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첫 번째 약혼식
그 시각, 나는 아이들과 함께 바리다스와 렌을 찾아 공작가 정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알아서 올 거라는 내 말에도 꼭 같이 가야 한다며 아이들은 바리다스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뭐 때문에 아이들이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지,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때, 내 눈에 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칠드런과 바리다스, 그리고 렌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또 무슨 상황이야.
진지해 보이는 분위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들 저러고 있대…?
하지만 심각했던 분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렌이 다쳤다고 오해를 한 아이들이 무어라 한마디씩 하며 렌의 주위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렌이 걱정이 된 듯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 손을 잡았다.
“아니, 조금 힘들어서 그래. 그것보다 어서 준비한 곳으로 가야지.”
라고 말하며, 렌은 바리다스의 품에서 내려가려는 것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그는 렌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를 잡고 있는 바리다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가지.”
그의 말에 렌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감사해요.”
렌의 말에 피식 웃은 바리다스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둘의 사이가 조금 가까워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렌을 안은 바리다스와 나, 아이들 그리고 칠드런은 자스민의 안내에 따라 어딘가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공작가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정원이었다.
나도 산책하면서 몇 번 지나치긴 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 정원은 내 기억과는 달리 몇 배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흰색 테이블보가 올라간 테이블 위에는 은촛대와 접시들이 놓여져 있었고 주위에는 여러 가지 색의 장미와 아름답게 세공된 흰 조형물들이 있었다.
나는 나직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데 이게 다 뭐람, 바리다스를 바라보자 그의 동공도 커져 있었다. 아무래도 모르고 있었던 일인 것 같았다.
그때 아이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두 분의 약혼을 축하드려요.”
어느새 다가온 레몬이 내게 종이로 접은 화관을 씌워 주었다.
“고마워.”
내가 인사하자 레몬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바리다스는 화관을 쓴 채 환하게 웃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피오라를 바라봤다.
그저 지나갈, 형식적인 약혼식을 빛나게 만들어 준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피오라에게도. 아이들과 이렇게 가까워진 데에는 그녀의 공이 컸다.
“이렇게 축하해 주다니, 고맙구나.”
바리다스의 인사에 아이들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이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바리다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너희들에게서 그들을 비춰 봤을까.
존재하는 것 자체로도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인데 말이다.
바리다스는 손을 뻗어 그린과 레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의 행동에 레몬과 그린은 바리다스를 껴안았다.
“형님, 축하드려요.”
“오라버님, 축하해.”
바리다스는 쌍둥이를 양팔로 안아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반년간 아이들을 외면한 죄책감과 미안함 그럼에도 자신을 가족으로 여겨주는 아이들에 대한 고마움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었다.
해맑게 웃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바리다스는 생각했다.
너희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고 말이다.
‘사랑스럽다’ 그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오르며 가슴 속에 몽글몽글한 솜사탕이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
바리다스는 환한 미소로 답했다.
* * *
그와 아이들의 사이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나는 괜스레 뿌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렌과 토마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옆에 준비되어 있던 피아노와, 바이올린 쪽으로 향했다.
렌이 피아노를, 토마가 바이올린을 잡더니 연주를 시작했다.
맑고 청아한, 그리고 아이들을 꼭 닮은 사랑스러운 멜로디가 정원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렌이 피아노를 잘 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토마는 의외의 실력이었다.
어느새 연주가 끝났고 우리는 모두 함께, 그들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피아노 의자에서 내려온 렌과 토마는 나와 바리다스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있을 진짜 약혼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열심히 준비했어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었다.
너희가 이렇게 준비해 줬는데 어떻게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그것을 감안 하더라도 아이들이 준비한 약혼식은 훌륭했다.
뭐 물론 엄청난 양의 돈이 사용된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딱 봐도 비싸 보이는 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보며 생각했다.
“너무나도 훌륭했어, 고마워.”
환하게 웃은 렌과 토마는 바리다스에게 달려가더니 작은 상자를 주었다.
“반지는 오라버니가 준비한 것이 있으니까.”
그 상자 안에는 보라색 보석이 달린 팔찌와 마찬가지로 같은 보석으로 장식된 은색 띠가 들어 있었다.
팔찌라고 하기엔 너무 작아 보였다.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바리다스는 그것의 정체를 아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으니까요.”
“좋은 선물이구나 고마워.”
라고 말한 바리다스는 그 띠를 꺼내어 검에 묶었다.
은색 띠는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은 정도로 그의 검과 어울렸다.
아, 저런 용도구나.
나는 아이들의 센스에 감탄했다.
그리고 상자에서 여전히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팔찌를 내려다봤다.
이 선물도 그렇고, 약혼식도 그렇고 정말 적응할 수 없는 스케일의 선물들이었다.
그때 상자에서 팔찌를 빼낸 바리다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그의 말에 이끌리듯 손을 내밀자 그가 내 손목에 팔찌를 채워 주었다.
그것은 내 맞춤으로 제작한 것 같이 꼭 들어맞았다.
지구에서 평생 누린 호사보다 많은 것을, 이곳에 와서 너희들에게 받는 것 같구나.
선물에 대한 가장 큰 보답이, 웃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 고마워.”
내 말에 아이들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은으로 만든 덮개가 씌워진 접시를 들고 크림슨이 등장했다.
아이들이 준비할 정도의 스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그가 도움을 준 모양이었다.
그리고 바리다스는 자신이 시킨 업무를 뒤로하고 이런 일을 준비한 크림슨을 타박해야 할지, 칭찬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는 덮개를 들어 보였다.
그러자 숨겨져 있던 생크림 케이크가 드러났다.
나는 이렇게 큰 케이크를 보는 것은,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열, 아니 스무 명은 족히 먹을 것 같은 크기의 거대한 케이크였다.
심지어 위에는 쿠키로 만들어진 피아노와, 공작가를 꼭 닮은 거대한 성이 있었다.
“저희가 직접 만들었어요.”
렌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대단하구나.”
바리다스는 아이들이 준비한 작은 약혼식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준비한 것이, 밀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동생들에게 고마움과 동시에 경쟁심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빛을 다르게 읽었다.
저렇게 칭찬해주긴 했지만 그도 눈치챈 거지, 아이들이 만든 케이크가 그들끼리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마 파티쉐들이 꽤나 갈려나 갔을 거야,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과거 어린이집에서 원생들과 함께 케이크 만들기 실습을 한 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정말 악몽 그 자체였다.
크림을 바닥에 뿌리거나 쿠키를 던지지 않나, 바닥에 떨어진 크림 치우는 대만 한나절이었다.
그런데, 케이크뿐만 아니라 쿠키 성이라니.
거기에 저 진저맨들… 저 아이싱을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저 케이크와 쿠키 성을 만드는 것을 도와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보너스를 주라고 말해야겠어.
나는 꼭 보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레몬이 나에게, 그린이 바리다스에게 작은 진저맨을 내밀었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나와 바리다스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이 준 것은 나와 바리다스의 머리카락과 눈 색을 닮은 진저맨이었다.
닮았다고 하기에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와아, 나를 꼭 닮았는걸.”
내 작위적인 리액션이 아이들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지만, 바리다스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쿡쿡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가 얄미워 곁눈질로 노려봤다.
이봐, 리액션이 쉬운 줄 알아? 너도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그런 내 속을 읽은 것인지 바리다스도 입을 열었다.
“내 동생들은, 어찌 이렇게 재능이 많은지.”
나보다 작위적인 칭찬이었지만 ‘동생’ 그 단어가 아이들에게 가지는 커다란 의미를 나는 알고 있었다.
젠장, 졌다.
나는 패배를 인정했다. 저 리액션은 이길 수 없었다.
정원에 어둠이 드리워졌고 등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비되어 있던 요리가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공작가는 평소에도 고급 레스토랑 뺨치게 잘 나오긴 했지만, 오늘의 요리는 평소보다 몇 배로 좋아 보였다.
…크림슨과 요리사들도 고생 꽤나 했겠구나.
나는 속으로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보냈다.
음식들은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맛있었고 아이들이 만든(?) 케이크도 훌륭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맑은 밤하늘에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
밤하늘에서 비행기나 인공위성밖에 보이지 않는 한국과는 많이 달랐다.
이렇게 맑은 밤하늘을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경이로운 광경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렌이 입을 열었다.
“오늘 다 같이 자면 안 돼요?”
그녀의 말에 아이들은 모두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침대는 꽤나 컸기에 다 같이 자도 무리가 없을 것이었다. 아이들이 귀여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내가 알겠다고 대답을 하자 아이들은 바리다스를 돌아봤다.
“오빠도 같이.”
“형님도.”
아이들의 눈빛에 답지 않게 당황한 바리다스는 말려달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와 같이 자는 것은 사절이었다.
“다 큰 어른들은 같이 자는 거 아니야.”
하지만 아이들은 내 생각보다 똑똑했다.
“아니야, 엄마 아빠는 항상 같이 잤어.”
“둘도 결혼할 거니까, 같이 자도 돼.”
아이들의 완강한 주장이 이어졌다.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에 바리다스는 내 눈치를 봤다.
설득에 실패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길래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이들이랑 다 같이 자는 건데, 별일이 있을 리가.
그러자 한숨을 내쉰 바리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공작이 된 뒤로 한 번도 진 적 없는 그의, 첫 패배였다.
샤워를 마친 그와 아이들은 모두 바리다스의 방에 모였다.
아이들이 그편을 더 좋아하기도 했고 바리다스의 방에 있는 침대가 저택에 있는 침대 중에 가장 컸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잠옷을 입고 있던 반면, 나와 바리다스는 생활복 중 가장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서로에게 잠옷 차림을 보여주기 아직 이르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이들이 차지한 방안을 둘러보며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꼴인지.
이러다가 피오라 옆에서 잠까지 자라고 하면, 낭패였다.
그는 순수하고 순진한 아이들과 다른 이십대의 혈기왕성하고 건강한 남성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적당히 빠져나가 다른 방에서 자는 것이 났겠군.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자스민이 소리쳤다.
“난 오빠랑 황녀밈 사이!”
그녀의 말에 다른 아이들도 소리쳤다.
“싫어, 거긴 내 자리야!”
“난 그럼 그냥 황녀님 옆 할래.”
그렇게 아이들은 말릴 틈도 없이 나와 그의 옆에 누가 누울 것인지를 두고 투닥거리며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바리다스는 답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최소 그녀와 자신 사이에 두 명 이상의 아이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것 참, 다행이네.
스스로 판 굴에 빠져든 바리다스와 다르게 나는 아이들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아이들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말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나는 오랜만에 비장의 기술을 꺼냈다.
“소라게가 됩시다. 쏙!”
“쏙!”
반사적으로 쏙이라 소리친 아이들은 조용히 나를 올려다봤고 그 모습에 바리다스는 낮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게 크림슨이 칭찬한 그 기술인가.
저 아이들을 순식간에 조용하게 만들다니, 실제로 보니 더 대단했다.
“싸우면 각자 방으로 돌아가게 할 거야.”
내 단호한 말에 아이들은 시무룩해져 고개를 숙였다.
결국 아이들은 가위바위보로 누가 누구의 옆자리에 누울지 결정했고 그린과 자스민이 내 옆에, 렌과 토마가 바리다스의 옆에 레몬이 한가운데에 눕기로 했다.
침대가 어찌나 거대한지 아이들이 모두 누워도 자리가 반 이상 남았다.
방의 불이 꺼졌고 나와 바리다스는 정해진 아이들의 옆자리에 누웠다.
“황며님 잘 자요.”
그렇게 말하며 자스민은 날 끌어안았다.
“잘 자 얘들아.”
창밖에서 환한 달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고 어느새 아이들은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