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31)화 (31/207)

30. 두 번째 약혼식

원래, 크레센트에서는 약혼식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리다스가 이렇게 약혼식을 성대하게 준비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아직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서. 

두 번째, 하지만 가문에 외적이나 내적인 부분에서 안주인이라는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 때문에 그는 데이먼 제국과의 합의 후에 약혼식만 치르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공식적인 약혼식에서도 딱히 복잡한 절차가 있지는 않았다.

서로 약혼반지를 교환하면 끝. 뭐, 약속의 키스를 하거나 서로 열렬한 포옹을 하거나 그런 것들은 전혀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푸른색의 드레스를 입은 채 의자에 앉아 바리다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끝내고 쉬고 싶은데.

드레스는 무거웠고 구두는 불편했다.

“…힘들어.”

작게 중얼거리며 기다리던 중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나는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아이처럼 깜짝 놀라 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황녀님!”

그곳에는 아이들이 서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아이들의 모습에 기운이 나는 것만 같았다.

“황며님, 완존 이뻐…”

그때 내 드레스에 아랫단에 달린 장미꽃을 만지작거리며 자스민이 중얼거렸다.

렌과 레몬도 마찬가지로 나를 칭찬했고 그린은 엄지를 들어 보였다.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이마에 입을 맞춰 주자, 모두 환하게 웃으며 볼을 붉혔다.

그때, 아무런 말도 없이 멍하니 서 있는 토마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갸웃거린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그제야 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평소보다 얼굴이 붉어진 그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름다우십니다.”

귀여워라.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레몬이 킥킥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황녀님한테 반했대요~”

그녀의 말에 얼굴이 새빨개진 토마는 그녀를 확 노려보더니 소리쳤다.

“아니거든!!”

언제나처럼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런 아이들을 뒤로하고 내 곁으로 다가온 렌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제 형수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상상치도 못한 호칭에 내 눈이 커졌다.

아니, 하고 많은 호칭 중에 왜 하필 형수님이죠?

“나도 그렇게 부를래!”

그때 토마와 투닥거리던 레몬이 소리쳤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형수님.”

그린이 말했고.

“형수밈! 좋아!!”

자스민이 말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형수님이라는 호칭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선생님이라고 불리고 싶단 말이야.

아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렌이 선수를 쳤다.

“황녀님은 모두가 부를 수 있지만, 형수님이라고는 저희만 부를 수 있어서, 기뻐요.”

그런 말까지 들은 내가 형수님이라는 호칭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숨을 내쉰 나는 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희가 기쁘다면, 그렇게 해.”

내 말에 렌의 양 뺨이 붉게 물들어 갔다.

왜 하필 형수님이냐고.

하지만 나도 다른 호칭을 생각해 봤지만, 형수님을 대체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형수님인 것도 팩트였으니 말이다.

내가 그렇게 형수님이라는 호칭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바리다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동장과 동시에 아이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오라버니도 약혼 축하드려요.”

렌의 인사를 시작으로 아이들도 그에게 한 마디씩 건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온 레몬의 한 마디에 나와 바리다스는 동시에 경직되었다.

“근데 형수님이랑 큰 오빠야 오늘 뽀뽀해?”

형수님, 그리고 뽀뽀.

형수님이라는 단어는 바리다스에게도 타격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바리다스는 다른 것에 타격이 있었다.

뽀뽀.

사랑스럽고 귀여운 어감을 가진 그 단어는 그에게 너무 생소한 말이었다.

순간적으로 피오라의 입술을 바라본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는 대답을 그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안 해.”

그의 대답이 평소보다 느린 것을 보니 형수님이라는 호칭을 그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확실했다.

어떻게든 호칭을 바꿔봐야겠어. 

난 약혼녀인 거지 아직 결혼 안 했다고, 어리다고 아직!

반 오십이 이 년이나 남은 사람이라고!

한국에서 12월생이었던 대다가 몸도 약했던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1년 늦게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랬기 때문에 다른 애들보다 스물다섯 살이 빨리 되었고 반 오십이라고 놀림을 받았지.

1월 1일 날, 답지 않게 언니라고 부르며 내가 반 오십이 된 것을 축하하는 친구들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떠오른 친구들과의 추억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을 지우려 애썼다. 그들을 이제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주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보고 싶네, 모두.”

나는 내 말을 바리다스가 들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말은 바리다스에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말았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크림슨이 안으로 들어왔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의 말에 바리다스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오늘 화동 역할을 해줄 그린과 레몬이 꽃바구니를 들고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바리다스는 방에서 나가기 직전 레몬과 그린을 돌아보았다.

흰 드레스와 흰 정장을 입은 그들은 피오라의 푸른 드레스와 조금 동떨어져 보였다.

이번 약혼식에서 그녀와 세트인 옷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하며 바리다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약혼식의 주인공인 둘의 옷이 세트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다만, 당사자는 자신이 왜 이리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는지 어째서 만족스러운지조차도 몰랐지만 말이다.

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자, 붉은색의 카펫이 바닥에 깔려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고 있었다.

분홍색과 붉은색의 꽃잎이 날리고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온 뒤로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았다. 물론 이 세계는 소설이고 나는 그 속의 악녀였지만 말이다.

뭐 어때, 이 약혼식에서는 내가 주인공인걸.

나는 긴장하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카펫의 끝에 도달하자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상자를 열자, 영롱하게 반짝이는 반지 두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감탄하기 무섭게 상자에서 반지를 뺀 바리다스는 그것을 내 손에 끼워 주었다. 맞춤 제작을 한 것이라 그런지, 내 손에 딱 들어맞았다.

이제 내 차례였다.

나는 상자에 남은 반지 하나를 빼내어 그의 손에 끼워 주었다.

나는 바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내 기억상으로 소설의 시작은 피오라와 바리다스의 약혼이었다.

소설이 드디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원작대로 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꼭 사고사나 사형이 아닌 자연사를 하자.

나름 소소한 다짐을 하던 그 순간 바리다스에 의해 내 손이 나의 의지에서 벗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바리다스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춘 것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당하는 행위에 내 얼굴이 붉어졌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형식적인 말이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그 말을 끝으로 앞에 서 있던 신관이 소리쳤다.

“데이먼 제국의 피오라 티아네 드 데이먼 황녀님과, 바리다스 차일드 공작님께서 이 자리에서 공식적인 약혼 관계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듣고 또 들어도, 적응 안 되는 긴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나의 이름이었다.

나팔 소리와 함께 약혼식이 끝났음이 선언되었고 사람들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와 그에게 달려온 아이들은 우리들의 품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약혼 축하드려요!”

그 모습에 귀족들의 눈이 커졌다.

지난번에 열린 연회에 이어 약혼식까지 아이들을 동행시킨 것 때문에, 아이들이 공자와 공녀로서의 위치에는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네.

아이들이 무시당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그 순간이었다. 

자스민이 바리다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큰오빠야, 나랑 춤춰.”

그녀의 말에 바리다스는 나를 돌아봤다.

원래라면 첫 춤은 당연히 나랑 춰야 했으나, 나는 딱히 춤을 추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나를 대신해 춤을 춰 주겠다고 말한 자스민에게 고마울 정도였다.

“저는 괜찮아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귀족들의 규칙을 알기에 눈치만 보던 레몬과 렌도 바리다스에게 달려갔다.

“지난번에 약속하셨잖아요, 춤춰 주세요.”

“큰오빠, 나도 춤출래.”

그렇게 양손이 부족하게 된 바리다스는 한 팔로 레몬과 자스민을 안아 들더니 남은 한 팔로 렌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모습에 그린과 토마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형수님은 춤 안 추시나요?”

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나는 몸을 움직이는 것을 딱히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고 지금은 진짜, 진짜로 귀찮았다. 아침부터 준비하겠다고 치장을 한 건 세 시간, 드레스 입는 데 한 시간 거기에 대기를 두 시간을 더 했다.

지친다고 나도.

나는 지친 기색 없이 춤추고 있는 바리다스를 바라봤다.

심지어 그는 레몬과 자스민을 동시에 든 상태로 춤추는 수준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아이들이 가벼운 편이라고 해도 나는 저렇게 못 해. 지난번에 렌 한 명으로도 힘들었다고.

상상만 해도 팔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악녀지만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한 하인이 위스키 잔이 가득 올라간 쟁반을 들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한 잔쯤은 괜찮겠지?

며칠 전 바리다스 앞에서 술에 취해 잠든 사실이 떠오른 나는 적당히 마시면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며 술잔을 하나 받아들었다.

한 모금 들이키자 술이 부드럽고 시원하게 넘어갔다.

확실히 비싼 게 맛있구나.

한 잔이 술술 넘어갔다. 그렇게 한 잔을 더 마신 나는 입맛을 다시며 빈 위스키 잔을 바라봤다.

…한 잔 더 할까?

이 몸에 주량도 테스트할 겸. 앞으로 피오라로 살려면 알긴 해야 할 거 아냐.

그렇게 스스로 변명거리를 만들며 나는 위스키 한 잔을 더 받아들었다.

내가 잔을 받아 든 그 순간, 내 손에서 잔이 사라져 버렸다.

어, 벌써 취한 건가.

생각한 내가 뒤를 돌아보자 바리다스가 내 위스키를 들고 있었다.

“그만, 충분해요.”

사회생활 5년 차인 내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나, 술 마시고 실수했구나.

내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안 했다고 한 건 나를 배려한 거였구나.

하지만 그런 내 표정을 다르게 파악한 것인지 바리다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내 위스키를 정확히 반 털어 마셨다.

그리고 남은 위스키를 내가 마시고 남은 잔에 부은 뒤, 내게 내밀었다.

“이 정도는 더 마셔도 됩니다.”

바리다스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피오라의 주량은 맥주 세 잔이었다.

그리고 저 위스키와 맥주의 도수는 거의 비슷했다. 그러니 두 잔 반이라면, 그녀도 안 취할 것이었다.

저러는 걸로 보아 확실했다. 

내 몸, 주량 맥주 세 잔이구나.

기억해줘서 고맙네요. 정말로.

민망함과 취기가 동시에 올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따라준 위스키 잔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 한 번에 그것을 들이켰다.

그런 내 모습에 바리다스가 웃음을 터트린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시끌벅적 정신없는 두 번째 약혼식이 끝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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