈 것이었다. 저 아이들이 그가 키우던 강아지들의 새끼라는 것을.
내 기억상으로는 엘리는 두 마리의 강아지를 낳지 않았다. 다만 살아남은 것이 두 마리일 뿐. 다른 엘리의 새끼들과 그녀를 죽인 것은 공작가 숲에 서식하던 늑대였다.
아이들이 공작가 정원에서 발견된 것이라면 늑대가 덮친 지 얼마 안 지났다는 말이 아닐까?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엘리와 다른 강아지들이 살아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한편으론 그 늑대들이 렌과 자스민을 덮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원작에서 강아지들이 늑대들에게 습격받은 곳을 알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릴 수 있는 생명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숲에 있는 커다란 바위 쪽에서 개들이 짖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거짓말이었지만, 엘리와 남은 강아지들이 그곳에 있음이 분명했다. 다행히도 그 부분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 말에 바리다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위 근처를 수색해보고 오겠습니다.”
하지만 강아지들이 있는 곳은 숨겨진 곳이었다. 숲에 있는 커다란 바위 근처에 늑대의 서식지가 있기에, 작가는 그곳을 늑대바위라 칭했다.
바위 밑에는 위치를 아는 사람도 찾기 힘들 정도로 작은 땅굴이 있었는데 그곳에 아이들이 숨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나라면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리다스의 팔을 급히 붙잡았다.
“저도 가고 싶어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공작가의 숲은 위험했다. 저택 근처로는 오지 않았지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도 꽤나 위험한 야생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숲은 위험합니다.”
하지만 나는 포기 할 수 없었다. 나 말고 그 공간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괜찮아요. 그러니까, 데려가 주세요.”
결국 바리다스는 내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나와 함께 늑대 바위로 향했다. 숲까지는 거리가 꽤 있어 말을 타고 가야 했는데, 나는 말을 탈 줄 모르기에 그와 함께 말을 탔다. 말은 처음 타 보는 것이었지만, 생각보다 불편하지는 않았다.
나를 말에서 내려 주며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위험하니 혼자보단 함께 다니는 게 안전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칠드런과 다른 기사들도 이미 사방으로 흩어져 강아지들을 찾고 있었고 늑대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겁을 먹은 것인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섭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늑대들의 노랗게 빛나는 눈은 나의 생각보다 훨씬 더 위압적이었다. 나는 천천히 바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책에서 읽은 것처럼 큰 바위가 늑대 형상을 띄고 있었다.
이곳이 늑대 바위라고 불리는 곳이구나.
웅장한 자태에 나는 낮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늑대 바위가 만약 지구에 있었다면 꽤나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었을 것 같았다.
나는 늑대바위의 근처로 다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위의 주변에는 향이 강한 꽃들과 잡초가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그 덕에 강아지들이 후각이 강한 늑대에게서 무사할 수 있던 것이겠지.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말리는 것을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믿은 것인지 바리다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여기 근처일 텐데. 나는 늑대 바위의 꼬리로 보이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옅은 핏자국이 보였다. 그것을 따라가자 작은 땅굴이 있었다. 성인 남성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틈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바리다스도 소리를 들은 것인지 그의 눈이 커졌다.
땅굴 안을 들여다보자 커다란 허스키 한 마리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품 안에서는 무언가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강아지들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이었다.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빨리 엘리와 강아지들을 구조해서 치료해야만 했다. 내가 아이들의 상태를 보기 위해 구멍 속을 바라보는 순간 으르릉거리는 위협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하시죠.”
바리다스가 내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안으로 몸을 이미 들이민 뒤였다. 어두운 굴 안에 새끼강아지들을 품에 안고 있는 커다란 개가 보였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앞에 보이는 개가 엘리라는 것을. 야생에서 자랐다기엔 너무나도 기품있고 우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는 내게 적대심을 품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상처가 깊어.
엘리의 온몸에는 상처가 나 있었고 바닥에는 흐른 피가 흥건했다.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아직까지 살아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기적이라고 보일 정도로 말이다.
걱정이 앞서 긴장을 풀고 그들을 살펴보고 있던 그때, 순식간에 엘리가 내 쪽으로 뛰어올랐다.
그것은 명백한 공격이었다.
아무리 상처 입었다고 해도 엘리는 대형견이었고 수년을 야생에서 지낸 맹수였다. 나는 스스로의 안일함을 탓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