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헤리피아 봄 축제
날씨가 매우 맑은 날이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가끔씩 부는 바람은 선선해서 절로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다.
그랬기에, 나는 아이들과 함께 정원에서 피크닉을 즐기기로 했다.
우리는 공작가에서 가장 큰 나무 밑에 앉아서 수다를 떨거나 책을 읽었다. 나는 잠든 자스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자스민이 두 눈을 비비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황녀님, 나 배거파….”
그녀의 말에 나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얘들아 밥 먹자!”
다들 배가 고팠던 것인지 노는 것을 멈추고 순식간에 달려왔다.
아이들이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후 도시락이 들어있는 바구니를 가져왔다. 영화에서 나오는 소풍 바구니 하면 딱, 떠오르는 그런 모양의 바구니였다.
도시락 하면 역시 김밥이지만 이곳에는 김밥을 만들 만한 식재료가 없어 아쉽게도 샌드위치밖에 만들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알려 준 레시피로 피터가 만들어준 샌드위치를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입에 맞으면 좋겠는데.
혹시나 아이들의 입맛에 맞지 않을까 봐 조금 불안했다.
“잘 먹겠습니다!”
입을 모아 소리친 아이들은 샌드위치를 하나씩 받아 들고 먹기 시작했다.
그때 샌드위치를 한입 가득 베어 문 레몬의 눈이 커졌다.
“맛있어.”
그녀의 말에 아이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빵의 겉면은 계란과 함께 코팅된 설탕이 바삭하게 부서졌고 햄과 딸기잼, 치즈가 부드럽게 어우러졌다.
내가 만든 것은 가장 유명한 샌드위치 중 하나인, 몬테크리스토 샌드위치였다. 설탕은, 단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한 보너스.
아이들은 맛있는지 샌드위치를 순식간에 먹어 치웠고 그 모습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팔아도 될 거 같아요.”
진심이 담긴 토마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네.”
다음에는 유부나 김을 구해 김밥을 만들어줘야겠다.
샌드위치가 아무리 맛있어도 소풍에는 김밥이 최고니까 말이다.
나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그때, 로나가 다가왔다.
“공작님이 보내오신 편지입니다.”
“편지? 고마워 로나.”
말로 하지, 굳이 왜 편지를 썼대.
그러고 보니, 근래 바리다스는 여러 가지 업무로 꽤나 바쁜 것 같았다. 저택에서 그를 못 본 지 벌써, 일주일이 넘어갔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나는 걱정스러움을 안고 편지를 펼쳤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간 일이 너무 바빠, 저택에 자주 머물지 못했네요.
…그래서 오히려 좋았는데?
다행히 다른 큰일로 보낸 편지는 아닌 듯했다. 긴장이 풀린 나는 다음 문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밑으로는 안부를 묻는 등, 쓸데없는 귀족적인 문장들이었다.
그냥 약혼녀에게 예의상 편지를 쓴 건가.
흥미가 떨어진 나는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며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 시내에서 봄 축제가 열립니다. 관광 명소로도 유명한 곳이니 한 번 가보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함께 가시겠습니까?
누가 남주 아니랄까 봐. 모쏠 티가 나네.
그냥 같이 가실래요? 하면 되는 거지. 뭘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어.
뭐, 그래도 친절한 것이 그다운 편지였다.
아이들도 좋아할 것 같고, 다 같이 가도 되는 거겠지.
그때 편지의 마지막 줄이 눈에 들어왔다.
가능하면 아이들은 데려오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 왜! 대체 왜 데려오지 말라는 거야. 동생들과 좀 친해진 거 아니었어?
아이들과 함께 가지 못하는 것이라면 굳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날 생각해서 같이 가자고 한 건데. 거절하기에도 미안했다.
나는 편지를 덮으며 결정을 내렸다.
…그래, 시내도 다시 가보고 싶었으니 한 번쯤은 들어주지 뭐.
“공작님께 알았다고 전해 줘.”
시내에서 돌아다니고 있으면 알아서 찾아오겠지 뭐.
그와 만날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몬과 그린이 다가왔다.
“황녀님 어디 가요?”
“갈 거예요?”
그냥 가지 말까?
내가 가는 것이 아쉬운 듯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이미 간다고 해 버렸는걸.
“시내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내 말에 눈을 반짝인 레몬은 소리쳤다.
“오실 때, 초콜릿 사다 주세요!”
너, 방금까지 아쉬워하지 않았니?
무언가 초콜릿에 밀린 기분이 들긴 했지만 붙잡지 않아서 다행인가.
내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레몬은 환하게 웃으며 렌에게 달려갔다. 그때, 레몬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그린이 입을 열었다.
“봄 축제, 형님이랑 가시는 거죠?”
정곡을 찔린 나는 그린을 바라보았다.
내 표정에 티가 난 것인지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동생들에게는 비밀로 할 테니,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런 거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해명할 틈도 없이 그린은 이미 아이들에게 달려간 뒤였다.
먼발치의 있는 그린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 * *
저택으로 들어가자 내가 시내로 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것인지 칠드런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꽤 걸릴 텐데, 그는 그것도 모르고 뛰어온 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언가 어린아이를 갈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미안해졌다.
나는 먹으면서 기다리라는 의미로 바구니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준비를 마친 뒤 밖으로 나가자, 칠드런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의 입 주변에는 설탕 가루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맛있게 먹었나 보네.
나는 남은 샌드위치를 가져와 바구니 채로 그에게 주었다.
“더 먹을래?”
내 말에 칠드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바구니를 받아들더니 허리를 굽혀 내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딱히 여러 명이 몰려다니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기에 나는 로나와 레나도 제외하고 호위를 맡아 줄 칠드런만 동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축제 날이라 그런지 예전보다 활기찬 분위기였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레몬이 부탁한 초콜릿을 산 뒤 바리다스가 올 때까지 사람들과 시내를 구경할 생각으로 가장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2층에 작은 테라스도 있었고 레몬이 부탁한 초콜릿도 살 수 있었기에 더 움직이지 않고 편하게 시내를 구경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여러 가지 케이크와 유리병에 담긴 초콜릿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겹겹이 쌓인 크레이프 케이크와 가장 큰 초콜릿 병을 골랐다.
초콜릿을 마차에 실은 뒤, 나는 테라스에 앉아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칠드런은 지루해 보였지만, 빙의한 나에게 이곳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은 꽤나 재밌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자 아직 6시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약속 시간이 되면 아마 바리다스가 알아서 날 찾아올 것이었다. 일부러 그가 찾기 쉬운 발코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무슨 축제였더라. 바리다스는 내게 봄 축제라고 말했었는데, 그렇다면 꽃 축제이려나.
시내를 둘러보자 수많은 종류의 꽃들이 곳곳에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벚꽃이 가장 눈에 띄었다.
역시, 봄 하면 벚꽃이었다.
그러고 보니 봄에 열리는 축제라면 원작에서 읽은 것 같기는 한데… 설마, 그 축제는 아니겠지.
원작에서 바리다스가 레리아에게 고백하는 곳이 바로 봄에 열린 축제였다.
벚꽃이 가득 핀 나무 아래에서 고백하는 그 장면은 꽤나 설렜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벚꽃 잎이 떨어지고 있는 나무를 바라봤다.
그때 바리다스가 뭐라고 고백했더라.
“피오라.”
그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지.
“잘 지냈어요?”
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내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바리다스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바리다스?”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이름을 부른 내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내가 이름을 부른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지 혼자 있는 나를 뚫어져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의 자유이긴 하지만 시녀 한 명쯤은 동행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제가 시녀를 둘 정도 붙여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입니다. 혹시 다른 시녀가 더 필요하다면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시녀라니, 이미 두 명도 많았다.
그리고 내가 여러 명이 같이 다니는 것이 불편해서 안 데려온 것이었다. 여기서 시녀가 더 는다니 상상만 해도 귀찮아진 나는 소리쳤다.
“아뇨! 괜찮아요!”
갑자기 크게 소리쳐 그가 조금 놀란 것인지 커진 눈으로 날 바라봤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내 앞자리에 착석했다. 그의 행동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뭐야 바로 가는 거 아니었어?
그는 언제 시킨 것인지 내게 초코로 코팅된 마들렌을 내민 뒤 내가 그것을 받아들자 입을 열었다.
“이름은… 뭐,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피오라.”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확실히 잘 생기긴 했다.
가끔 전생에서 연예인들에게 일상이 화보라는 말을 하고는 했는데, 그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는 존재 자체에 필터가 껴 있는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근데 전에도 피오라라고 하지 않았나. 왜 갑자기 저렇게 물어봐?
바리다스를 바라보자 나를 계속 응시하고 있던 것인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나는 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잘생겼으니까 봐준다.
그의 미소에 붉어지는 얼굴을 가라앉히며 마들렌을 오물거렸다.
얼굴로 사람 꼬시는 거 아니랬어요, 남주님.
그가 준 마들렌을 내가 다 먹자 그는 만족한 듯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죠, 피오라.”
아니, 그놈의 이름 좀 그만 부르면 안 될까요.
그 얼굴로 이름 부르면 유죄라고, 이 사람아.
그가 에스코트를 하기 위해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그는 상점 밖으로 나가려고 했고 아직 계산하지 못한 나는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계산을 해야 하는데.”
“방금 다 했어요.”
네가 왜 내 걸 계산해?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찬 내가 바리다스를 바라봤다.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챈 것인지 바리다스는 말했다.
“어차피 이제 내 돈이 그대 돈이고 그대 돈이 내 돈일 텐데 사양할 필요 없습니다.”
이혼하게 되면 내 돈은 내 돈일 거고 네 돈은 네 돈일 텐데. 사양하면 안 될까요?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돌려주긴 해야지.
이 카페는 귀족들만 이용하는 가게였고 그랬기에 내가 주문한 것들은 모두 비싼 것들이었다.
학부형님에게 이런 거 받으면 부담스럽다고.
“아니, 공작님 그래도…….”
하지만 나는 끝까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저지당했다.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겠군요.”
이미 그의 이름을 부른 뒤였고,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말했을 때, 거절할 타이밍도 놓쳤기 때문에 딱히 거절할 명분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호한 그의 표정에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열었다.
“…바리다스.”
내가 이름으로 부르자 그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
이런 게 주인공이다. 라고 말하는 듯한 빛이 나는 미소였다.
“왜 그러십니까?”
그의 미소에 아주 잠깐 홀릴 뻔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 공격에도 이제 좀 내성이 생긴 것인지, 곧바로 정신을 차린 나는 입을 열었다.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사양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라고 말하며 웃는 바리다스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니 제발 웃지 좀 말아 봐요. 그거 너무 해로우니까.
자꾸 그런 식으로 유혹하면, 난 원작의 피오라가 될 수밖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