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아이들의 시간
* * *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주위를 둘러보자 내 방 안이었다.
나는 분명 자스민을 간호하고 있었는데 왜 여기에 있지…?
고개를 갸웃거린 내가 자스민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순간 로나가 내게 달려왔다.
“안 돼요. 더 누워 계세요.”
그녀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다시 침대 위에 눕혔다.
“괜찮아, 그것보다 어서 자스민을.”
나는 침대에서 다시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시 로나에게 제지당한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괜찮다니까?”
사실 괜찮지 않았다. 머리는 깨질 거 같았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스민이 더 걱정되었다.
그때 내가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로나는 입을 열었다.
“황녀님을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게 하지 말라는 공작님의 명령입니다.”
아.
나는 낮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 몸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은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바리다스가 자리를 비운 지금 내가 아니면 공작가와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으니까, 알면서도 무리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온 것이라면, 이제는 조금 쉬어도 되는 거겠지.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침대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을 차일드 가의 전속의라고 소개한 그는 내 몸을 진찰하더니, 과로와 수면부족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는 나에게 수면제와 여러 가지 약들을 주었고 당분간 무리하지 말고 푹 쉬라고 말한 뒤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며칠간 밀렸던 잠을 몰아서 자는 것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늦은 밤이었다.
푹 자서 그런 것인지 아까보다 머리가 맑아져 있었다. 오래 누워있었던 탓인지 몸은 좀 찌뿌둥했다. 기지개를 핀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따라 더 밝은 달이 정원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조금 걸을까.
나는 바로 옆에 걸려있는 흰색 숄을 두른 뒤, 방 밖으로 나갔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이 약혼식을 준비해줬던 정원에까지 도착했다. 그렇게 많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한참 전 일 같았다. 가만히 정원을 둘러보던 그때,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머리에 정복을 입고 있는, 바리다스. 그의 모습이 말이다.
“바리다스!”
오랜만에 만나는 그가 반가웠던 것인지 나는 답지 않게 큰 목소리를 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 부름에 그가 나를 바라봤고 너무 활기차게 그를 불렀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민망해졌다.
아니, 반가운 게 당연하지. 그가 없는 동안 내가 일을 다 했는걸.
라고 스스로의 행동에 변명을 하던 그때 바리다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얼굴에 작은 미소를 띤 채 말이다.
“몸은 좀 괜찮은가요? 피오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웃지 않는다는 원작의 내용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잘만 웃는구만, 누가 안 웃는대.
“네, 괜찮아요.”
괜찮다는 답에도 내 상태가 여전히 좋지 않아 보이는지 바리다스는 겉옷을 벗어 내게 덮어 주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조금 과보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힘들기도 했고 내가 쓰러진 것도 사실이었기에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제가 없는 동안, 공작가의 일을 처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바리다스에게는 아니었다.
피오라의 대처는 훌륭했고 철저했다.
그 덕에 환자의 수도 줄어들었고 다른 지역으로 퍼지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아닙니다, 감사해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끝으로 나와 그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날 타이밍도 잡지 못한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바리다스가 입을 열었다.
“걱정했습니다.”
걱정? 아.
그러고 보니 토마와 자스민을 돌보느라 그린과 레몬, 렌을 돌봐주지 못하긴 했다. 아이들도 많이 걱정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쓰러진 것을 아이들도 들었을 텐데, 괜히 걱정을 끼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빨리 건강해진 모습을 보여줘야겠네요.”
내 말에 바리다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을 살피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바리다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바람이 춥습니다, 들어가시죠.”
“네, 그래요.”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머리가 울렸다. 누군가 머리를 붙잡고 흔드는 것 같은 강한 울렁거림에 나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내 몸이 바닥에 닿기 직전 바리다스가 나를 붙잡았다.
“괜찮아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일어났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잠깐 울렁거린 것인지, 머리는 다시 멀쩡해진 것 같았다.
“네, 괜찮아요.”
당분간 조금 더 쉬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주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바리다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걷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아마도 바리다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었다.
아니, 진짜 왜 자꾸 넘어지는 건데.
그의 앞에서 넘어질 뻔한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민망함에 그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바닥을 바라본 채 가만히 있자, 내가 쓰러졌다고 생각한 것인지 바리다스의 손이 내 다리와 등을 받쳐 들었다.
“아뇨, 저 괜찮아요.”
버둥거리기도 내려달라고 조르는 것도 다 큰 어른인 내가 하기에는 모두 부끄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붉어진 얼굴을 가리는 것뿐이었다.
이게 뭐야 대체.
민망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내리겠다고 억지를 부려봤자, 내 몸만 아플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나는 환자고 아픈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네.”
사실 가장 부끄러운 것은 그에게 안겨있는 것이 편하다고 느끼는 자신이었다.
아이들이 바리다스에게 안기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가 사실 그가 잘 안아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바리다스는 힘들지도 않은 것인지 땀 한 방울 없이 나를 안은 채 저택에 도착했다. 그는 내 방 앞까지 도착한 뒤에야 나를 내려주었다.
“고마워요.”
고개를 끄덕인 바리다스는 입을 열었다.
“당분간 더 쉬는 편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내 대답에 만족한 것인지 그는 내 손을 놓아 주었다. 지탱할 것이 사라져 조금 휘청거리긴 했지만 벽을 짚자 그래도 서 있을 만했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바리다스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잘 자요, 피오라.”
어두운 복도에는 창백한 달빛만이 가득했다. 그 빛을 받으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아서, 나는 대답을 하는 것도 잊고 한동안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 개 잘생겼네.
그의 얼굴에 이제 좀 면역이 생겼다고 생각했다는 건 착각이 분명했다. 얼굴에 단단히 홀린 것인지 무어라 대답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방 안으로 들어온 나는 벽에 기댄 채 무너져 내렸다.
와, 진짜 뭔데. 왜 자꾸 내 앞에서 그렇게 웃는 건데.
진짜, 그 얼굴로 그렇게 웃지 말라고요.
두근거리는 심장이 그가 너무 잘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침대에 누웠다. 어두운 천장을 보니, 조금은 진정이 되는 듯했다.
내일은 아이들을 보러 가야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 * *
하지만 역시 세상일은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날, 나는 또 쓰러지고 말았으니까.
나는 겨우 뜬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해진 몸으로 어젯밤 찬바람을 쐰 것이 화근이었다.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나는 소매를 걷어 팔을 확인했다. 반점이 생기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염병은 아닌 것 같았다.
몸살이거나 감기에 걸린 것이겠지.
몸이 아프니, 지구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더 그리워졌다. 항상 아플 때면 곁에 있어 줬던 사람들이 말이다.
그리고 아이들 생각이 났다.
어서 침대에서 일어나,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어서 나아야지, 아이들이 걱정할 텐데.
라고 생각하며 잠든 내 이마에,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것 같았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이 내 이마를 쓸자 아주 조금 숨쉬기가 편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열이 내리지 않아 나는 이틀 정도를 침대에서 잠만 자며 보냈다.
이따금 희미하게 정신이 들 때면 누군가 내 이마를 쓰다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쓰러진 지 사흘이 지나서야, 나는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숟가락을 든 손을 부들거리며, 묽은 스튜를 먹던 내게 다가온 로나가 입을 열었다.
“둘째 공자님과, 셋째 공녀님의 출입을 허용해도 될까요?”
둘째라면, 토마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가 다 나았다는 사실과 나를 걱정해 찾아와 줬다는 사실이 기쁘게 다가왔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와 렌이 양손에 꽃을 든 채 내게 달려왔다. 렌의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내 품에 안기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걱정했어요….”
훌쩍이며 말하는 그녀가 고맙고, 또 귀여워서 나는 렌을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런 렌을 바라보고 있는 토마도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간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토마는 내게 여러 가지 색의 꽃들로 만들어진 꽃다발을 내밀었다.
처음, 그가 내게 주었던 작은 붉은색 꽃이 떠올라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에게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건강해졌다니, 다행이야.”
내 말에 토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보는 건강한 토마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토마가 나았다면, 자스민도 낫지 않았을까?
나는 기대감에 입을 열었다.
“자스민은 어떠니?”
내 질문에 토마와 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입을 열었다.
“거의 다 나았어요. 아팠던 건 벌써 다 잊었는지, 약 먹기 싫다고 징징거리고 있어요.”
렌의 말에 나는 웃음과 동시에 안도했다.
아이들이 모두 나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방 밖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노크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그린과 레몬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 품에 뛰어들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형수님, 아프지 마….”
“빨리 나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귀여운 침략자들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렌과 토마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형수님 무리시키지 마!”
둘의 말에 그린과 레몬은 동시에 렌과 토마를 노려보았다. 그런 둘의 반항적인 모습에 렌과 토마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레몬이었다.
“왜 우리 빼고 가는데!!”
레몬은 그들을 쏘아보며 소리치는 와중에도 내 허리를 붙들고 있었다. 그린도 마찬가지로 내 팔을 붙잡은 채 놓지 않았다.
그런 둘의 손을 떼어버리며 토마가 입을 열었다.
“봐봐, 벌써 시끄럽잖아. 형수님은 지금 환자라고 안정을 취해야 해. 근데 너희는 너무 시끄럽다고.”
“나는 조용히 할 수 있어.”
그린은 레몬과 한 세트로 묶인 것이 억울한 듯 입을 열었고 그의 발언에 레몬은 배신당한 표정을 지으며 그린을 바라봤다.
“그러면 나는 조용히 못 한다는 거야?”
확실히, 레몬의 목소리가 아이들 중에서 크기와 톤이 남다르긴 했다. 그 사실을 렌도 느낀 것인지 그녀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레몬, 목소리 낮춰.”
레몬은 속상한 듯 나를 올려다봤고 작게 웃음을 터진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소란스러움이, 아이들이 내게 주는 애정으로 마음이 벅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