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헤리피아 봄 축제
바리다스를 따라 디저트 가게 밖으로 나가자 크루이드와 몇몇 기사들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경례를 한 뒤 마차를 끌고 왔다.
칠드런과 내가 타고 온 마차가 없는 것으로 보아, 먼저 공작가로 돌려보낸 것 같았다.
그와 함께 마차에 탄 나는 어색함을 외면하기 위해 시선을 창에 고정했다.
그런 내 눈에 노을이 지기 시작해 은은하게 비추는 햇빛과 축제를 위해 한껏 꾸민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 속 같은, 아름다운 모습에 나는 낮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바리다스가 만족스럽게 웃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다.
내가 창밖을 구경하던 그때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 문이 열렸고 먼저 내린 바리다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자 화려하게 꾸며진 동상과 분수 그리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장면이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그의 질문에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네? 네!”
내 대답에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영화배우가 여기 있었네.
남주야, 네 얼굴이 영화고 명화고, 전설이다.
어찌 보면 나를 비웃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가 지은 웃음은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이게, 다 잘생겨서 그런 건가.
그때 바리다스가 내 손을 잡은 채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의 말 대로 유명한 축제인 것인지 볼 것이 매우 많았다.
꽃으로 장식된 조각상, 또 꽃으로 꾸며진 분수대, 그리고 화려하게 깔린 꽃길까지.
진짜, 꽃 축제네. 저것도 꽃이고 말이야.
나는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하나의 표지판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떴다.
그 표지판에 헤리피아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그와 함께 축제에 오는 게 아니었다. 이 축제는 원작에서 바리다스가 레리아에게 고백한 축제였으니 말이다.
헤리피아 봄 축제, 또는 헤리피아 꽃 축제라고 불리는 이 축제에는 하나의 전설이 있었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헤어진 두 남녀를 위해 꽃의 여신인 헤리피아가 꽃으로 다리를 만들어주었다는 전설이었다.
그녀가 만든 다리를 건너 두 사람은 만났고, 그 뒤로 사람들은 그녀에게 감사하기 위해 매년 이 축제를 연다고 했다.
비슷한 이야기로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의 견우와 직녀 이야기가 적절할 것이다. 다만 조금 차이가 있다면 견우와 직녀에게는 새들이 다리를, 이곳은 꽃이 다리를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축제에서 중심이 되는 곳이 바리다스가 날 데려온 이 광장이었다.
뒤늦게 내가 눈치챈 하나는. 한 가족을 제외하고 모두가 커플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니, 가족이니까 부부고 그러니까 커플이네, 그러네. 근데 왜 이런 축제를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하냐고.
거기다 이 축제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남주와 여주의 소중한 추억이 되어야 할 축제인데 내가 빼앗은 것 같잖아. 나중에 바리다스와 레리아가 같이 왔을 때, 레리아가 바리다스에게 ‘너 여기 누구랑 와 봤어?’라고 물어보면 ‘전 약혼녀랑!’ 이렇게 대답할 거냐고.
나는 그냥 표면적인 공작부인 역할만 하면서 지내고 싶은데, 왜 연적으로 만들어.
여주님, 오해 마세요. 저는 남주 얼굴 말고 관심 없습니다.
머릿속으로 레리아에게 물 싸대기까지 맞은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는 바리다스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그때 우연의 일치인 것인지, 그와 눈이 마주쳤고 머쓱해진 나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는 같이 미소를 지었고 그 모습에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얼굴 진짜 위험하네.
물론 이 말은 내 입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남주님, 우리 친구 하죠. 친구. 난 공작가에서 나갈 생각이 없으니까, 사이좋게 지내자고요.
그때 한 둘씩 주위에서 커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주위에는 한 쌍의 커플을 제외하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 때문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야시장이 열린 모양이네요.”
야시장이라니, 내가 생각하는 그 야시장?
내 머릿속에 버터 감자와 닭꼬치, 그리고 타코야끼가 떠올랐다. 음식들을 생각하니, 배가 고파 왔다.
그 생각이 또 티가 난 것인지, 나를 바라보던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공작가에서 나오는 요리들은 매우 훌륭했지만, 그래도 나는 오랜만에 길거리 음식을 먹고 싶었다.
msg와 조미료가 가득 든 그런 건강하지 않은 음식들 말이다.
“네! 어서 가죠!”
오랜만에 길거리 음식을 먹을 생각에 신이 난 나는 소리쳤고 그런 내 모습에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바리다스가 마차를 불러 야시장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그의 명을 받은 마부 페터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의 귀족 영애들은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야시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페터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아하, 그것 때문인가?
페터가 떠올린 그것은 바로 꽃의 여신인 헤리피아를 뽑는 미인 대회였다.
헤리피아를 뽑는 미인 대회는 수준이 생각보다 높아 귀족들 사이에서도 꽤나 유명했고 나름 인정받는 대회였다.
작년에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가장 뛰어난 미녀들 중 한 명의 영애가 헤리피아로 선정되기도 했고 말이다.
피오라의 외모를 떠올린 페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님 정도면 헤리피아가 되시고도 남지.
하지만 그런 이벤트에 공작님이 참여하게 두지도 않을 텐데. 정말 야시장을 구경하려고 가시는 건가.
의문만 가득해진 페터는 잡생각을 떨쳐내고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택의 새로운 안주인이 될 분은 역시 특이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 * *
마차는 야시장의 구석 자리에 멈춰 섰다. 아무 생각 없이 마차 문을 열고 내리려는 나를 바리다스가 붙잡았다.
내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자 바리다스는 내게 망토를 둘러 주었다.
“너무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서 위험합니다.”
하지만 이게 피오라의 드레스 중에서는 가장 수수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드레스는 하나같이 번쩍였으니 말이다.
피오라의 드레스 하나를 사려면 영지 하나는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녀의 옷장을 본다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망토를 만지작거렸다. 이 망토도 좋은 것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부드럽고 보들보들했다. 그랬기에 망토가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왜 위험하다고 하는 거지? 바리다스랑 같이 갈 건데.
원작을 읽은 나는 그가 얼마나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일반 귀족들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는 황실 기사단장과 호각일 정도로 뛰어난 검술을 자랑했으니 말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귀족들도 주위에 무장한 호위들과 함께 화려하게 차려입고 당당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위험…한가…?
쟤들 한 트럭이 달려들어도 바리다스가 이길 텐데.
“공, 아니 바리다스도 같이 갈 거 아닌가요? 근데 왜 위험해요?”
내 말에 바리다스가 갑자기 망토에 달린 모자로 내 얼굴에 덮어 버렸다. 내 몸보다 훨씬 큰 망토가 내 시야를 가려 어두웠다.
“…….”
바리다스가 무언가 말을 했지만 얼굴을 가린 망토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망토를 들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뭐라고요?”
바리다스는 옆으로 돈 상태였고, 심지어 망토까지 쓰고 있어 그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린 그때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눈에 띄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그렇긴 하겠다. 나는 망토로도 완벽하게 숨겨지지 않는 나의 흰 머리를 보며 생각했다.
이런 색이면 어디서든 눈에 띌 테니 말이다.
옆에 뛰어난 보디가드가 있긴 하지만 사건을 일부러 만들고 다닐 필요는 없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잠시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한 손에 들고 위쪽으로 올렸다.
일명 똥머리.
나는 망토를 고정해주는 세 개의 끈 중 하나를 뺀 뒤 긴 머리를 묶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망토를 쓰자 이제는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묶는 게 편하다니까. 결혼하지 않은 영애들은 거의 목을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뭐. 할 거니까!
아까보다 한결 편해진 내가 바리다스를 보며 말했다.
“준비됐어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와 함께, 야시장이 열린 공터로 다가가자 여러 가지 음악 소리와 화려한 불빛 그리고 주위에서 향기로운 꽃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아까는 조금 차분한, 커플들을 위한 데이트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한층 더 소란스러워진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주위를 둘러보는 귀족들과 먹고 마시는 평민들이 한 데 어우러져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상상 속 과거 서양 축제의 모습을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그때 꽃향기들 사이로 익숙한, 아니 맛있는 향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익숙하고도 그리운 냄새 바로 닭꼬치 향이었다.
닭꼬치 가게는 멀지 않은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여러 가지 꼬치가 맛있는 냄새를 내며 앞에 진열되어 있었다.
“저거 먹을래요!”
내가 소리치자 바리다스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게 허락을 받은 나는 닭꼬치 가게로 다가갔다.
그런 내가 손님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닭꼬치 사장은 호탕하게 소리치며 진열대를 열어 보였다.
“어서 옵쇼! 예쁜 아가씨 뭘 드릴까?”
그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데 예쁜 아가씨라니, 이 아저씨 돈 벌 줄 아시네.
그의 입담에 미소를 지으며 표지판을 살피던 나는 데리야끼 소스를 묻힌 닭꼬치를 선택했다.
고른 메뉴를 한 입 베어 물자 달달하고 부드러운 고기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맛있어.
오랜만에 먹어보는 조미료의 맛이었다.
행복하게 닭꼬치를 뜯는 내 모습을 바리다스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것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닭꼬치에 이어 버터 감자를 먹고 있을 때였다.
한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고 그쪽으로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미인 대회가 시작했나 보군요.”
오, 그곳에서 뭔 일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한데,
원작에서 나온 미인 대회가 꽤나 재미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던 나는 소리쳤다.
“구경하러 가요!”
생각보다 즐거운 축제 때문인지, 아까의 귀찮다는 생각은 이미 날아가 버린 뒤였다.
이렇게 된 거, 즐기다가 가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