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어린이집 (35)화 (35/207)

34. 아이들의 시간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아이들이 모두 떠난 방은 평소보다 조금 더 넓고 휑해 보였다. 

그래도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니, 조금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을 놀아주느라 힘은 다 빠졌지만 말이다.

지친 몸을 늘어뜨린 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로나가 스튜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까 내가 식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것이 신경 쓰인 것인지 양이 점심 때보다 늘어 있었다. 아마 로나가 따로 주방에 부탁 한 것이겠지.

“잘 먹을게, 고마워.”

평소보다 많은 양이었지만 아이들 덕분에 식욕이 살아난 것인지, 나는 스튜를 싹싹 비웠다. 내일쯤이면 완전히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염병은 조금 잠잠해졌으려나.

영지의 상황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초반 대처는 나쁘지 않게 한 것 같은데,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으려나.

바리다스가 나섰으니 별문제 없을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일 몸이 낫는다면, 바리다스에게 상황을 물어봐야겠다. 지금은 좀 더 자고.

나는 하품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 아프다는 이유로 종일 자도 여전히 피곤했다.

* * *

눈을 떴을 땐, 또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밤낮이 완전히 바뀐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는 맑았고 몸은 가벼웠다. 이제는 완전히 나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똑똑.

방 안이 어두워 불을 켜려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 시간에 내 방에 들어올 만한 사람은 로나와 레나뿐이었지만, 눈앞의 그림자는 그녀들보다 훨씬 덩치가 커 보였다.

설마, 귀신인가?

그제야 오싹함을 느낀 나는 소리를 지르려다가 참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늦은 밤, 소리를 지르는 건 민폐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애들한테 잠이 얼마나 중요한데. 깨면 어떡해.

귀신은 없었고 차일드 공작가에 함부로 들어올 만큼 간덩이가 큰 사람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올 사람은 한 명뿐 아닌가.

“바리다스?”

내 예상이 맞았던 것인지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 계셨군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온 거지?

병문안을 왔다고 생각해 봐도, 그와 내가 그만큼 친밀한 관계는… 맞구나. 쟤 내 약혼자지. 올 만하네.

내가 그렇게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던 그 순간, 방 안에 불이 켜지고 바리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일이 많았는지 며칠 전 봤을 때보다 피곤해 보였다.

…근데 나 지금 상태가 말이 아닐 텐데. 그냥 불 끄고 있을래요?

환자라 종일 누워있어서 씻지도 못했단 말이야.

하지만 이제 와서 불을 꺼달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머리를 묶어서 개떡일 머리를 가려야 할지. 아니면 머리를 풀어서 개판인 얼굴을 가려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곁눈질로 뒤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다행히도 피오라의 외모는 하루 정도 안 씻은 걸로 무너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몸이 괜찮으신 걸 확인했으니, 돌아가 보겠습니다.”

병문안 온 게 맞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바리다스도 좀 쉬는 편이 좋을 거 같네요.”

자세히 보니 바리다스의 상태도 심각해 보였다. 눈 밑은 다크서클로 인해 어두웠고 컨디션도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네, 그렇게 하죠.”

내 말에 바리다스는 조금 시무룩한 투로 대답한 뒤 방을 나갔다.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이제 완전히 나은 것인지, 한참을 누워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따뜻한 차라도 마시면 잠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부엌으로 향하는 길에 나는 바로 옆 방의 불이 아직도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러니 얼굴이 그 모양이지.

아까 바리다스의 상태를 떠올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류 정도야, 내가 해주지 뭐.

나는 바리다스를 재울 생각으로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리다스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아까보다 한층 더 초췌해 보였다.

“밤이 늦었습니다. 주무시죠.”

아니,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무슨 소리야.

어이가 없어진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책상으로 걸어갔다. 서류를 대충 읽어 보니, 대부분 어렵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거, 그냥 제가 처리할게요. 먼저 주무세요.”

하지만 내 말에도 바리다스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에서 서류를 가져갔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의 상태를 보아하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커피라도 한 잔 타 드릴까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답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커피, 못 마십니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피가 얼마나 좋은데, 많이 마시면 몸에 무리가 가긴 하지만. 나 같은 현대인한테는 포션 같은 존재라고.

“왜요?”

내 질문에 그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너무… 써서….”

민망해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원두도 씹어 먹을 것 같은 저 덩치로 쓴 걸 못 먹는다니. 진짜 안 어울리네. 으음, 여기에는 아직 그게 없나 보구나. …바리다스가 단 걸 좋아했지?

“그럼 잠시만 기다려 봐요.”

일반 커피보다 효력은 약할 테지만, 그래도 안 마시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 것인지 주방에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불을 킨 뒤 찬장을 열자, 여러 식료품들과 조미료 같은 것들이 보였다.

어디 보자, 커피가….

바리다스가 커피를 잘 안 마셔서 그런 것인지, 선반 가장 높은 쪽에 원두가 보였다. 커피 믹스는 아쉽게도 아직 나오지 않은 듯했다.

나는 의자를 가져다 놓고 위로 올라섰다. 손을 뻗자 간신히 원두 통이 닿았다. 꺼내어 통을 열었다. 꽤나 좋은 원두인 것인지 진한 향이 올라왔다.

우유를 꺼내기 위해 냉장고를 열자, 바로 아래 칸에 있는 과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중 바나나와 딸기를 주워들었다.

만드는 김에, 아이들 것도 같이 만들어야겠다.

내가 만들려고 하는 건 바로 라떼였다. 바리다스가 먹을 카페라떼와 아이들이 먹을 과일 라떼. 아이들 것은 라떼보단 과일 우유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대학교 때, 카페 알바를 한 적이 있었기에 라떼 만들기는 자신이 있었다.

커피를 내린 뒤, 우유에 거품을 냈다. 

설탕은 조금 많이 넣는 편이 좋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설탕을 쏟아부었다. 이 정도면 바리다스도 쓰지 않고 맛있게 마실 수 있을 것이었다.

어느새 커피가 다 내려졌고 나는 긴 잔을 가져와 거기에 얼음과 우유를 넣은 뒤 커피를 천천히 부었다. 아직 알바할 때 실력이 안 죽었는지, 예쁜 그라데이션이 나왔다.

냉장고를 열어보자 짤주머니에 남은 크림이 있어, 그것으로 라떼 위를 한 바퀴 돌리자 더 맛있어 보였다. 아쉽게도 빨대가 없어 나는 기다란 티스푼을 찾아 컵에 넣었다.

일단 가져다주고, 아이들 것도 만들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컵을 들고 바리다스에게 향했다.

입맛에 맞으면 좋을 텐데.

한 손으로 쟁반을 받치고 노크를 하자 바리다스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내 손에 들린 라떼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달달한 커피에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이내 내가 내민 잔을 받아들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그의 말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쟁반에 올려져 있던 기다란 티스푼을 내밀었다.

빨대가 있어야 편하고 더 예쁜데.

이 점은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어 드시면 돼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바리다스는 휘핑크림과 커피 그리고 우유를 천천히 섞기 시작했다. 양을 적당히 조절했기에 다행히 넘치지는 않았다. 

라떼를 다 저은 바리다스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셨다.

그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다시 순식간에 세 모금을 더 들이킨 그는 잔을 떼고 입을 열었다.

“달달하고… 정말 맛있네요.”

진심에서 우러나온 칭찬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설탕을 그렇게 부었는데 당연히 달고 맛있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원하신다면 다음에 또 만들어 드릴게요.”

내 말에 바리다스는 또 미소를 지었다. 그 위험하고 해로운 미소를 말이다.

“고마워요.”

그의 말에 나는 최대한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마무리하고 주무세요.”

“감사하지만, 무리하지는 말아 주세요. 그리고 잘 자요.”

걱정은 고마운데, 조금만 더 무리할게요.

방 밖으로 나간 나는 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먹을 과일 우유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자스민도 거의 다 나았다고 했으니까. 먹을 수 있겠지.

주방으로 돌아가자, 아이들의 아침 식사를 만들기 위해 요리사들이 이미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말이다.

“잠시 주방을 좀 빌리고 싶어.”

내 말에 그제야 나를 바라본 주방장이 내게 달려왔다. 일하는 중에 들어온 내가 민폐가 된 거 같아,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아이들에게 줄 음료만 만들고 나갈게요.”

내 말에 주방장은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내가 주방 한쪽을 내주었다. 나를 도와줄 보조까지 붙여준다는 것을 거절한 뒤 나는 팔을 걷어붙였다.

과일우유 하나 만드는데, 누가 보조까지 붙여.

나는 짤주머니에 담긴 생크림과 딸기, 바나나, 그리고 우유 설탕을 준비한 뒤 과일들을 으깨기 시작했다. 몇몇 요리사들은 내 그런 행동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으깬 딸기와 바나나를 설탕과 섞어 컵에 반쯤 담은 뒤, 위에 우유를 부었다. 그리고 생크림을 올리자 누구나 아는 그 라떼의 모습이 나왔다.

나쁘지 않네.

그 행동을 다섯 번 반복하자, 바나나 우유 세 개. 딸기 우유 세 개가 나왔다.

그냥 맛 하나로 통일할 걸 그랬나. 조금 후회가 되었다.

“아이들의 아침을 가져다줄 때, 같이 내주겠어요?”

주방장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해 드려야죠.”

대부분의 요리가 완성된 것으로 보아, 이제 곧 아이들이 일어날 시간일 것이었다.

“고마워요 잘 썼어요.”

내가 사용했던 접시들을 설거지까지 하려 했으나, 요리사들의 강한 저항에 결국 내가 사용한 자리밖에 정리하지 못했다.

식당에 도착하자, 렌과 토마 그리고 자스민이 앉아 있었다.

자스민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토마와 렌은 나에게 달려왔다.

“이제 다 나으신 거예요?”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환하게 웃는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우리들의 대화 때문에 깬 것인지 자스민도 의자에서 뛰쳐 내려 달려왔다.

“형수밈!!!”

그녀는 내 품에 안기더니 얼굴을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그런 자스민이 귀여워 등을 토닥이며 안아주자 자스민도 내 허리를 껴안았다.

“간호해저서 고마어요.”

“뭐가 고마워, 네가 나아서 다행이야.”

그때 레몬과 그린이 접시를 든 시종들과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 둘은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쌍둥이와 인사를 한 뒤, 우리는 식사를 시작했다.

오므라이스와 샐러드, 그리고 여러 가지 음식들과 함께 내가 만든 바나나 딸기 우유가 나왔다.

처음 보는 음료가 신기한 듯 아이들의 눈이 커졌다.

“이건 머야? 딸기가 있어!”

“바나나도!”

신기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나는 우유 옆에 준비된, 기다린 티스푼을 아이들에게 주었다.

“저어서 마시는 거야.”

내 말에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숟가락으로 우유와 과일을 섞었다. 그러자 파스텔 톤의 딸기와 바나나 우유가 되었다. 그것을 보며 아이들은 낮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딸기 코코아 같아!”

“이제 마셔도 돼요?”

반짝거리는 그들의 눈동자 때문에 웃음을 터트린 나는 끄덕였다.

“달달해서 맛있어.”

내 말에 자스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딸기우유와 나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근데 형수밈 달달하다는 고가 모야?”

“달콤하다는 뜻이 아닐까?”

렌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에는 달달하다는 말이 없나?

그런 것치고는 아까 바리다스는 자연스럽게 사용하던데.

눈치가 얼마나 빠른 거야, 진짜 귀신인가? 아무래도 앞으로 바리다스의 앞에서는 행동을 더 조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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