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첫 번째 약혼식
축제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격적으로 나와 바리다스의 약혼식 준비가 시작되었다.
공작가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바빠 보였다. 바리다스는 물론, 로나와 레나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아이들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이틀 전부터 내 방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우연히 마주친 렌에게 전해 듣기로는, 토마는 검술을 연마하고 있으며, 자신은 연주를 배우고 있고 동생들은 공부를 하느라 바쁘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기에 나는 그들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현재 공작가에서는 모두가 바빴다.
나만 빼고 말이다.
이 넓은 공작가에서 나만 한가했다.
죄책감이 든 내가 무슨 일이라도 돕겠다고 하자, 크림슨은 내게 말했다. 왜 자기 약혼식을 준비하려 하냐고.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내게 달려와 얼굴을 핥는 리리와 라라를 쓰다듬었다.
너희 말고 날 놀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모두가 바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왜인지 오늘따라 더 외로운 것 같았다.
홀로 넓은 방에 있으니, 더 외로운 것 같아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혼자 있는 건, 오랜만이네.”
* * *
그 시각, 아이들은 피오라와 바리다스 모르게 한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명, 첫 번째 약혼식 계획.
시작은 이틀 전 밤이었다.
피오라와 대부분들의 사용인들이 잠든 늦은 밤 아이들은 단체로 렌의 방에 모였다.
리리와 라라는 렌의 침대 밑에서 곤히 자고 있었고 자스민은 렌의 품에 안겨 하품을 했다. 칠드런은 그린과 레몬이 불러서 오긴 했지만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벽에 기대어 있었다.
오늘 아이들을 불러 모은 것은 그린과 레몬이었다.
토마가 무슨 일로 불렀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레몬이 선수를 쳤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 안에는 그린과 레몬이 그린 케이크 디자인과 꾸며진 파티장이 있었다. 아이들은 갸웃거리며 레몬과 그린의 그림을 바라봤다.
그때 레몬이 소리쳤다.
“우리가 황녀님의 약혼식을 먼저 해 주자!”
“약혼식?”
그녀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토마였다.
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레몬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듯 자신의 스케치북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웅, 정식 약혼식이 준비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약혼식을 열어 드리는 거야!”
좋은 생각인 것은 확실했지만 우리끼리 하는 것이 가능할까, 렌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런 렌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그린이 입을 열었다.
“이미 피터와 크림슨에게 도와달라고 말했어.”
피터는 며칠 전 고용된 실력 좋은 파티쉐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렌과 토마는 납득하고 말았다. 피터와 크림슨의 도움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충 눈치를 본 레몬은 스케치북 구석에 그려져 있는 계획표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조잡하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1. 정언에서 파티 준비하기, 크림슨이 도아준데!
2. 파티 준비를 마치면 테이크 만들기, 피터가 도와줄 거야!
3. 안 들키게 오라번니랑, 황녀님 부르기!
그 글을 읽으며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렌과 토마는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둘이 적은 글이 맞춤법이 틀린 것이었다. 둘의 기분을 생각해 지적하지 않았지만 렌과 토마는 서로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을 긍정의 의미로 생각한 것인지 레몬이 소리쳤다.
“그러면 내일부터 준비하는 거다 알았지?”
“그래.”
잠든 자스민을 제외한 모두가 알겠다는 대답을 했고 레몬은 뿌듯한 듯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결정이다! 모두 내일 보자 잘자!”
레몬과 그린은 손을 잡고 킥킥 웃으며 자신들의 방으로 향했다.
렌은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잠든 자스민의 자세를 바꿔준 뒤 토마를 바라봤다.
“오빠도 잘 자.”
“너도 잘 자.”
토마는 잠든 자스민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가야 할 타이밍을 잡지 못한 칠드런은 렌의 눈치를 보다 슬금슬금 방을 빠져나갔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가씨.”
렌의 방 밖으로 나간 칠드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생각했다. 굳이 자기까지 저 파티 준비에 참여해야 할까.
아니, 애초에 저 꼬마들이 자신을 왜 참석시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약혼식 때 치안 문제 때문에 평소보다 훈련량이 더 늘어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까지 봐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힘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저 아이들은 자신이 모셔야 할 상사였으니까. 한숨을 내쉰 칠드런이 허탈하게 걸음을 옮기던 중, 누군가 그를 불러 세웠다.
은은한 조명만이 반짝이는 복도, 주황 머리가 반짝였고 붉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빛났다. 렌이었다.
그녀는 칠드런이 자신을 바라보자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생들이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안 그래도 요즘 바쁘실 텐데 참가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렌의 말에 칠드런은 속으로 생각했다.
눈치 빠른 꼬맹이.
렌은 아이들 중에서 칠드런이 유일하게 껄끄러워하는 상대였다. 토마는 그와 연무장에서 몇 번 마주했기에 조금은 아는 사이였고 나머지 아이들은 그에게 전부 꼬맹이로 보였다.
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보여야 할 터였는데.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성숙해 도저히 어린 애로 볼 수 없었다. 거기에 지은 죄도 있으니 말이다.
렌의 상처에 소독약을 들이부은 것이 생각난 칠드런은 머쓱하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식은 너무 과격했었던 것 같았다.
“아닙니다.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칠드런은 고개 숙여 렌에게 인사하고 그의 방으로 걸어갔다.
귀찮아,.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품을 했다. 올해로 열일곱 살, 그는 모든 게 귀찮을 나이였다.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은 모두 자스민과 렌이 강아지를 구한 정원으로 모였다. 칠드런도 함께 말이다.
칠드런이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들은 치밀했는데 무려 공작가의 실세 중 한 명인 집사, 그러니까 크림슨을 섭외한 것이었다.
아이들이 무엇이라 말 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크림슨의 명으로 훈련에서 제외 받은 참이었다.
올해로 열일곱 살, 한국 나이로 고등학생. 그는 땡땡이도 좋아할 나이였다. 칠드런은 훈련을 할 바에는 아이들 열 명이랑 놀아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뜻밖에 찾아온 이런 좋은 일을 어린 평민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개이득.
칠드런은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테이블을 세팅하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림슨도 도착했고 그의 뒤를 따라 레드카펫과 피아노, 조각상 등 여러 가지 흰색의 조형물들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며 칠드런은 생각했다.
너무 본격적인데 이건.
그는 해봤자, 아이들이 종이로 접은 화관을 만들거나 노래 정도만 부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정식 약혼식의 뺨을 후려칠 정도로 준비되고 있는 아이들의 약혼식 스케일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예상이 맞은 부분은 있었다. 다만 스케일이 달랐을 뿐.
레몬이 직접 접은 종이 화관을 본 칠드런의 눈이 커졌다.
저건, 또 뭐야.
원작에서 예체능, 그것도 미술 쪽을 담당하는 레몬은 그림도 잘 그렸지만 손재주도 매우 뛰어났다.
금가루가 뿌려진 분홍색 종이로 주가 될 장미를 접은 뒤 초록색 철사로 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흰색과 노란색의 생화를 꼽아 장식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녀가 만든 화관은 완벽했다.
칠드런이 놀랄 틈도 없이, 어딘가에서 연주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돌아보자, 렌과 토마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과거 유명한 작곡가가 자신의 연인을 위한 작곡한 ‘You Are My Symphony’라는 곡이었다. 칠드런이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렌의 연주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고 토마는 음악에는 딱히 소질이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렌과 어울린 덕에 다행히도 박자 감각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병행한 렌과 함께 바이올린을 배웠기에 연주 실력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물론 렌에게 견줄 바는 되지 않았지만.
둘의 연주가 끝이 나자 크림슨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두 분 모두 실력이 많이 느셨군요. 훌륭합니다.”
“어제 한두 번 맞춰 본 것이 전부인데, 다행이네요.”
렌과 토마는 마주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칠드런은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사실, 나는 천재가 아니었던 거 아닐까?
그의 17년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진짜 천재는 저런 애들을 말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훈련 좀 땡땡이쳤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아주 오랜만에 그의 열정에 불이 붙었다.
그런 칠드런의 속을 모르는 아이들은 렌의 자리를 뺏어 피아노를 치며 놀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틈을 타, 렌은 칠드런에게 다가갔다.
“어땠나요?”
그녀의 질문에 칠드런은 무어라 대답하기 망설여졌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천재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그녀를 보면 더 확실하게 느낄 것이었다. 자신이 아닌, 그녀가 진짜 천재라고.
항상 천재 소리를 듣고 자라온 그에게 이런 자극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검과 음악이라는 전혀 다른 장르에서 자신에게 이런 벽을 느끼게 하다니.
망설이던 칠드런은 입을 열었다.
“제가 아직 부족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루뭉술한 그의 말에 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칠드런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인지 칠드런은 덧붙였다.
“저에게 자극이 될 정도로,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칠드런의 말에 렌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도 칠드런의 소문은 조금 알고 있었다.
평민 출신 천재 기사, 평민 기사에서 황녀의 가디언으로 역대급 승진, 최연소 마나 사용자. 그를 가리키는 호칭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모든 것에 평민이라는 꼬리표가 달리긴 했지만 모든 호칭들은 그를 찬양하고 있었다.
그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겠지.
그런 칠드런에게 자신의 연주가 어떤 이유에서든 자극이 되었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진짜 천재는 그일 텐데.
“유명한 천재분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영광이에요.”
렌의 말에 칠드런은 다시 한번 벽을 느꼈다.
이렇게 대단한 재능을 가졌으면서 자만하지도 않는다니.
스스로 천재라고 으스대고 다녔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는 이 일이 끝나면 하루 종일 훈련 해야겠다 다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음번에도 꼭 한 번 연주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칠드런은 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상치 못한 칠드런의 부탁에 렌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내민 그의 손을 맞잡았다.
“얼마든지요.”
렌의 대답에 칠드런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기사들의 방식대로라면 입을 맞췄겠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렌을 배려한 행동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을 쌍둥이가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둘은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