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32)화 (32/207)

31. 아이들의 시간

늦은 밤,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방 밖으로 나가 보니,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심지어 모두 양 손에는 장갑을, 그리고 얼굴에는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그녀들은 내가 나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바빠 보였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지?”

내 말에 한 시녀가 다가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둘째 공자님께서 고열을 앓고 계십니다!”

그 말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가슴 속 무언가 금이 가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병에 걸렸다는 내용은 읽은 적이 없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나도 가지.”

그러자 시녀는 내게 장갑과 마스크를 내밀었고 나는 그녀에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토마의 방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방 안에 누워 끙끙 앓고 있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들어 있었는데, 온몸에는 붉은 반점이 도드라져 있었다.

이건… 홍역이잖아.

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의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사라진 병이었지만 중세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토마의 이마에 손을 얹자 열기가 느껴졌다. 그의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홍역의 문제점은 바로, 전염병이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사람들은 이 병이 옮을 수 있는 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마스크와 장갑을 끼는 것이겠지.

나는 어제까지 토마와 같이 밥을 먹은 아이들을 떠올렸다. 

가장 어린 자스민이 감염되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괜찮나?”

“네, 아직까지는 모두 괜찮아 보이십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모두 각자의 방에 격리시켜, 그리고 나오지 못하게 해. 어릴 때 홍역을 앓은 시녀들과 시종들을 아이들에게 한 명씩 붙여주고 옆에 있어달라 해.”

그나마 다행인 것은 토마가 요즘 검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아이들과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바리다스가 자리를 비운 지금, 공작가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나였고 아이들은 내가 책임져야 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들을 내가 지켜내야 했다.

“홍역의 잠복기는 며칠 정도지?”

“2주에서 3주 사이입니다.”

그렇게까지 길어?

그 정도의 격리 기간이라면 힘들 텐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신관을 불러 정화를 시킨다면 감염 여부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럼 그렇게 해 주게.”

시계를 보니 이제 5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크림슨의 출근 시간까지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앓고 있는 토마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스스로의 무력함에 화가 날 것 같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토마에게 다가가 체온을 재자 40도가 넘어갔다. 

땀에 잔뜩 젖은 그의 얼굴을 닦아주자 토마가 나직하게 나를 불렀다. 

“형…수님….”

토마가 울먹이며 내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너무 뜨거웠다.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파요…”

잔뜩 젖은 그의 목소리에 내 마음까지 아파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달래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나을 수 있어.”

내 말에 토마가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그의 목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네,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그 말을 끝으로 날 잡고 있던 토마의 손에 힘이 빠졌다. 그가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감사하다고 말해주는 너를 지켜주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낫게 해주고 싶었다.

그때 한 시녀가 달려와 신관이 도착했다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내가 방 밖으로 나가자 흰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옷을 입은 신관이 서 있었다.

나를 본 그는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와 여유롭게 인사를 나눌 시간 따위 없었다. 그보다 아이들을 진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 어서 가지.”

나는 그의 인사를 대충 받아든 뒤, 신관과 함께 그린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한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책을 읽고 있는 그린의 모습이 보였다.

“형님은 괜찮으신가요?”

무슨 일인지 상황을 전해 들은 듯 그린은 내게 달려와 토마의 안부를 물었다. 그의 눈도 평소와는 다르게 많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금방 나을 수 있을 거야, 우리 같이 응원해주자.”

내 말에 그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린에게 다가온 신관이 그의 손을 잡았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빛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소설 속에서 나온 신성력이 저런 것인가.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에 내 눈이 커졌다.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이네요. 건강하십니다.”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이 세계의 신성력이라는 것은 현대 의학 못지않게 뛰어난 것 같았다.

“고맙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가 신관과 함께 방을 나가기 직전, 그린이 나를 붙잡았다.

“형수님도 조심하세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역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제발, 아이들에게 별문제가 없기를.

내가 다음으로 찾아간 것은 레몬이었다. 

그녀는 격리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내게 달려왔다.

“지금 토마가 많이 아파.”

토마가 아프다는 말에 레몬이 눈을 크게 떴다. 

“오빠가 아파…?”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이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작은 소리로 속닥였다.

“금방 나을 거야, 나을 수 있어. 그러니까, 울지 마렴.”

반대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자, 레몬은 내 손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기를 잠시, 그녀가 조금 진정이 된 후, 나는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나랑 토마 둘 다 보기 힘들 거야, 저택의 소독을 마치면 그때부터 밖에 나올 수 있어. 그러니 며칠만 참고 기다려 주렴.”

나는 레몬을 품에서 떼어놓고 이마에도 입을 맞춰주었다. 그러자 레몬은 다시 한번 울먹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스를 움켜쥐고 있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빨리 와야 해.”

“그래. 약속할게.”

내 말에 레몬이 내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은 나는 그녀의 손가락에 내 손을 걸었다.

“손가락 걸고 꼭꼭 약속해.”

신관이 레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마찬가지로 신성력을 통해 레몬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해주었다.

다음 차례는 렌이었다. 그녀의 방으로 가 상황을 설명하자 렌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신관이 렌에게 이상 없음을 확인해주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날 보며 렌이 말했다.

“오빠가 빨리 낫기를 기도할게요, 그러니 형수님도 아프지 말고 조심해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녀의 말에 가슴이 찡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고마워 렌.”

나는 마지막으로 자스민을 검사하기 위해 렌의 방을 나섰다. 그 순간, 한 시녀가 내 앞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황녀님!”

“무슨 일이지?”

“자스민 아가씨께서… 쓰러지셨어요!”

그녀의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쓰러지려는 나를 시녀가 붙잡아 부축했다.

제발, 홍역이 아니길. 

기도하는 것만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자스민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절망에 빠졌다. 침대에 누워있는 자스민의 얼굴은 열로 들떠 있었고 온몸에는 울긋불긋한 반점이 돋아있었다.

나는 누구보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스민은 이제 세 살이었다. 홍역을 견디기엔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다.

내가 충격에 빠져있던 그때,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원작대로라면 자스민은 안 죽어.

그 생각이 사라짐과 동시에 나는 극심한 자기혐오가 들었다. 자스민이 저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나는 원작 타령이나 하고 있다니. 모든 게 원작대로 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이를 으득 갈았다.

이제 원작이고 나발이고 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이 세계는 이제 덮어버리면 그만인 책이 아니었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내 앞에서 살아 숨을 쉬며 말을 하고 움직이고, 그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원작대로 될 것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런 것들을 다 배제해 왔을까. 자스민과 토마가 아프다는 사실 하나 나오지 않는, 그 원작에서 말이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희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구보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어서 나아서 다시 웃어 줘.

나는 자스민과 토마의 방을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했다. 내가 그들의 방을 빠르게 돌아다니기 위함이었다. 

홍역을 앓아본 사용인들 중 몇 명을 뽑아 나를 도와 자스민과 토마를 간호할 수 있도록 했고 남은 사용인들은 아예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몇몇 사용인들도 홍역에 걸려 고통을 호소했고 그들도 모두 격리했다. 덕분에 가문의 주치의들만 매우 바빠졌다.

나는 격리를 마친 열 명 정도 되는 환자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적다고 해야 할지.

홍역은 전염이 매우 쉬운 병이었다. 아이들 중 두 명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 기적일 정도로 말이다.

그때 출근한 크림슨이 방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는 온몸에 반점이 돋아난 환자들을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큰일이군요.”

* * *

소식을 듣고 이곳까지 달려오는 동안 아니기를 기도했건만, 결국은 홍역이 맞았다. 

크림슨은 몇 년 전 제국 전역을 뒤덮었던 역병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마치 지옥 같았다. 매일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전쟁보다 더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살아남은 이들 대부분은 홍역에 면역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성인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일 뿐, 어린아이들은 아니었다.

전염병이 퍼진 이곳은 차일드 가가 다스리는 영지 델아트였다. 다른 지역에서 별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델아트를 시작으로 홍역이 제국 전부에 퍼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사실에 크림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가 급할 때, 바리다스가 자리를 비우다니 크림슨은 그가 원망스러웠다. 바리다스가 없는 지금 그 혼자 독단적으로 처리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리다스의 연락이 올 때까지 이 전염병을 방치해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골머리를 앓던 그때, 피오라가 입을 열었다.

“제게 이 상황을 통제할 권한이 있나요?”

그 말의 의미를 크림슨이 파악하지 못할 리 없었다.

아직 약혼녀 신분이긴 했지만 바리다스가 자리를 비운 지금 공작령의 지휘권은 피오라에게 있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망설이던 크림슨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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