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아이들의 시간
“있습니다.”
내가 나서도 되는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살리고 싶었다.
머릿속에 시내에서 본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 책에서 그들은 지문으로도 등장하지 않는 엑스트라였지만, 분명히 숨을 쉬며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양 주먹을 쥐었다.
“최근에 다른 지역에서 전염병에 대한 얘기가 있었나요?”
“아뇨, 없었습니다.”
크림슨의 말대로라면 전염병의 시작이 이곳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렇다면 우선 영지 출입을 통제하고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격리시켜야 했다.
“지금 당장 성문으로 사람들을 보내 출입을 통제해 주세요. 그리고 전염된 사람들을 따로 격리시켜야 해요. 제가 알기로는 차일드 가를 전담하는 병원이 있는데 그 병원을 사용하도록 하죠.”
* * *
“하지만….”
차일드 가의 병원은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병원이었다. 평소라면 일반 평민들은 진료는커녕 병원의 문턱조차 넘을 수 없었다. 하지만 크림슨도 알고 있었다. 저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는 것을. 여기서 시간을 끌어 다른 곳으로 퍼져 다시 한번 더 몇 년 전처럼 전염병이 퍼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부탁해요.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지시대로 움직여주세요.”
부탁인 것 같지만 단호한 명령이었다. 크림슨은 피오라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감염된 사람들을 격리하고 통제하는 것, 이것은 21세기의 방식이었다. 틀릴 리가 없었다.
병원비 같은 건, 나한테 진 빚 갚는 걸로 퉁 치라 하지 뭐.
크림슨은 내 명령에 따라 즉시 성문으로 사람을 보냈다. 또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난 사람들도 빠르게 연락을 취해 그곳에 격리시켰고 전염병에 걸리거나 의심 증세가 있는 사람들을 찾아 병원에 격리했다.
불만이 없을 수는 없었지만, 대부분 과거의 홍역을 겪어 본 사람들이라 그런 것인지 반발이 그렇게 거세지는 않았다.
그렇게 내 지시하에, 격리와 방역이 진행되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된 것을 확인한 나는 자스민에게 향했다.
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스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들어 있었다.
상태는 아까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했는데도 열기가 느껴졌고 아까 봤던 것 보다 반점의 수가 늘어 있었다.
나는 땀에 젖은 작은 이마를 닦아준 뒤 그녀를 쓰다듬었다.
제발, 이겨내야 해 자스민.
나는 늦은 밤까지 자스민과 토마가 격리된 방을 돌아다니며 둘의 상태를 살폈다. 시녀들이 나를 걱정했지만 힘들지 않았다. 아니, 힘들 틈이 없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아픈 아이들을 두고 도저히 잠들 수 없어서 나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 * *
아이들을 간호하다 보니, 어느새 창밖으로 해가 뜨고 있었다.
그제야 피로함을 느낀 나는 샤워를 마친 뒤,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이 열리고 크림슨이 안으로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나는 놀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데요?”
나는 크림슨을 따라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시민들이 성문 앞에 진을 치고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시위라니요?”
“자신들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으니, 영지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공작님을 부르기 전까지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나는 할 말을 고민하며 그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는 저택의 입구로 향했다.
내가 저택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모여 있던 평민들이 내게 달려와 소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목소리가 겹쳐 무어라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과 목소리가 동시에 나를 향했다. 처음 느껴보는 위압감에 울렁거리기 시작한 나는 아주 조금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그레이가 몇 명의 기사들과 함께 내 옆에 서 있었다.
“다들 정숙해 주시죠. 예비 공작부인이십니다.”
그의 덕에 아주 조금은 진정이 된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한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학생 때처럼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
스스로를 다독인 나는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영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에 불만이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병은 그냥 감기와 같은 병이 아닌 전염병입니다.”
내 말에 끝나기가 무섭게 한 남자가 소리쳤다.
“그것이 출입을 막는 것과 무슨 연관입니까!!”
현대 사회라면 정말 멍청한 질문이었겠지만 이곳은 21세기가 아니었다. 아직 병이나 방역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전염병의 발원지는 우리 영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이 혹시 다른 지역의 사람과 접촉하게 되면 그땐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를 막기 위해서 출입을 통제하는 거예요.”
이 정도면 이해를 할 수 있으려나.
나는 최대한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정중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렇게 모여 있는 것도 위험한 상태입니다. 제발 모두 집으로 돌아가 상황이 진정되길 기다려 주세요.”
내 말에 대기하고 있던 평민들의 눈이 커졌다.
‘부탁’
귀족이 평민에 사용할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과거에 전염병을 겪어 본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잠시간 서로를 바라보다가 하나둘씩 내게 인사를 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고 안도가 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힘이 풀린 다리가 맥없이 쓰러졌다.
자리에 주저앉은 나를 누군가 일으켜 세워주었다. 뒤를 돌아보자 그레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과거 그에게 사기를 쳤다는 사실이 떠오른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아 들었다.
“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도 뒤이어 내게 경례했고 나는 그들에게 한 명 한 명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기사들이 모두 떠나갔고 정원에는 나와 그레이, 크림슨만이 남았다.
그때 그레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내가 손을 뻗자, 내 손 위에 작은 선물 상자가 떨어졌다.
“이건…?”
그레이를 올려다보자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난번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말대로 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가 검사한 모양이었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선물은 뭐지?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어서 열어보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눈빛에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색의 보석이 박힌 귀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눈에 봐도 아름답고 화려한 보석의 자태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요즘 다 나한테 왜 이런 선물을 줘.
내가 바리다스를 핑계로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그레이가 선수를 쳤다.
“이건 약혼 선물입니다. 신랑 신부가 오래오래 행복하라는 뜻이 담긴 보석입니다.”
...
가불기였다.
이 선물은 거절할 수 없었다. 물론 귀걸이의 뜻은 이뤄질 수 없을 것 같지만 말이다.
“감사해요.”
부담스럽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생각한 나는 웃으며 그의 선물을 받아들었다. 그런 내 모습에 그레이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때 공작가 쪽에서 시녀 한 명이 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엉망이었다. 그레이의 부축을 받으며 숨을 고른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공녀님의 열이 떨어지지 않고 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급하게 자스민의 방으로 돌아왔다.
체온계를 가져와 그녀의 열을 재자, 40도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른도 버티기 힘들 정도의 고열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자리를 비우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시녀들이 계속 자스민을 돌보긴 했지만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땀으로 젖은 자스민의 옷을 벗긴 뒤,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었다.
해열제를 먹이기 위해 자스민의 입을 벌리자, 잠에서 깬 것인지 그녀가 나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형…수밈, 너무 아…파여….”
목이 부은 것인지 한마디 한마디 하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나는 자스민을 일으켜 세운 뒤 그녀에게 해열제와 미지근한 물을 주었다. 자스민이 싫어하는 쓴맛이 났을 테지만, 거절할 힘도 없는 것인지 자스민은 반항 없이 약을 받아먹었다. 그리고는 금세, 거친 숨을 내쉬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고 간간이 자스민의 땀을 닦거나 상태를 살펴주던 나는 결국 지쳐 그녀의 머리맡에 쓰러지고 말았다. 나를 보조하던 시녀들도 피곤한 것인지 눈 아래가 퀭했다.
시계를 보니 5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시녀들의 교대까지 삼십 분 정도 남은 것을 확인한 나는 입을 열었다.
“먼저 들어가 보렴.”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잠깐 정도는 나 혼자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시녀들은 계속 사양하다 내 괜찮다는 말에 결국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방에는 이제 나와 자스민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잠든 자스민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까보다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이었지만 떨어지지 않은 열 때문에 거칠어진 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자스민의 작은 손을 잡았다.
제발, 버텨 주렴. 자스민.
* * *
그 시각, 공작령 외곽에 나타난 도적떼들을 퇴치하기 위해 조금 먼 숲으로 나가 있던 바리다스가 급하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마중을 나온 크림슨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의 상태는?”
“둘째 공자님은 많이 호전되었지만, 막내 공녀님께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바리다스는 토마의 방으로 향했다.
하필, 다른 지역으로 나갔을 때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달려온다는 것이 이틀이나 걸렸다.
처음 전보를 받았을 때, 그는 아이들을 향한 걱정과 동시에 피오라의 영리한 대처에 감탄했다.
마냥 귀하게 자란 황녀님인 줄만 알았는데. 그런 결단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어느덧 토마의 방 앞에 도착한 바리다스는 문을 노크하며 생각했다.
그러자 한 시녀가 문을 열어주었고 침대에 앉아 스프를 먹고 있던 토마는 바리다스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몸은 좀 괜찮나?”
형에게 오랜만에 받는 걱정이었다.
토마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고 바리다스는 토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열었다.
“빨리 나으렴.”
그 말을 끝으로 바리다스는 방 밖으로 나갔지만 토마는 바리다스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네, 형님.”
작게 중얼거린 토마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어서 빨리 나아서 동생들을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한편 바리다스는 뒤이어 자스민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노크를 해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간호하는 사람이 없는 건가?
그럴 리가. 너희를 방치하던 사용인들을 모조리 갈아 치웠는데도?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으득, 이를 간 바리다스는 고민 없이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후 펼쳐진 광경에 바리다스는 방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피오라!”
쓰러져 있는 피오라를 안아 든 그의 눈이 강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