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27)화 (27/207)

26. 헤리피아 봄 축제

미인 대회는 그 명성만큼이나 관중이 많았다. 

우리는 귀족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로 안내받았는데 이번 미인 대회를 한 귀족이 후원해줬기 때문에 마련된 자리라고 했다.

자리에 앉아 미인 대회 시작을 기다리며 주변 구경하던 중 익숙한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노란빛이 나는 영롱한 탄산음료, 그것의 정체는 내 예상대로 맥주였다.

나는 군침을 삼켰다. 오랜만에 보는 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온 후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과 보냈기 때문에 맥주는커녕 귀족들이 그렇게 많이 마신다는 와인도 한잔 먹지 못했다.

내 시선이 맥주로 향해 있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꽤나 뚫어져라 보고 있었기에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긴 했다.

“드시고 싶으신 겁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네!”

그러자 바리다스가 조금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맥주는 평민들이 주로 즐기는 크레센트의 전통 술이었다. 

좋아하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맥주를 거의 마시지 않았다. 특히 원작에서의 피오라라면 맥주 같은 건 입에도 대지 않았을 터였다.

나는 아차 싶어 말을 덧붙였다.

“궁, 궁금해서요. 무슨 맛인지….”

내 말에 바리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근처에서 대기하던 기사에게 맥주를 사오라고 지시했다.

“또 드시고 싶으신 게 있습니까?”

고민할 게 뭐가 있나 역시 맥주에는 튀김이었다. 

이 세계에 치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치킨으로 부탁할게요.”

내 말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의 눈이 커졌다.

그 음식을 어떻게.

치킨이라는 음식은 몇 달 전부터 평민들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길거리 음식 중 하나였다.

맛이 얼마나 좋은지, 평민들의 음식들 싫어하는 귀족들도 치킨을 맛본 뒤 인정할 정도였다.

자신도 치킨의 맛에 얼마나 놀랐는지, 처음 치킨을 먹었을 때의 그 충격을 잊을 수 없었다.

군침을 삼킨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누구보다 빨리 경례한 그는 치킨을 사기 위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황녀님의 마음에 든다면 데이먼에도 치킨이 퍼지지 않을까.

라는, 치킨교의 전파를 위한 마음이었다.

기사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인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첫 번째로 나온 사람은 갈색 머리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꽤나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이 대회는 주로 두 가지를 평가했다.

첫 번째는 미인 대회인 만큼 당연히 외모, 두 번째로는 장기.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특출난 무언가를 뽐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이 대회가 수준이 높다고 평가받는 이유였다.

평민뿐만 아니라, 영애들도 참가하는 데다가 귀족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여러 교양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때 두 번째 참가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 참가자보다 예쁘진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낮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뒤로도 비슷비슷한 참가자들이 지나가고 한 여자가 무대에 올랐다. 

대부분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췄고 단 한 명의 참가자만이 플루트를 연주했다.

점차 흥미가 떨어진 내가 딴짓을 하며 치킨이 언제 오나 오매불망 기다리던 중 관중석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들려왔다.

무대를 올려다보자, 아름다운 미녀가 보였다.

붉은 머리 그리고 붉은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마치 장미의 화신 같았다. 다른 참가자들처럼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지도 않았지만 등장만으로 이미 모두가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근데 어딘지 낯이 좀 익었다. 무대 위의 미녀를 바라보던 내 머릿속으로 한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마리 로즈? 뭐야, 쟤가 왜 여기 있어.

피오라는 아이들을 괴롭힌 메인 빌런 중 하나지만, 남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에서 남주를 좋아해 여주와 남주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는 악역은 어찌 보면 필수 요소였다.

그리고 지금, 그 역할을 맡은 악역 마리 로즈가 지금 무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마리도 칠드런에게 목이 잘리는 엔딩이기에, 나는 아주 잠시 그녀에게 측은함과 동질감을 느꼈다.

우리 같은 방식으로 죽는데, 친구라도 할래요?

그 순간 마리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나와 바리다스를 번갈아 보더니,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에 관중석은 불타오르기 시작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저기 악녀 언니, 나 찍힌 건가요? 우리 같은 악녀끼리 어떻게, 편하게 지낼 생각은 없는 건가요?

너 어떻게든 바리다스 가지려고 할 거지? 그리고 바리다스의 약혼자인 나만 없으면-이라고 생각할 거잖아.

벌써 골치가 아팠다. 나는 피로감을 느끼며 바리다스를 올려다봤다.

그니까, 이 사람아 적당히 잘생겨야지. 

하긴. 너도 피곤하겠네. 주위에 악녀들만 득실거려서.

어찌 보면 바리다스가, 자신의 배경과 외모를 보지 않고 그를 사랑해준 레리아에게 끌린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마리가 이 대회에 참가한 거지? 그냥 심심해서 참가한 건가. 원작과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기억을 되짚어 어떻게든 소설 내용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들 부분만 꼼꼼하게 읽고 로맨스 부분을 대충대충 넘긴 탓이었다.

그 뒤로 마리가 무대에서 내려가고 푸른빛이 은은하게 도는 남색 머리를 한 여자가 무대 위로 올라갔다. 

푸른빛이 도는 남색 머리와 흰 회색빛 눈동자는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고 흰 드레스는 그녀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흰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그녀는 마치, 요정 같았다.

그때 그녀의 남색 머리가 빛을 받자 푸른색으로 반짝이기 시작했고 뒤늦게 나는 그녀의 정체를 떠올렸다.

저 여자, 레리아잖아.

여주가 여기서 왜 나와?

레리아는 집이 조금 잘 사는 평민이었는데 간단하게 말해서 졸부였다.

하지만 그녀의 집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하게 되고. 그녀의 책임감 없는 아버지는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레리아를 쫓아낸다.

그렇게 그녀가 공작가 시녀로 들어와 바리다스와 만나게 되는 것이 초반부 내용이었다.

그래도 처음에 나오는 부분들은 거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대회에 레리아가 참가할 줄은 몰랐네.

이 정도면 이 축제가 만남의 광장 아닐까.

소설의 여주와 남주와, 가장 비중이 높은 악역 둘이 동시에!

눈을 돌려 바리다스의 표정을 살펴보자 그는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 아직은 반하지 않은 건가.

그때 무대 위에서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로즈의 화려한 외모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승을 로즈라 단정 짓고 다음 무대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레리아는 단 한 번의 선율로 모든 관중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레리아의 연주 소리는 아름다웠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아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무대, 아니 대회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고.

그녀의 모습에 나는 매우 감탄했다.

미쳤다. 저게 여주인가.

그녀의 연주가 끝나고 나는 바리다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분 예쁘지 않아요?”

“예쁘군요.”

뭐야 왜 이리 건조해. 약간 그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눈빛으로 봐야 할 거 아니냐고.

예상보다 너무 담백한 그의 태도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아까 전 음식을 사러 간 기사가 맥주와 치킨을 가지고 들어왔기에 나는 더 이상 그녀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얼마 만에 치느님 영접이란 말인가! 웅장해진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치킨과 맥주가 앞에 준비된 테이블에 세팅되었고 그 모습을 본 나는 속으로 외쳤다.

미쳤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치맥이야.

치킨은 포크를 주로 사용하는 귀족들을 배려한 것인지 순살이었다.

나는 순살과 뼈 모두를 좋아하긴 하지만, 확실히 이런 상황이라면 순살이 먹기 편하긴 했다.

화려하게 세공이 된 포크로 치킨을 찍자. 바삭, 소리를 내며 튀김 옷이 부서졌다.

나는 바로 치킨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완전 맛있어.

치킨 한 조각을 모두 해치운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크.”

본능적으로 낸 소리에 나는 바리다스의 눈치를 봤다.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가 너무 맛있어서 참을 수 없었다.

내 예상대로 이상했던 것인지 바리다스는 나를 신기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짠?”

민망해진 나는 남은 맥주잔을 들어 바리다스에게 내밀었다.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잔을 맞대어 주었다.

쨍!

작지만 청량한 소리가 퍼졌고 나는 컵에 남은 맥주를 모두 비웠다.

그렇게 맥주를 세 잔 쯤 마셨을 때,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평소보다 너무 빨리 취기가 올랐다, 평소 내 주량으로는 소주 3병은 거뜬했는데 말이다.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생활 5년 차인 내가 주량도 조절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스스로를 너무 믿은 탓이었을까, 겨우 맥주 네 잔에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제야 나는 떠올렸다.

이거, 내 몸 아니었지.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난 이미 취한 뒤였다.

* * *

“쨘!”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할지.

바리다스는 맥주 네 잔에 잔뜩 취한 채 잔을 건네는 약혼녀를 바라봤다.

그 순간, 피오라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한껏 굳은 표정으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야, 짠.”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명백한 살기였다. 바리다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에게, 그것도 약혼녀에게 살기를 느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빈 잔에 맥주를 따른 뒤, 잔을 들었다. 또다시 청량한 소리를 내며 잔이 부딪쳤다. 그러자 만족을 한 것인지, 피오라는 환하게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굳.”

그리고는 또, 처음 듣는 용어를 사용하며 맥주를 원샷 하더니 그대로 고른 숨소리를 내뱉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야, 라고.”

바리다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약혼녀는 그보다 두 살은 어렸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 그에게 야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부른 사람은 처음이었다. 살기를 뿌리고 살아남은 사람도 그녀가 처음이었고 말이다.

피식, 미소를 지은 그는 피오라를 안아 들었다.

* * *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마차 안이었다. 나는 내 앞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바리다스를 바라보다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잠들기까지의 과정이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순간 바리다스와 내 눈이 마주쳤고 깜짝 놀란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잘 주무셨습니까?” 

바리다스의 태도는 평소와 같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잠들었을 때의 기억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무슨 실수라도 했으면 어떡해.

민망함과 걱정으로 내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혹시 저 뭐 실수했나요…?”

내 질문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아뇨.”

그의 대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혹시라도 실수를 했을까, 걱정했는데. 개는 아니었구나 내가.

그때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고, 그런 행동에 조금이나마 익숙해진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우리는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계단을 오르고 각자의 방이 있는 복도에 멈춰 섰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바리다스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내 말에 바리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안으로 들어선 나는 돌아서서 천천히 문을 닫았다. 서서히 좁아지는 문틈으로 여전히 나를 보고 있는 바리다스가 보였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나는 문에 이마를 기대고 섰다. 바리다스가 방으로 들어가는 발소리는 그로부터 한참 뒤에 들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