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작고 어린 생명체
그 순간 바리다스의 팔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를 대신해 엘리에게 물린 그의 표정이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졌다. 그때 바리다스를 알아본 것인지 엘리가 물고 있던 팔을 놓고 끼잉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엘리에게 물린 그의 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팔로 시선을 돌렸다. 바리다스가 두꺼운 옷을 입은 것도 아니기에 꽤나 상처가 깊을 것이었다.
“미안해요, 어떡해… 괜찮아요?”
고통 때문인지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옷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지혈하려는 것처럼 팔을 누르며 대답했다.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친 와중에도 그의 온 신경은 엘리에게 쏠려 있었다. 바리다스가 엘리 쪽으로 몸을 숙이자 엘리가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핥았다. 그대로 그의 팔에 얼굴을 대고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비비다가 그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바리다스는 그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랜만이야 엘리.”
엘리가 그의 품을 파고들자 바리다스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아지를 찾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바리다스의 상처와 그의 팔에 기대어 축 늘어져 있는 엘리를 한 번씩 돌아봤다.
수색을 도운 기사들은 꽤 오래전부터 공작가에서 일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들은 그 개가 어릴 적 바리다스가 키우던 개라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기사들은 엘리를 들것에 실었고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한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 자리를 떠나려다 잠시 잊었던 것이 생각나 발걸음을 다시 바위 쪽으로 옮겼다.
아직 땅굴 속에 강아지들이 있을 텐데. 새끼들이 살아 있을 수도 있었고 이미 죽었다고 하더라도 땅에 묻어 주고 싶었다. 강아지들을 찾기 위해 내가 바위 쪽으로 달려가자 치료를 하고 있는 바리다스 대신 칠드런이 나를 따라왔다.
땅굴 속을 바라보자 네 마리 강아지들이 축 늘어져 있었다. 강아지 중 한 마리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살아 있었다.
그 강아지를 끌어안은 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강아지들을 살펴봤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나는 속상한 마음을 뒤로한 채 네 마리 강아지를 모두 껴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내 옷에 흙과 피가 묻기 시작했으나 나는 딱히 개의치 않았다. 그런 내 모습에 한숨을 내쉰 칠드런이 겉옷을 벗어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죽은 강아지들을 내 품에서 뺏어갔다.
"제가 숲에 묻어 줄 테니, 그 강아지를 데리고 공작가에 먼저 가시죠."
망설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칠드런의 겉옷에 강아지를 품고 조심스럽게 안은 뒤 바리다스에게 달려갔다. 치료를 마친 바리다스는 엘리를 데리고 공작가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내 품에 안긴 칠드런의 겉옷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바리다스는 그 속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오자 눈을 크게 떴다.
"동굴에 살아 있는 강아지들이 있었던 겁니까."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강아지들은 이미 떠난 뒤여서, 칠드런이 숲에 묻어 준다고 했어요.”
바리다스의 양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처음으로, 그가 너무나 작아 보였다.
“그렇군요.”
그렇게 내가 데려온 마지막 강아지를 기사들이 데려간 뒤 나와 바리다스도 공작가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한동안 말이 없던 바리다스는 저택에 거의 도착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황녀님이 아니었다면 찾지 못했을 겁니다."
마냥 그의 말을 마음 편하게 들을 수 없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떠올렸다면 다 살릴 수 있었을 텐데.’라는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안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아니에요, 제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말했다면 다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내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곧이어 그의 손이 내 머리에 내려앉았다. 그는 위로받아야 할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그대가 늑대 바위에 아이들이 있는 걸 말해주지 않았다면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아주,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덕분에 엘리를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 그런 생각 하지 마시죠."
그는 알고 있었다. 엘리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이들을 닮은 그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너무나도 슬퍼 보여 나도 모르게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를 위로하면서도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며 고민하던 순간 바리다스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행동에 난 그 자리에서 경직되고 말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로해주는 겁니까?”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하는 바라다스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민망해진 나는 얼굴을 최대한 식히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그런…거죠…?”
내 대답에 그는 살짝 웃었다. 슬픔이 묻어 나오는 그런 미소였다.
“고마워요.”
그의 미소에 나는 새삼 느꼈다. 남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이구나.
순간 홀릴 뻔했다. 다시 그와 멀찍이 떨어진 나는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마차 창문을 열었다. 이윽고 마차가 멈췄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자 동시에 도착한 엘리가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들것에 실려 오고 있었다. 엘리는 바로 공작가에서 가장 큰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바리다스는 아무 말 없이 엘리의 곁을 함께했다. 나도 그의 뒤를 쫓았다. 그가 너무나 불안정해 보여, 혼자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뜬 엘리는 바리다스를 보자 끼잉거리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와 그의 무릎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그가 무릎을 굽히자 엘리가 반가운 듯 꼬리를 살랑거리며 얼굴을 핥아주었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한 채 금세 지친 엘리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눈을 감았다. 그때 한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수의사 레키드라고 합니다.”
그는 내게 인사한 뒤 나에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바구니를 열자 치료를 마친 강아지 세 마리가 그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회복하는 데는 모두 시간이 걸릴 테지만, 큰 상처도 없고 생명에 지장도 없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내가 바구니를 받아 든 그때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엘리는… 어떻지…?”
그의 말에 레키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엘리님은…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였습니다. 새끼들을 낳은 것이 기적일 정도로 많이 늙고 노쇠하셔서… 아마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군.”
바리다스의 대답은 덤덤했지만 그의 표정은 어딘가 매우 슬퍼 보였다. 그는 무릎을 굽혀 엘리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엘리님을 치료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나, 레키드. 노력해줘서 고맙네.”
바리다스와 내게 인사를 한 뒤 레키드는 방 밖으로 나갔고 바리다스는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는 답지 않게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혹시 강아지 한 마리를 제가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가능하죠. 오히려 제가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내 말에 바리다스의 얼굴에 다시 한번 씁쓸한 표정이 감돌았다.
“저는 엘리에게 해준 것도 없는 주인입니다,”
“그렇다면 엘리가 기억하지 않았겠죠.”
내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방문을 열어주었다.
“밤이 늦었으니, 먼저 돌아가서 잠자리에 드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축객령이라기보단, 나를 걱정해서 보내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이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혼자 두고 가기에는 마음이 불편했다.
엘리를 보내줘야 할 그가 너무 불안정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나마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스스로의 행동에 놀란 것도 잠시, 바리다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같이 있을게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잡은 손을 놓지 않을 뿐이었다.
바리다스는 뒤를 돌아 다시 엘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때문에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뒷모습이 너무 슬퍼 보여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옆을 지켰다.
그때 치료를 마친 마지막 강아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강아지는 엘리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그녀를 핥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바구니 안에서 강아지를 꺼내 엘리의 옆에 놓아 주었다. 그러자 엘리는 강아지들을 자신의 쪽으로 데려와 천천히 핥아주기 시작했다.
바리다스와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런 엘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바리다스가 내게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앉으시죠.”
“고마워요.”
꽤나 오랜 시간 돌아다녀서 다리가 아팠기에 나는 그의 배려를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그런 나에 비해 바리다스는 힘든 내색조차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엘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한 번씩 무릎을 굽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오늘 하루 꽤나 바쁘게 돌아다니던 나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그때 누군가 나를 들어 올리는 느낌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니 바리다스가 내 다리와 목을 받친 채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당황한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잠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미안해요, 깨우지 않으려 했는데.”
내가 잠에서 깬 것을 확인한 그가 나를 다시 의자에 내려 주었고 먼저 같이 있어 주겠다고 말해 놓고선 잠들었다는 사실이 민망해져 얼굴을 붉혔다.
“아니, 괜찮아요. 잠들어 버렸네요. 미안해요.”
“미안할 게, 뭐가 있습니까.”
내게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다시 엘리에게로 향했다.
나도 시선을 돌려 엘리를 바라보았는데, 아까보다 상태가 심해진 것인지 엘리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죽을 만큼 아픈 고통 속에서도 계속해서 잠든 강아지들을 핥고 품어주던 그때, 엘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엘리의 시선이 바리다스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들고 제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바리다스가 눈높이를 맞춰 쓰다듬기 시작했고, 엘리는 마지막으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도 직감한 것인지 엘리의 목을 끌어안은 바리다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잘 자렴, 엘리.”
바리다스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멍….”
마치 엘리가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리는 눈을 감았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어느덧 서서히 해가 뜨기 시작했다. 방 안으로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엘리의 표정은 누구보다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림슨과 시종들이 방 안으로 들어와 엘리를 흰 천으로 감쌌다.
엘리를 묻어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엘리는 어제 묻힌 강아지들 옆에 묻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곳은 저택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나도 바리다스를 따라가 그의 곁을 지켰다.
강아지들은 숲에서 가장 큰 벚꽃 나무 밑에 묻혀있었고 엘리도 그들의 곁에 묻혔다. 그들의 무덤 위로 벚꽃 잎이 하나둘 떨어졌다.
나는 엘리의 무덤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꼭 너의 아이들을 예쁘게 키워 줄게.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내 옆에서 차분히 내려앉은 눈으로 엘리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는 바리다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좋은 곳으로 갈 거예요.”
그제야 바리다스는 날 바라봤다. 늘 차가워 보였던 그의 붉은 눈동자가 오늘따라 공허해 보였다.
그는 내 말에 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 그러길 바라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